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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한유주X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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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교실에는 있지만 출석부에는 없다. 어느 날 소풍에 갔다가 그가 사라진대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이고 출석부에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싶다. 그의 이름 없음과 그의 있음 사이에서 나는 말을 더듬고 쏟아낸다. 언어는 세계를 분절하는 기계이고 세계의 어떤 것들은 언어라는 기계에 걸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불가능에 절망한다면 어떤 글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한유주의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불가능으로 향하는 문을 뛰어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뛰어넘기를 위한, 문장들의 내적 질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다시 처음부터 짖어야 한다. …내가 본 것들과 들은 것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것들을 언제나 넘어선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지난여름 소설집 『연대기』 (문학과 지성사, 2019)를 출간한, 소설가 한유주를 만났다.
내가 아닌 것들
김연재
『연대기』에 실린 단편들의 순서가 좋았다. 첫 수록작 「그해 여름 우리는」에는 자살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마지막 수록작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에는“애도의 한 형식으로서의 반복이 내용이며 형식이 되는”, “자살자의 칼”이라는 소설을 쓰는 이가 나온다. 첫 수록작에서 마지막 수록작으로의 펼침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쓰고 지우는 수고를 하면서 공허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한유주
편집자와 수록작들을 여러 번 배열해 봤다. 수록작들이 그라데이션을 만들기를 바랐다. 맨 첫 수록작 「그해 여름 우리는」을 쓸 때는 작업실 친구들이 이유 없이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실은 이유가 있었다. 다들 육박해오는 거대한 일상을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도피자들처럼 밤마다 게임을 했다.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자살각이다”라고들 답했다. 그래서인지 이 단편에서는 암울한 감정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상태만 쓰인 느낌이 있다. 이후, 사회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기고 소설가로서 다른 면들을 보게 되면서 마지막 두 개의 단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찾아서 떠나야겠다고 변하는 것 같다.
김연재
『연대기』 수록작의 변화뿐 아니라 『불가능한 동화』(문학과 지성사, 2013)에서 『연대기』로의 변화도 감지된다.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닌 것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 같기도 하다.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
한유주
20대 때는 다른 것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내가 가장 큰 소재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월호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 너무나 이상한 방식으로 사고가 발생했고 사후 처리의 방식에서 총체적 무능력 혹은 악의를 보게 되지 않았나. 단식투쟁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사람들, 인터넷에서 오가는 혐오의 말들을 보며 끔찍함을 느꼈다. 이 정도로 망가져 있었나 하고. 세월호가 침몰할 때 꼬리만 남아있는 배를 보며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이야기를 하나 떠올렸다. 끔찍했다.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재현하기 힘든 것, 하지만 어떻게든 재현해야 하는 것’이라는 문제를 그렇게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총체적인 사고(事故) 앞에서 작가로서는 재현할 수 없지만,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 직업이 작가일 경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쓸 수도 간접적으로 쓸 수도 없는 사건이었고 내가 이야기 자체를 잘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아닌 것들을 찾아 떠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마주했던 것 같다. 문단 내 성폭력의 경우, 당시 모르는 것도 권력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가해자이고 피해자인데 나는 나를 지키려고 다른 것을 보지 않았나 싶었다. 이 일들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제 나에 대해서 그만 써야겠다, 정말로 그만 써야겠다.
한유주
김연재
지우기 위해 쓰고 공허를 향해 나아가는 수고 자체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한유주
모두가 글 속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마도.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시대나 사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않나. 글쓰기도 마찬가지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글쓰기 방식, 형식 자체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한 반영, 일종의 증거 같은 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연재
언어로써 대상을 말하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생각과 어떤 방식으로든 말해야 한다는 의지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나.
한유주
본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뭘 쓰든 그게 본질에 가 닿기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써보려는 행위를 계속한다. 계속해서 실패로 귀결될 텐데, 그 귀결을 어떻게 보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하지만 계속한다. 하다 보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아직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이라는 전제가 물리쳐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언어의 불가능성
김연재
언어의 불가능성을 해명하는 일이 어떻게 중요한 작업으로 자리 잡았는지 궁금하다.
한유주
우선 나는 묘사를 잘 못 한다. 탁월한 이야기꾼이 아닌 것도 자명하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을 때도 묘사가 나오는 부분에는 별로 설득이 안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취향일 수도 있고 내가 잘 못하기 때문에 나온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글을 쓰면서 묘사를 해야 할 때, 내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싫어하나, 왜 못 하나, 질문하다가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총량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이게 변명일 수도 있지만. 예컨대 손의 이 부분을 지시하는 이름이 있다면, 혹은 이 부분을 지시하는 이름이 있다면, 혹은 이 부분을 지시하는 이름이 있다면. 명사들을 쓴다면 굳이 묘사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불가능한 동화』 끝부분에 쓴 이야기다. 그러던 중 영국에 사는 에이전트의 집에 묵었다. 나는 영어로 커피나 사는 정도인데 대화를 할 때 어렵더라. 그래서 통사 없이 명사들로만 말했다. 에이전트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통사 없이, 명사들이나 명사를 포함한 어떤 단어들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말하니 에이전트가 웃더라.
김연재
김연재
그 이야기가 『연대기』 마지막 수록작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한유주
맞다. 그렇게 연결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김연재
나는 지금 극작과 대학원 과정에 다니고 있는데, 미국 학교에서 오시는 선생님 수업을 듣고 있다. 희곡을 쓸 때 역할 이름을 먼저 쓰고 탭 띄고 대사를 쓰지 않나. 처음 희곡을 번역기를 돌렸는데, 역할 이름이 주어 없는 문장들의 주어가 되어버린 거다. 그 상황이 재미있었다. 번역보다 말하기가 더 힘들었다. 선생님이 작품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통역도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도 내 말이 뭔지 모르겠고 영어도 명사로밖에 말하지 못하니 답답해서 눈물이 줄줄 나더라. 한편, 처음부터 영어로 쓸 때는 재미있었다. 아는 것, 쉬운 것밖에 못 쓰니까.
한유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작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작가 워크숍에 갔다. 다국적자 열 명 정도가 모였는데 나와 서티모르 작가 빼고는 모두 네이티브 영어 사용자더라. 영어로 작품을 써야 했는데 문장이 단순해지면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그전에도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문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안 해본 건 아니었는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쓴 게 엄청난 문학적 성취가 있는 글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사용하는 도구 자체가 달라졌을 때의 즐거움이 분명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강압적이지만. 그런 곳에 가면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영어를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 페스티벌을 할 때 한중일 작가들이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통역이 필요하니까. 세계문학이라는 게 어떻게든 실존을 할 텐데, 모든 세계문학에 대한 의사소통이 왜 영어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불쾌감과 짜증이 있다. 양가적 감정이다.
김연재
양가적 감정에 공감한다. 한편 다소 극단적으로 다른 나라에 갇혀서 모국어를 차단하고 외국어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한유주
다와다 요코의 경우에는 성인이 된 이후 자발적으로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았나. 어떤 사람들은 그게 가능한 것 같다. 나는 한국어에서 해결을 못 본 게 많아서 아직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처음에 질문하셨던 것처럼, 내가 가진 언어라는 도구의 불가능성, 불완전함이라는 걸 가지고 작업을 많이 했으니까 그 도구 자체를 내 몸에 없는 것으로 바꿨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식의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연재
언어라는 도구의 불가능성, 언어로써 대상에 도달하는 일의 불완전함에 대한 작업이 시나 희곡이 아닌 소설이라는 장르의 고유성과 어떻게 관계된다고 생각하나.
한유주
희곡은 안 써봤고, 시는 처음 데뷔했을 때 사람들이 차라리 시를 쓰라고 해서 써봤지만 잘 안 됐다. 노력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러면서 시는 못 써도 산문에서 시적인 문장을 쓸 수는 있구나 했다. 무엇보다 산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진척을 덜 시킨다는 것이다. 진척이 되는데 그 과정 자체를 유예시킨 달까. ‘a는 a다’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a는 a′다’ 또는 ‘a는 b다’라고 얘기하는 거다. 이런 문장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졌을 때, 읽는 사람에게 ‘a는 a다’가 아니라 ‘a는 a인가?’하고 질문하도록 하는 게 산문에서 시적인 문장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은 암시하면서 드러내는, 지시하지 않으면서 지시하는 소설인 것 같다. 이런 일을 계속해보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연재
그런 점에서 내러티브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주된 방식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유주
그런 것 같다. 만약 내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면 내러티브를 썼겠지만 나는 한 줌의 서사를 좋아한다. 희곡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이라는 건 어쨌든 시간을 다루는 장르여서 이 지점에서 시작해서 저 지점에서 끝나지 않나. 일정한 시간의 변화가 있다. 아주 극소의 시간 혹은 몇만 년에 이르는 시간이 지난다. 서사의 기본은 시간의 추이이기도 하니까 이 점에서는 내가 내러티브를 포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극소의 내러티브만 있어도 소설이 되겠지, 그렇다면 내러티브의 양을 얼마큼 줄여야 소설이 소설이 아니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김연재
소설이라는 장르에서의 일종의 실험인가. 작가님의 소설을 언어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실험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유주
실험은 누구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알리바이 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계속 무언가를 해나간다는 점에서는 나도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주변에 고양이들이 갑자기 많이 생겼다. 친구들 고양이한테 장난감을 만들어서 갖다 바치고 있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지 않나. 그래서 자기 영역을 매일 순찰을 돌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순간에 천천히 한 발 내딛으며 자기 영역을 확장한다. 내가 본 고양이의 위대한 점은 실험과 실천을 동시에 한다는 거다. 이게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하나씩 쓰면서 실험하고 그게 곧 실천이고.
작업실의 안과 밖
김연재
소설을 쓸 때, 무엇에서부터 시작하는지 궁금하다. 추상적인 말이겠으나, 세계를 관념적으로 감지했을 때 그 관념이 사물, 현상, 이미지와 결속하여 작동하는 과정이나 순서가 있나. 혹은 그 반대로 포착된 이미지가 관념과 결속할 때라든지.
한유주
즉흥적으로 우연히 발생하는 이미지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결속이나 큰 그림에 대해서는 계획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를 크게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빚어내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쓰는 사람이다. 나는 그냥 쓰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글이 어떻게 조립되고 묶여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다만 과학책, 수학책 읽는 걸 좋아한다. 예컨대 미분, 적분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미분은 나누고 적분은 쌓는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 개념에서 오는 이미지가 있고 이것을 형식에 도입하고 싶을 때가 있다. 언어를 미분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 보면 다른 방식으로 글쓰기에서 나타난다. 또는 이런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다가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대화에서 힌트를 약간 얻기도 하고.
김연재
소설 「한탄」과 「자연사 박물관」이 2014년에 산울림 극장에서 12언어스튜디오에 의해 공연되었다. 연극작업이 어떤 경험으로 남았나.
한유주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 등이 나에게는 쓰기의 한 방식으로 보였다. 이게 이런 식으로 발화될 수 있구나 하며 재미있었다. 만드신 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불가능한 동화』는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각색해서 두 시간짜리 공연으로 만들어졌다. 영광과 기쁨으로 남아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머릿속에서 시각적인 이미지로 구상했던 것들과 달랐는데, 작품을 어떤 식으로 읽고 해석했는지 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김연재
그래도 처음에 쓸 때 의도한 것과 공연의 결과가 크게 다르거나 소통이 안 되었다고 느낄 때는 속상하기도 하지 않나.
한유주
나는 데뷔하고 20대 중후반까지는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서 교류가 거의 없었다. 작품에 대해 피드백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가끔 드물게 메일로 감상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독해가 많았다. 누군가 내 책을 읽어주고 있구나 싶어서 신기하고 고마웠다. 그들의 해석이 더 좋기도 했고. 그러면서 내 의도가 사실은 나에게만 중요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연극무대에서도 내 의도와는 상관없는 어떤 독해를 가시적으로 본 것 같다. 물론 작품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 때 내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늘 다르게 나온다. 나는 그런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간헐적으로 캐주얼하게 공연되는 경우와 공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쓰는 경우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김연재
글 쓰는 일이 어쨌든 개별자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계속 쓰기 위한 용기 같은 것은 어떻게 얻곤 하나.
한유주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되게 훌륭한 직업은 아닐 수 있는데 평생 갈 수 있는 직업이긴 한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내 몸과 정신에 새겨지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잘 관리 한다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글을 쓰는 한,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내가 딱히 고집이 있다거나 대단하다거나 소수에 속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지금 그냥 하던 대로 해야지, 더 좋은 쪽으로. 지난 10년은 나에게 문학적 야심이 없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냥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 잘 안 되지만. 맨날 쓰는 것도 아니고. 글을 그만 쓰는 게 나에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쓰는 행위는 나를 배신할 수 있지만 읽는 행위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를 생각하면 좋은 것 같다.
김연재
『연대기』 이후 집필 계획은 어떻게 되나.
한유주
“자살자의 칼”에서 시작했다가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라는 『연대기』에 실린 동명의 작품과 이어지는, 장편을 염두에 두었으나 장편까지 안 갈 것 같은 작업을 꼭 해야 한다.
김연재
나는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를 좋아한다.
한유주
처음엔 에세이에서 시작해서 소설처럼 된 작품이다.
김연재
에세이에서 시작해 소설이 되었다는 말이, 나 아닌 것의 이름을 찾아간다는 인터뷰 초반의 이야기와 연결되어서 재미있다.
한유주
그런 것 같다.
김연재
최근에 <순간적 악흥>이라는 공연을 인상 깊게 보았다. 작곡가와 배우가 피아노와 아코디언으로 클래식과 현대음악을 연주했다. 현대음악 연주를 들으며 작가님 작품을 떠올렸다. 인터뷰를 앞두고 있어서 그랬나.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곡을 쓸 때보다 악기를 분해해서 각 부분의 역할과 소리를 분석하는 데에 더 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 그래서 마지막 질문으로, 어떤 악기를 좋아하는지 묻고 싶다.
한유주
제목이 멋있다. 악흥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다. 나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클래식 악기 중에서는 첼로 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멜로디언 소리를 좋아한다. 어릴 때 불던 느낌이 있어서. 사실 다 좋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김연재, 한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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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X김연재

한유주X김연재
한유주_소설가

소설가. 소설집으로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경사>, <연대기>가 있고,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가 있다. 현재 중편소설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를 출간 준비 중이다. ehcztein@gmail.com


김연재_극작가

<폴라 목>, <우리가 고아였을 때>, <배종옥, 부득이한>, <노트북열람실> 등을 썼고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김신록에 뫼르소, 870×626cm>를 각색했다. duswoduswo95@naver.com


제172호   2019-11-2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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