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에 대학로 무대에서 처음 맡았던 역은 '거지'였다.
대사라곤 "하나만" 딱 한 마디뿐이던 <불티나>의 무명 거지는 10년 후 <뉴욕 안티고네>에서 말 많은 폴란드 노숙자로 환생해 원 없이 한풀이를 한다. 거지로 출발, 노숙자로 방점을 찍은 그는 스리슬쩍 말레이시아의 일본인 히끼꼬모리로 변신한다. <잠 못드는 밤은 없다>며 풍선껌만 자근자근 씹어대는가 싶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대권찬탈에 성공, <안티고네>와의 침을 뿜는 설전을 거치며 권력투쟁의 화신으로 거듭난다. 연극계는 그의 열정적인 둔갑을 주목했고 관객들은 그의 새로운 가면에 환호했다. 왕관을 쓴 히끼꼬모리, 박완규를 만나보자.
-만나고 싶은 연출가는?
그동안 거의 이성열, 박근형 두 분 하고만 해왔다고 보면 된다.
한태숙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고 싶다. 김광보, 성기웅 연출도 만나고 싶다.
아니다. 사실 모든 연출가를 한번 씩 만나고 싶다.
박근형 연출님과는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는 나를 좀 편하게 놔주는 연출이 좋은데 그래서 박근형이랑 잘 맞는다.
박근형은 너무 놔둔다 싶을 정도로 놔준다. 공연이 내일인데 대본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작품 할 때 한 마디도 없었다. 터치를 안 한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대본을 보며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 인물은 뭐지?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면서 그 인물이랑 친해지게 된다. 그게 무대 위에서 굉장한 힘이 된다.
"여기서 이렇게 해!" 하는 연출보다는 그렇게 그냥 놔두는 연출이 좋다.
내 스타일은 그렇다.
-라이벌 배우는 누구?
오현경! (하하하) 이호재! (하하하) 농담이 아니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배우로 남고 싶다.
그러려면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술도 줄여야 하는데.
오현경 선생님이 얼마 전에 <봄날> 하시면서 그러시더라.
"너, 술 먹지 마! 내가 아는 사람들 다 너처럼 술 먹다 죽었어!"
-차기작은?
6월 1일부터 10일까지 아르코대극장에서 공연되는 <과부들> 연습 중이다.
9월에는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이강백 작, 구태환 연출 <북어대가리>에 출연한다.
<과부들>은 <추적>, <죽음과 소녀>로 잘 알려진 아리엘 도르프만의 명작으로 국내초연이다.
작품이 너무 좋으니까 이성열 연출가가 별로 할 게 없어서 스트레스가 많은 거 같다. (히히히) 27명이 출연하는 대작이다. 기대해도 좋다. 나는 숨기고 싶은 과거의 잘못을 덮고자 하는 인물을 연습하고 있다. 뭔가 많이 보여주고 싶은데 연출이 자꾸 힘을 죽이라고 해서 어제는 갑자기 재미가 없어지더라. 그래서 들입다 술을 퍼마신 거다.
이제 연습할 시간이다. 슬슬 술이 깬다. 다시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