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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황혜란X김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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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는 배우와, 또 다른 배우 김신록이 만나 연기 이야기를 합니다.
창작자로서 배우, 창작으로서 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고민합니다. - 연극in 편집부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먼저 왼쪽 새끼손가락을 인식해보세요. 오른쪽 무릎도 인식해보세요. 혹시 그곳을 눈으로 직접 보셨나요? 그렇다면 이번엔 당신의 혀가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여있는지 인식의 눈으로 바라봐 보세요. 인식의 눈, 배우의 인식, 연기에서 인식이라는 건 뭘까요. 극단 <뛰다>와 19년을 함께 해 온 황혜란 배우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연극은 맑은 눈으로, 차가운 눈으로 냉정하게 대천세계 중생의 모습을 관조하는 것이다.’ - 가오싱젠

황혜란

연기적으로 아주 오래도록 ‘인식’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과 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움직임, 생각의 생겨남과 사라짐, 감정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계속 바라보는 것. 동시에 내 몸을 둘러싼 외부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이 곧 인식 아닐까.
연기에서 인식이 왜 중요한가.
연기가 뭔가부터 이야기해 보자. 나에게 연기라는 건, 내 몸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세계를 봐야 하고, 나를 통해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지 봐야 한다. 보는 것이 곧 인식이다. 이 세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성질과 리듬의 연속이라고 할 때, 인식한다는 것은 그 변화하는 흐름을 동시적으로 계속 따라가는 것이다. 고정적인 것을 한 발 늦게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식은 역동적인 것이다.
외부로 향하는 인식은 앙상블 훈련과 직결되겠다. 인식이 내 안으로 밖으로 두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할 때, 선배님의 경우, 극단 생활을 오래해서인지 인식이 밖으로 더 많이 작동하면서 그룹을 위한 선택들에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훈련을 할 때의 즐거움, 쾌감과 여럿이 훈련할 때의 쾌감은 다른 것 같다. 포커스를 나한테 두기도 하고 남한테 두기도 하면서 더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앙상블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신록과 함께 훈련하면서, 인식의 눈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옮겨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맞는 감각’이라고 느끼는 인식의 눈의 위치를 내 안으로 밖으로 조절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앙상블 훈련에서 서로가 서로의 욕구를 더 분명히 하면서 버티면서 부딪힐 때 더 흥미로운 순간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배우는 ‘빈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수동적인 리시버의 상태로 만드는 것. 내 몸을 통해 어떤 성질, 특성이 드러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배우, 혹은 연기 아닌가. 내가 없어지는 것. 굳이 버티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요새 무용 공연을 보면서 너무 쿨하고 재밌었다. 몸에 대한 직접적인 탐구도 흥미롭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와는 다른, 연극이 할 일, 배우의 몸이 할 수 있는 탐구가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간을 보여주는 일’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매 순간 모든 개인의 욕구가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
당연히 ‘빈 그릇’이 정말 백지나 텅 빈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몸의 특성, 신체 사이즈, 살아온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굳이 내가 주장하지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차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릇 자체가 이미 개인이다. 전체 중의 일부가 될 때 쾌감이 크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즉흥 상황에서 그룹의 욕구를 잘 따라가는 걸 보면 거기서 느끼는 쾌감이 나를 고집할 때의 쾌감보다 더 큰 것 같다. 여러 사람과 하나가 되려는 욕구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윤리적인 순간이라고도 생각한다.
‘빈 그릇’ 훈련의 핵심은 뭔가.
뭔가를 배워서 쌓는 동시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인식을 같이 가져야만 ‘빈 그릇’이 된다. 해체 없이 쌓기만 하면 기술만 있는, 다른 것이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 무엇을 받아들일 때 동시에 그것이 사라질 수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빈 그릇’ 훈련의 핵심인 것 같다. 배우는 이런 것, 저런 것을 계속 담아야 하니까.
가끔 정교한 ‘형’을 가진, 혹은 잘 정제된 기술을 가진 몸을 보면 부럽다.
배우의 몸도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인식이 수행해 내는 몸, 즉 표현력의 확장, 기술의 쌓임이 같이 가야 한다. 그러나 때로 기술의 극단에서 나오는 적확함, 그 전통이 뿜어내는 엄청난 힘을 만날 때 ‘빈 그릇’이어야 하는 배우의 존재에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는 선배 중에 한성대에 연습실을 열고 3년 동안 주 5일씩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의 플라스띠끄(plastique)와 스즈키 타다시(領木忠志, Suzuki Tadashi)의 신체훈련 메소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훈련을 이어오는 사람이 있다.
훌륭하다. 배우라는 건 ‘직’이다. ‘업’이랑 ‘직’은 다르다. 주어진 달란트가 업, 실제로 어떤 일로 업을 풀어낼 것인가가 직, 합쳐서 직업. 그래서 ‘직’은 실제로 매일매일 수행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수행성이라는 것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함’으로써 그 행위가 다른 가능성을 열어젖힌다고 생각한다. 무대에서의 즉흥도, 일상도.
맞다. 연극의 핵심 중의 핵심은, 그날 그 시간에 배우가 그 자리에 등장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등장해야 하는 것. 거기 가야 하는 것. 결국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요새 말보다 실천이 한참 뒤처진다. 반성한다. 다시 배우라는 삶의 수행성을 되살려야겠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만난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왜 여기 있지’, ‘여긴 어디지’, ‘나와 여기의 관계는 뭐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걸 찾는 과정을 ‘직’으로 삼는 것이 배우인 거고. 세상을 대하는 배우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비어있고 세계의 성질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빈 그릇’ 개념은 바르바(Eugenio Barba)가 말한 ‘투명성’ 개념과도 맞닿는 것 같다.
어쩌면 ‘투명성’이라는 개념에는 그릇에 대한 초점이 빠져있는 것 같다. 나한테는 인형이나 오브제도 그릇이다. 가오싱젠이 ‘만능배우를 제약하는 것은 신체적 제약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신체적 제약을 벗어나 뭔가를 드러내고 싶을 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내 몸의 연장으로서의 오브제인 것 같다.
가오싱젠과 인식에 대해 더 설명해 달라.
가오싱젠의 ‘중성배우론’을 이야기해 보자. 가오싱젠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배우를 ‘중성배우’라고 이야기했고, 그 ‘중성배우’가 냉정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신체와 의식 상태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게 되면 ‘만능배우’를 라고 이야기 했다.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중성배우의 상태가 마치 해탈의 상태, 다른 느낌과 연결이 없는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인식이란 나와의 끈도 여전히 있으면서도, 외부를 감각해 낸다, 수신해 낸다는 느낌이 강하다. 동시에 관찰하는 눈, 인식하는 눈, 그를 위해 필요한 거리에는 동의하지만 ‘조종한다’는 것은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성’이라는 표현의 핵심은 뭔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개성이 아닌 중성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여성과 남성, 동물과 인간, 이런 구분이 없어진,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준비된 상태.
‘요가를 오래 하면 해탈해서 연기를 못한다’는 어느 교수님의 말이 생각난다. 농담같은 말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오히려 인식이 촘촘해질수록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힘, 충동이 생긴다. 찰나까지 인식해 낼 때, 뭉텅이가 아니라 세밀한 부분 부분까지, 듬성듬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 순간을 인식해 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무슨 일이든.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오른쪽 발가락을 인식해 보세요. 목젖을 인식해보세요. 호흡은 어떤가요. 심장은 뛰고 있나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든!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배우라는 빈 그릇,황혜란,김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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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제155호   2019-03-1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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