
- 뿌
- 동아연극상 연기상 받으신 거 축하 드려요.
- 정호
- 감사합니다
- 뿌
- 어떠셨어요?
- 정호
- 글쎄요, 전혀 예측도 못했고 기대도 안 했는데, 기분이 되게 좋았죠. 특별히 메인 캐릭터를 했던 게 아니어서요. <가지>는 누가 알려줬는데 54분만에 등장하는, 잠깐 나오는 역할이었고,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다같이 했으니까요.
- 뿌
- 이런 말이 좋진 않지만 보통은 ‘주인공’을 해야 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역할이 아니었는데도 상을 받으셔서 또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 정호
- 기분은 잠깐 좋고 또 다시 삶은 시작되니까. (웃음)
- 뿌
- 어떤 삶이 시작되시던가요?
- 정호
- 또 다시 작업에 들어가고, 연극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고, 새로운 작품은 똑같이 어렵고, 했던 작품도 쉽지는 않고, “잠깐 기쁘고 또 시작이구나” 그랬죠.
- 뿌
- 아, 그러고 보니 <손님들>에서 소년 역했던 김하람 배우가 아드님이시죠? (<손님들>은 2017년에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연말, 연초에 너무 좋으셨겠어요.
- 정호
- 너무 기뻤죠. 동아연극상 시상식 할 때 아들이 “아버지한테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울컥해가지고 나도 울컥하고, 웬만하면 그런 얘길 안 하려 했는데 저도 나가서 “아들하고 같이 상 받게 돼서 기쁩니다.” 그랬죠.
- 뿌
- 2대가 같이 상을 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 정호
- 얘도 고생길에 접어드는구나, 그랬어요.
- 뿌
- <손님들> 보실 때, 어떠셨어요?
- 정호
- 배우가 (그 역할로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면 이입이 되잖아요. 그런 걸 느껴가지고 울컥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 아들이라 그런가, 싶어서 딴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그 친구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 뿌
- 저는 초연만 봐서 하람 씨가 하는 건 못 봤지만, 그 역할이 너무 안타까운 처지에 있죠. 선배님 얘길 물어봐야 되는데 자꾸 궁금한 게 생기네요. 조금만 더 질문할게요. (웃음) 아들이 하는 연기를 보는 마음은 어떤가요?
- 정호
- 깜짝 놀랬어요. 아들이란 걸 떠나서 너무 잘해서. “넌 최고의 배우구나, 나보다 낫다. 진짜 훌륭하다” 제가 그랬어요. 지가 나이를 더 먹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배우는 관객한테 공감이나 감동을 줘야 하잖아요. 그게 아픔이든 고통이든, 또 이겨내는 거든, 거기에 처한 배우한테 관객이 몰입이 돼야 가능한 건데, 저를 완전히 몰입시키더라고요. 너무 아들 자랑인가?
- 뿌
- 제가 못 봐서 뭐라고 딴지를 걸 수가 없네요.
- 정호
- 예전에 거창연극제에서 같이 광대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벼랑끝날다’라는 팀의 이용주 대표님이 제 선배인데, 하람이 데리고 놀러 오라고 해서 갔다가 하게 됐죠. 걔가 “어떻게 연기해요?” 그래서 내가 “그냥 즐겨.” 그랬어요. 공연을 딱 들어갔는데 내가 긴장하고 걔는 즐기고 있더라고요. (웃음) 재밌었어요. 대표님이 잘 한다고, 니 아버지보다 낫다, 칭찬을 많이 해주셨죠. 너무 칭찬하나?
- 뿌
- 네. (웃음) 아들이 아버지 따라 놀러 다니다가 연극을 하게 된 거잖아요. 아까 선배님이 말씀하셨지만 너무 가난하고 힘든 연극판에 아들을 끌어들이신 건데, 고민 안되셨어요?
- 정호
- 고민은 요즘 들어요. 너 이거 왜 하냐, 고 물었더니 보고 자란 게 이거래요. (웃음) 어쨌든 지금은 되게 재밌어 해요. 일단은 건강한 게 최고고,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고 자기 인생 행복하면 제일 좋은 거죠. 요즘은 연기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기도 해요. 그 전엔 내가 주입식으로 가르치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많이 하게 됐어요.
- 뿌
- 좋겠네요. 집에 참고서가 있어서. (웃음)
- 정호
- 나도 몰라요. 그냥 대화만 하는 거죠. “그 순간에 잘 듣고 잘 말해라.” 이런 말은 해주죠. 그게 최고더라고요. 저도 제일 어려운 거고.

- 뿌
- 그렇죠. 이제 선배님 얘기를 좀 해볼까요. 선배님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어요?
- 정호
- 초등학교 때 교회 연극을 처음 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잘했다고 칭찬 받고, 박수도 많이 받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표현했던 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고등학교 때 짝꿍 따라서 연극반을 들어갔어요. William Inge작가의 <처분(The Disposal>이라는 작품에, 아이큐 160에 변태, 연쇄살인마가 나오는데 그 역할을 한 적이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대해서 막 떠드는 게 굉장한 대리만족이 있더라고요. 제가 연영과 간다 그랬을 때, 아마 애들이 다 놀랬을 거예요. 너무 수줍음이 많고, 있는지도 모르는 애였거든요. 니가 무슨 연영과냐, 집에서도 잠깐 난리가 났죠. 학교를 정해두고, 거길 떨어지면 안 하기로 하고, 인생을 걸고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족을 설득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연극 몇 년 하고 났더니, 이제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그만 다 때려치워라, 그러더라고요. (웃음)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면 베짱이처럼 놀고 즐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돈을 벌어야 일이다, 직업이란 그런 것이다, 너가 하는 건 일이 아니라 취미다, 형한테 그런 얘길 들었죠.
- 뿌
-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직업은 없고 취미로 연극하고 있다고요. (웃음)
- 정호
- 이번 명절에 형이 헤어질 때 그래요. “큰 변화를 바라거나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처럼 하던 대로만 해” 맞구나, 싶더라고요. 하던 대로 가다 보면 상도 받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생기는 거고요. 상을 받으면 인생이 좀 달라질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요. (웃음)
- 뿌
- 상 처음 받으신 거예요?
- 정호
- 아니요. 어렸을 때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 서울연극인대상 연기상, 이래저래 연극계 상은 좀 받았어요. 어렸을 때 받은 건 어려서 안 바뀌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받아도 안 바뀌네요. 철딱서니 없죠? (웃음)
- 뿌
- 그래야 연극 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 정호
- 예전에 오현경 선생님 화술 수업을 들었어요. 연기상 받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선생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랬더니 “그래, 옛날에 수업들을 땐 하나도 모르다가 어느 날 깨닫잖아. 인생이 그런 거야. 배우 하다 보면 두 번 정도 깨달으면서 변화가 와야 그 때 배우가 되는 거야. 그런 깨달음이 한 번도 없으면 배우 안 된다” 그러셔요. 그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 뿌
- 어떤 깨달음이었어요?
- 정호
- 첫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거예요. 옛날엔 연극하면서 자기 관리를 잘 한다고 연습 끝나면 집에 바로 갔어요. 작품 분석해가서 그만큼 딱 하고, 술도 먹으러 안가고,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동료들하고도 우린 연극하려고 만났으니까 서로 힘들게 안 하는 선에서, 그렇게 작업을 했어요. 이 얘긴 다른 인터뷰에선 한 적이 있긴 한데, 어느 날 연극할라고 태어난 게 아니고 살다 보니 연극을 하게 된 건데,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소통하고 그게 제일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니까 좀 달라지더라고요.

- 뿌
- 연기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던가요?
- 정호
- 나보다 상대가 더 많이 보이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같이 하는 사람이 소중하고, 팀워크, 앙상블, 팀 분위기도 중요하죠. 잘 화합하면서 내가 어떻게 기능을 잘 할까, 역할을 잘 수행해 낼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요. 전에는 항상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하고 창조해낼지, 행동, 말 한마디, 다 분석하고 찾고, 저절로 될 때까지 몸에 붙이는 작업을 했죠. 근데 “넌 왜 자꾸 눈에 보이냐? 연극이 아니라 니가 하는 인물이 보인다” 그런 욕을 좀 먹었어요. 나는 내 역할을 충실히 한 건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했어요. 안보이게 하는 게 뭘까, 그게 화두였어요. 그러다가 이 작품이 어떻게 가고, 뭐가 보여야 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고민을 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죠. 나를 좀 잊어버리고, 대상만 남아 있는 게 그게 더 행복하기도 해요. 내가 나를 생각하는 건 인식이고 머리로 아는 건데, 몸으로 상대랑 부딪히면서 모르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내가 디자인할 수 없는 게 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거죠. 행동, 눈빛, 표정, 터치 하나, 관객이 어떻게 볼 것인가, 관객이 이렇게 보고 있으니 여기에 포인트를 줘야겠다, 굉장히 꼼꼼하게 다 계산해서 디자인하다가… 얘기하다 보니 이상한 사람이었네. (웃음)
- 뿌
- 굉장히 성실하셨네요. 공을 엄청 들이면서 연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 정호
- 1년에 두 작품, 많이 해야 세 작품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작품을 고르게 되고, 한 이십 년 그랬더니 작품이 점점 없어지는 거예요. 몇 개월씩 놀게 되기도 하고. 친구녀석한테 맨날 논다 그랬더니, 가만 있으면 되냐, 연출도 찾아 다니고, 오디션도 보고 그래야지, 그래요. 그때부터 오디션 열심히 보러 다녔죠.
- 뿌
- 그게 언제쯤 이야기예요?
- 정호
- 몇 년 안 돼요. 4, 5년 전쯤?
- 뿌
- 좀 전에 말씀하셨던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던 시기랑 이 때가 맞물리는 거죠?
- 정호
- 그렇죠. 나를 좀 내려놔야 되더라고요. 국립에서 시즌단원 하면서, 내가 고르는 게 아니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야 되니까, 그게 공부가 많이 됐어요. 주인공은 드라마가 쭉 있으니까 갈 수 있는데, 잠깐 나오는 역할이지만 인간을 보여주는 건 어떻게 해야 되나, 뒤에 서있는 역할이래도 한 존재가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어야 작품이 튼튼해지니까 생각해보고 찾아보면서, 공부가 많이 됐죠. 예전에 왕 옆에 창들고 서있는 사람은 극단 막내가 했잖아요. 근데 사실 왕 호위무사면 최고의 무사잖아요. 비리비리하게 대충 서있으면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 걸 발견하게 됐어요. 요새는 넌 어떤 캐릭터가 맞냐, 어울려?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잘 모르겠어요. 전에 이성열 예술감독님이 <조치원 해문이>를 보고 평상시에는 참 수더분하고 착해 보이더니 연기할 때 진짜 나쁜 놈처럼 보인다고, 악역은 창조가 아니라 본성 안에 있다고. (웃음) 너무 쎈 역할 많이 할 때는 옆집의 친근한 사람 같은 역할은 모할 꺼다, 또 친근한 역할을 자꾸 했더니 반대로 쎈 역은 못할 꺼다, 그런 얘길 들으니까 어떤 게 잘 맞는지 모르겠어요.
- 뿌
- 보여지는 모습에서 캐릭터가 강하게 느껴지질 않아서 두루 다 잘 어울리실 꺼 같아요. 첫 번째 깨달음을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두 번째 깨달음은 아직 안 왔나요?
- 정호
- 글쎄요. 구부능선에 걸려서 넘어갈 듯 안 넘어갈 듯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캐릭터의 창조는 어떤 건가, 내가 갖고 있는 건 뭔가, 그런 질문들이 있어요. 이제는 머리로 접근하면 디자인이 뻔하니까, 몸이 머리보다 좋다는 건 알게 됐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젊지만, 젊은 친구들하고 작업을 많이 해봐야겠다, 왜냐하면 인식의 틀과 생각과 표현하고자 하는 게 굉장히 다르고 다양하니까, 그 안에서 저도 더 자유로워지고 깨지는 것 같거든요. 원하는 목적지를 정해놓고 해결해야 되는 것보다는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좀 넓어진다고 할까요? 두 번째 깨달음은 이 과정에서 얻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서로 나누고 영양분을 주고받아야죠. 그러니까 저 좀 써주세요. 너무 영업을 하나요? (웃음)
- 뿌
- 젊은 연출가분들은 김정호 배우한테 주저 없이 연락하기 바랍니다, 제가 대신 광고해드릴게요. (웃음)
잠깐 쉬는시간
- 뿌
- 연극계에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호
- 세상이라는 게 모든 것이 다 밝혀지는구나, 숨길 수가 없는 거구나, 생각이 들어요. 저도 돌아보게 되고, 더 조심스러워지고요. 사람이 작업을 하는 거니까, 동료로서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되는 거고, 인격을 침해하면 안 되는 거고, 권력이든 뭐든, 그걸 이용해서 그러면 안되죠. 용기 있게 잘 얘기해줘서 고맙고, 그게 세상에 정착이 돼야 되겠죠. 많이 속상하죠.
- 뿌
- 중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약자가 피해를 입을 상황이 왔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싫다고 말하고 혼자 속으로 삭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 당연한 건데…
- 정호
- 작업을 하면서 배우의 인격을 건드리면서까지 연기를 만들어야 한다, 는 강한, 쎈 연출을 만났을 때가 있죠. “저건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심한데” 하면서도 묵인했던 게 있어요. 저도 당했을 수도 있고요. 근데 연극은 이렇게 해야 되는 건가 보다, 묵인했던 것도 있고 감내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말을 못하게 된 게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작업자들은 얘기를 들어주고 대화하고 다른 걸 인정하면서 찾아가는데, 예전엔 정답이 이거야, 이걸 해, 숙제가 이걸 하느냐 못하느냐, 딱 하나 밖에 없었죠. 그걸 못했을 때의 좌절감, 해냈을 때의 짧은 기쁨, 그런 작업이 주였으니까 자꾸 눈치를 보게 되고, 일방적인 관계가 됐던 건데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연습 과정이 행복해야 작품도 잘 나오더라고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힘들 수는 있지만 사람들 간에 서로상하지 않아야죠.

- 뿌
- 앞으로 어떤 작업 하고 싶으세요?
- 정호
- 저도 이제 중견이 돼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나, 싶은데 김재건 선생님 보면서 많이 배워요. 연세가 있으시지만 항상 열려있으시고 말씀을 많이 하시기보다는 잘 들어주시고, 당신 역할 충실히 하시면서, 분위기를 따뜻하게 해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웃음) 선배의 모델을 다 보여주세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리고 알아가는 거,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개인적인 배우의 욕심으로는 서브를 잘 해주는 역할도 좋지만, 인생을 뚫고 끌고 나가는 역할도 하고 싶죠. 이렇게 얘기하면 좀 웃길 수도 있고 건방질 수도 있는데, 뛰어다니고 에너지 좋을 때,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쓸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게 시점이, 나이대가 지나면 힘이나 에너지가 안돼서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 뿌
- 혹시 덧붙이고 싶은 얘기 있으세요?
- 정호
- 항상 고민인데 연극은 왜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을까. 상황이 참 안 나아지는 구나. 근본적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건가, 그 질문이 계속 돼요. 뭔가를 얘기하고 주장하고 그래야 세상이 바뀌는 건데 너무 배우로서 주어진 역할만 하면서 살았구나, 싶고, 후회는 없지만, 그런 게 필요하구나,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 뿌
- 연극데이트 마지막 질문입니다. 김정호한테 연극이란?
- 정호
- 어떻게 얘기하든 다 재수없다 그럴 텐데. (웃음) 아까도 얘기한 건데 “연극하려고 태어난 거 아니잖아. 살다 보니 연극도 하게 된 거지.” 어떤 형님이 한 말인데, 제 생각의 전환점이 됐어요. 전에는 연극이 전부였어요. 스스로 합리화시킨 건데, 내가 느끼는 기쁨도 있지만, 작품으로 세상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너무 좋아하는 거죠. 근데 좀 덜 좋아해야 될 것 같다, 너무 좋아하면 집착이 생기니까, 너무 잘 만들려고 하면 시야가 자꾸 좁아지는데, 우리 되게 행복하게 재밌게 놀자, 그러면 품이 넓어지면서 잘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리고 여러 가지 역할을 해보긴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 겪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이, 맨날 연극하는 사람들하고만 지내면서 살았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의 한계치를 느껴요. 후회되는 건 없지만 세상을 좀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래서 연극이란 나한테 뭘까? 이 세상을 좀더 보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이) 뭐라고 얘기를 못하겠네요. (웃음) 아들이 배우라서 느끼게 된 건데 집에 들어올 때마다 다른 애가 들어와요. 하루는 늘 알던 걔고, 하루는 고민에 푹 빠져 있고, 하루는 막 대사를 하고 있고. 나도 예전에 그랬겠구나. 아빠가 아들한테 안정감을 줘야 되는데 매일 다른 사람이 집에 들어왔으니 애가 많이 힘들었겠다, 싶더라고요. 연습실에 갈 땐 집안 고민 같은 거 다 털고 들어갔는데 집에 들어올 땐 그렇게 못하고 너무 무대 중심으로 살았던 거죠.
- 뿌
- 사실 정신 건강에도 연습실 들어갈 때처럼, 집에 들어갈 땐 좀 털고 들어가는 게 좋은데 그렇게 잘 못하죠.
- 정호
- 털 때 털어야 다시 환기가 되는 건데, 그렇게 하는 게 연극인 줄 알고 계속 쥐고 다녔던 거죠. 그래서 제가 엠티를 좋아해요. (웃음) 연극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 김정호(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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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 <나는 살인자입니다>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