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top

연극인

검색하기

게릴라 마을의 마지막 극장지기
작가/연출가 이채경

오세혁_작가, 연출가, 배우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채경은 연희단거리패의 차세대 작가 겸 연출이다. 그리고 동갑이다. 2011년에 밀양연극제에 갔을 때, 이채경은 나한테 맥주를 한잔 하자고 했다. 맥주를 마시고 이채경은 물었다. 연극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정말 있냐고. 나는 없다고.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 솔직함이 좋았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작품인 <산채로 말린>과 <샘>을 보게 되었는데 독특한 세계에서 기괴한 사람들이 나오는 희한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아주 따뜻했다. 그 독특하고 기괴하고 희한한 것들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따뜻함이 좋았다. 이채경은 인터뷰 내내 줄곧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닦으면서 그녀는 계속 말했다. "내가 연극을 해도 되는 걸까, 정말로?"

    이채경

  • 왜 신은 소통도 할 수 없는 세상에 와서 살고 싶을까

    연희단거리패에서 역할이?
    우리극 연구소 15기로 시작했다. 기획팀 겸 작, 연출 겸 해외 담당 기획과 프로듀싱을 총괄하고 있다. 영어가 들어가는 건 거의 다 한다.(웃음) 기본 통역부터 저작권, 작품 번역, 해외 초청, 초청증 발급, 축제 지원 등등.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을 보면 정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더라.(웃음) 본인의 일주일 이동 경로가 어찌되나.
    김해 도요마을에서 밀양으로 넘어가 오전 연습을 하고 서울에 넘어가서 작업을 하고, 경기도 용인에 가서 수업을 하고 다시 밀양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나만 이렇겠나. 단원들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
2014.04.04~27

  •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에 대해 설명해달라.
    독일 극작가 모리츠 링케가 쓴 작품이고 원제는 <여자의 벗은 몸을 아직 못 본 사나이>다. 세상이 멸망하는 마지막 날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씬을 완성하는, 연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읽어봐서 알겠지만 주제로 직행하는 극이 아니다. 내가 천착하고 있는 요설극(이라고 나는 부르는데)과 너무 맞아떨어졌다. 소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가치는 무너져가고, 그래서 서로가 고립되고, 그러나 멸망 직전에 단 한 번의 소통을 하게 되는, 그래서 그 소통이 아름다워지는 그런 거.

  • 읽는 순간 마음에 들었나?
    이 작품은 링케의 처녀작이다. 처녀작인 만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 하고 싶었겠지. 더군다나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얼마나 많이 알겠나.(웃음) 지식, 아포리즘, 정보, 철학의 모든 것을 총동원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너무 귀여웠다. 나한테도 그런 점이 있으니까. 그게 마음에 들어서 선택을 했는데, 문제는 이게 배우들과 관객들과 소통 되냐는 건데.(한숨)

  • 그런 점이 있다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꽂혔던 대사들이 있다. 연출이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혀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길 콱 갈아엎어? 아냐,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내려온 걸 보면 아직 가능성이 있어. 좀 더 두고 보자. 그 대신 말이 필요해. 말. 말을 하고, 하지만 말에는 의미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말을 넘어서 소통할 수 있는 무엇" 고대 로마에서 갑자기 현대로 날아온 소년이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현대의 인물들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년은 말한다. "그래도 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요." 이런 대사들이 내 가슴에 꽂힌 거다. 왜 신은 소통도 할 수 없는 세상에 와서 고생을 할까. 왜 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을까.


  • 말 뒤에 숨고 싶어서 시작한 연극

    이채경

    이채경에게는 '소통'이 가장 큰 관심인가 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공존하기 위해 말을 한다. 말밖에 소통할게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서로가 쓰는 말의 의미가 너무 다르다. 결코 백 프로 소통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이 무섭다. 그럼 나는 어떻게 소통하고 공존해야 할까? 그게 연극이었다. 소통하기 힘드니까 소통하고 싶다고 연극을 하는 거다. 연극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자마자 흥분했다. 이 작가도 어쩌면 '말 뒤에' 숨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처럼.

    말 뒤에 숨는다고?
    나는 연극을 하면서도 내가 연극을 할 자격이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는 정말 유치하고 부족한 아이니까.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으니까 끊임없이 말을 하고, 그래서 그 말 뒤에 숨고. 이런 게 내 작품에 다 반영되는 거다.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말을 하고, 그 말 뒤에 숨고. 이 대본도 그게 보였다. 어딘가 숨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보였다. 그 숨고 싶은 마음에 나는 공감했고, 그 마음을 소통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너무 솔직하다. 나야 좋지만.(웃음)
    사실, 나는 인터뷰가 늘 부담스럽다. 내가 그 만큼의 역량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나는 아직 연극이 뭔지 계속 고민하는 사람인데, 아직 스스로의 답도 못 내놓고 있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나와서 얘기 하니까 좀 시원해진다. 고맙다.
산채로 말린
<산 채로 말린>
2011.07.14~30

  • 나는 <산 채로 말린> 때부터 이채경의 작품이 좋았다. 나한테 없는, 이상한 음습함이 있어서. 그 다음 작품들도 계속 음습해서 좋고.(웃음)
    이건 진심인데, 나는 정말 로맨틱한 작가다.(웃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하지만 내 '조금'이 다른 이들에겐 '엄청 크게' 느껴지나 보다. 부딪히고 막힐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배우들한테 미안해진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걸 해도 되나? 난 소통하고 싶은 건데, 연극으로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회를 변혁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저 작은 소통을 해보고 싶은 건데. 실험극으로 여겨지면, 악취미로 여겨지면 어쩌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매일 매일 소통하려고 애쓰고 있다. 배우들과, 그리고 관객들과.

  • 이 작품과도 잘 소통 중인가?
    매일 드는 생각이 있다. 연극으로 뭘 해야 하지? 연극으로 세상을 변혁하고 바꿔야 하나? 그럼 좋지. 연극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니. 하지만 세상을 변혁하고 싶으면 거리로 가야지. 난 극장에 있잖아. 나는 왜 극장에 있지?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이런 와중에 이 작품을 읽은 거다. 지구 멸망까지 나흘이 남았다. 이들은 나흘 동안 연극을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이틀 만에 다 만들었다. 그러면 나머지 이틀은 뭐하지? 할 게 없으니까 이상한 말이나 하면서 미쳐간다. 그러다가 거리로 나간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틀은 연극했으니 나머지 이틀은 세상으로 나가라는 소리구나. 세상에 나가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얘기해주고. 연극인들 용기 좀 내서 세상으로 나가자는 말을 한 거다. 망치로 맞은 것 같더라. 나한테 이 연극이 꼭 필요하다.

  • 내가 하는 연극은 누구로부터 온 연극인가

  •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에 등장하는 배우들 자랑 좀 해주겠나.
    배보람은 나이는 어리지만 선배로서의 입지가 스스로 있다. 팀을 잘 이끌고 어른스럽다. 언제 어느 때나 믿을 수 있는 배우다. 강호석은 상당히 진중하고 생각이 깊다. 버티는 힘이 상당하고 신뢰감을 준다. 임현준은 연희단 젊은 기수 중에 가장 매력적이고 감각 있는 배우 중 한 명이다. 나는 십년을 함께 하고픈 배우들을 늘 꿈꾼다. 잘하고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곳을 지향하는 배우들을 찾으려고 한다. 한마디로 같은 이상을 꿈꾸는 사람. 내 이상은 연극이고, 내가 봐온 연극은 연희단 연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꿈꾸는 배우들은 언제나 연희단 배우들이다. 세 명 모두 상당히 연희단스럽고 상당히 매력적이다. 나는 축복받았다.(웃음)

  • 모리츠 링케를 독일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잘생겼다!(웃음) 이메일로 얘기할 때는 내가 남자인 줄 알고 '미스터 채' 이러다가 막상 만나니 깜짝 놀라며 맥주를 사주더라. 어여쁜 동양 여자가 오니까 좋았겠지.(웃음) 독일은 다 생맥주인줄 알았는데 국내에서도 파는 벡스 병맥주라 좀 그렇긴 했는데.(웃음) 사람이 너무 멋져서 화가 났다. 완전 멋진 사람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배우이자 희곡작가이자 영화배우다. 그의 희곡 중에 <우리는 살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게 엄청 잘 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독일 최고의 여배우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이 정치적으로 너무 올바르기까지 하다. 너무 얄미운 사람이다. 너무 웃긴 사람이고. 영국인들과 축구를 하는데 시합 이름이 축구 테러리스트전이다. 백인팀 대 아랍팀으로 나눠서. 이게 얼마나 웃긴가. 우리나라에서는 안 통하는 게 문제지만.(웃음)

    이채경

    연극 얘기는 많이 나눴나.
    독일 연극의 인상이 뭐냐 묻기에 회전무대라고 대답했다. 독일 연극은 왜 공연만 하면 뭘 그렇게 계속 도냐고. 돈이 그렇게 많냐고. 우리는 제작비 없어서 못 돈다고.(웃음) 껄껄 웃더라. 한국 연극은 어떠냐고 묻기에 <못생긴 남자>도 했고 <황금용>도 했다고, 독일 연극 많이 한다고 하니까 놀라더라. 그리고 다시 한국 연극에 대해서 묻는데, 아! 이 순간 갑자기 확 부끄러워진 거다. 이 얘기 하려면 옛날 얘기부터 해야 되는데 다시 돌아가도 되나?

    얼마든지. 듣기만 하니까 나도 편하다.(웃음)
    인도의 젊은 연출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카프카라는 거다. 나는 인도라니까 반가워서 밀양 연극제에 '카타칼리' 초청 했었다고 하니까 표정이 확 변하더라. 정색을 하면서 "인도 연극인들 카타칼리 안 좋아해. 우리는 카프카, 베케트, 사르트르를 좋아해." 상당히 유럽적인 대화가 오고 갔던 거다. 링케를 만났을 때 나는 카스트로프가 어떻고 오스터마이어가 어떻고 하면서 내가 아는 독일 연극인에 대한 얘기를 마구마구했다. 이 분도 알고 저 분도 알아요. 이 작품도 알고 저 작품도 알아요. 어린애처럼 신나게. 링케도 그래그래 하면서 잘 들어주더니 헤어지기 전에 한마디 하는 거다. "한국에도 연극이 있구나. 난 전통극만 있는 줄 알았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한테 연극이란 너무나 유럽적인 것이거든" 이 사람은 문화제국주의자도 아니고 아주 지극히 평범한 연극인이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한국에도 연극이 있다는 게 놀랍다고.

    세상에! 기분이 어땠나?
    부끄러웠지. 독일 연극 얘기만 신나게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그 인도 연출가가 떠오르는 거다. 내 앞에서 인도 연극 얘기는 안하고 유럽 연극 얘기만 했던 그 연출가. 너무 웃겼다. 인도도 식민지였고 한국도 식민지였다. 식민지 출신 두 나라의 연극인들이 똑같이 유럽 연극 얘기만 했던 거다. 이게 뭘까. 나라는 존재가 백미터 뒤로 날아가는 느낌이더라. 나는 내 스스로 알고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식민체제의 산물이었던 거지. 수입된 문화와, 식민 지배와, 문화의 단절이 겹겹이 쌓인 지층의 산물. 내 자아가 내 존재가 얼마나 사소한가. 나의 취향이라는 것도.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


  • 연극과 뮤지컬, 그 둘을 관통하는 세계관

    사실 그 동안은 뮤지컬 작업만 했고, 연극이 처음 아닌가?
    뮤지컬도 갑자기 해보라 그래서 하게 된 건데 뭘(웃음) "뮤지컬 좀 써봐!" "뮤지컬이 뭐에요?" "본대로 쓰면 된다." "본 적 없는데요?" "그럼 봐" 그래서 남미정 선배님 손잡고 보러 다녔다. <김종욱 찾기>, <실연남녀>, <동키쇼> <싱글즈> 등등. 그렇게 네다섯 편 보고 무턱대고 쓰기 시작한 거다. 미쳤지.(웃음) <챗 온 러브>, <산채로 말린>, <샘>, <미스 쥴리> 등을 썼다.
    (<샘>은 2012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창작뮤지컬상을 받았다.)

    조광화 선생님하고 했던 창의인재 동반사업은 어땠나?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았다! 내가 그런 콤플렉스가 있었다. 연극판을 모른다는. 연극영화과도 아니고 연극을 꿈꾼 것도 아니고 그저 연극하는 사람들하고 살았던 사람인데. 어렸을 때 극단 언니들 손잡고 극장 앞에 서있었던 이방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 정도로 이 세계에 들어와도 되나. 정말 내 생각을 말해도 되나 하는. 조광화 선생님이라는 멘토를 만나서 너무 좋았고 내 또래의 창작자들을 만나서 너무 좋았다. 아, 지금 동시대 창작자들이 이런 걸 꿈꾸는구나! 사람들이 나보고 이상한 작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상한 애들이 얼마든지 많구나!(웃음)

    좋은 동료도 많이 만났나.
    아주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 김지현 작곡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걸 시작하면서 가장 절실한 목표가 한국 작곡가를 찾는 거였다. 아는 작곡가가 외국밖에 없으니까 곡을 잘 만드는 걸 떠나서 정서가 안 맞는 거다. 한국 정서에 맞는 작곡가를 찾고 싶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누가 말하더라. 자기는 영국에서 공부했고, 사람들이 자기 음악에 대해 어렵다고 한다고. 그때 생각했다. '저 사람 빼고 다 되라! 제발 쉬운 음악을 만나게 해주세요!' 근데 그 사람이 돼버렸다.(웃음)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우리의 시선을 버리지 않으면서 장르의 다양함을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난거지. 김지현이라는 작곡가를.

    연극과 뮤지컬을 떠나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본인의 세계관이 있는지?
    나는 깨달았다! 내가 하는 모든 작품은 러브스토리다!(웃음) 난 로맨틱코미디를 사랑하는 작가다. 본능적으로 심각한 것, 엄숙주의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다. 서로 말이 통하려 하고, 하지만 그 말이 자꾸 미끄러지고, 하지만 계속 소통하려 하는 것. 이게 내 작품의 모든 것이다.

    처음부터 연극하고 싶은건 아니었다는데?
    한마디로 말해줄까? 연극은 내 인생의 트라우마였다.(웃음)
    고등학생 때는 검사가, 대학생 때는 다큐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신문기자로 바뀌고, 밥벌이 하려고 에어컨 해외 영업부에서 일하고, 그러나 넋이 나갈 것 같아서 인도에 요가하러 가고, 그러다 너무 더워서 다시 한국에 오고(웃음) 그때까지 내가 특별한 존재인지 알았는데 다녀와 보니 별게 아니었다. 나는 뭐야. 대체 나는 뭐지. 이러면서 우물쭈물 살고 있는데 "놀거면 와서 통역해!" 그렇게 통역 하다가 연극을 한 거지. 그때 깨달았다. 내 모든 인생은 연극을 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구나.(웃음)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연극을 안 하기 위한 몸부림 이었던 거다. 난 하고 싶은 게 없었던 거다. 하기 싫은 단 한 가지가 있었을 뿐이지. 연극(웃음)

    그렇게도 연극이 싫었나?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웠던 거다. 경외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었다. 아기 코끼리 발을 족쇄로 묶어놓고 키우면, 나중에 족쇄를 풀만큼 커져도 절대로 족쇄를 못 푼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연극들. 그것도 <산씻김>, <오구>, <시민K>처럼 강렬한 연극들.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장면은 다 기억난다. 그래서 나에게 연극은 섬광 같은 것이다. 배미향 언니(언니는 내가 아는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가 미친 듯이 뱅글뱅글 도는 모습, 어느 남자배우가 상체를 까고 이유 없이 울부짖고, 어느 여자배우가 이유 없이 소리 지르면서 울고, 저 배우의 땀이 내 피부에 스칠 때 물리적 감촉, 무대에서 미소 짓던 그 언니의 입모양. 난 그게 다 기억난다. 그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들이 나한테는 매혹인 동시에 족쇄로 다가왔던 거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연극으로 돌아왔다. 그 섬광 같은 매혹의 순간들 때문에.


  • 아버지와 스승과 선배와 동료

    이채경

    아버지와 이채경의 작품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웃음) 아버지랑 작품 가지고도 많이 싸운다. 이건 좀 그렇고 저것도 좀 그렇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너는 네 길이 있으니까"라는 식으로 놔둔다. 나는 한때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도 안 받을 거라고 생각 했었다. 근데 어떻게 영향을 안 받았겠나. 저 멀리서 대본 한 편 읽은 사람도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승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아버지란 존재는 언제나 스승이 될 수 있으면서 없는 사이 아닌가.

    이채경이 생각하는 스승은?
    독일 철학자 레비나스가 그러더라. 스승은 하나의 텍스트로 존재하는 사람. 그래서 제자들이 그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 하는데 다가갈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서 또 다른 스승이 되게 만들어주는 사람. 완전 와 닿았다. 나에게는 수많은 스승이 있구나. 그 대단한 연희단 선배들인 이윤주, 김소희, 김미숙, 조인곤, 이승헌, 남미정, 정동숙, 배미향이 내 스승인 거고 그분들의 스승이 아버지인 거고. 그렇다면 아버지도 내 스승인 거지.

    스승이 참 많구나
    몰랐나. 연희단은 다신교를 믿는다.(웃음)

    이채경이 영향 받은 사상과 예술의 스승들은?
    랭보, 뒤렌마트, 브레히트, 그리고 경제학.

    경제학?
    내가 존경하던 선배가 있었다.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시인을 꿈꿔서 경제학 책 옆에 시집을 놓고 함께 읽었다. 누가 봐도 시인이 될 것 같았는데,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증권맨이 되었다. 그러면서 얼굴도 점점 증권맨처럼 변해가고 넉살도 좋아지고… 저 사람은 가정을 위해 저렇게 세상에 부딪히면서, 때로는 넉살로 조소하면서 살아가는구나. 누가 봐도 시인인 사람이 저렇게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살아내는구나. 그들에 대한 죄책감이 항상 든다. 누가 봐도 작가이지만 작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 작가라는 말을 떠올리면 그 선배가 떠오른다. 그래서 나도 연극을 버텨내는 거지.

  • 연극은 집이다. 가시방석 집

    앞으로 할 작업들을 소개해 달라.
    4월 4일부터 27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 공연을 한다. 공연이 끝나면 조광화 선생님 멘토를 받아 개발했던 뮤지컬 <소행성 B-612> 대본 완성을 해야 한다. 여름에는 밀양 축제 준비에 들어가고 하반기에 뮤지컬 <챗 온 러브> 서울 공연을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본인에게 연극은 무엇인가
    나한테는 당연히 연극이 집이다. 연극에서 살았으니까. 그러나 가시방석 집이다.
    어느 날 어느 선배님한테 얘기했다. 난 빛나고 싶지 않다고. 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살고 싶다고. 선배님이 얘기하더라.
  • "채경아, 네가 뭐가 되든지
    여기가 너의 집이기 때문에
    네가 가장 마지막까지 있는 사람일 거다.
    그렇다면
    내가 호호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딜 가겠니.
    널 찾아오겠지.
    그때
    네가 극장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준다면
    나는 너를 찾아와서
    매표를 하면서 극장에 머물며
    여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니.
    네가 그렇게,
    우리가 올 수 있도록
    극장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니."

    나한테는 연극이 집인 거다.
  •  

  •  
  •  
  •  
  • 이채경


    [사진 : 임진원 limjinwon@gmail.com]
    [캐리커쳐 : 이동슈 glgrim@nate.com]



  • 이채경
  • 이채경 (작가/연출가)

    수상경력
    2012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창작뮤지컬상 <샘>

    주요작품
    <미스 쥴리>, <샘>, <산 채로 말린>, <챗 온 러브>,
    <울고 있는 저 여자>, <기적이 일어났다> 작.연출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맥베스>, <해오라기와 솔뫼>, <햄릿>
    번역.각색

태그 이채경, 산채로 말린, 샘, 소통

목록보기

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제41호   2014-04-03   덧글 8
댓글쓰기
덧글쓰기

조수지
뭔가 한 작가이자 연출가 분을 앞에서 투명하고 솔직하게, 깊은 이야기하는 지인처럼 공감하며 생각해보며, 아 이렇게 심오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엔 해나가는구나를 느끼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03댓글쓰기 댓글삭제

정석민
아!! 산채로 말린, 샘 에서 나왔던 노래들 너무 좋았었는데요ㅠㅜ. 저 같은 관객도 있다는 걸 알아 주세요~~ 두 작품 다 ost 구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물론 구하진 못했지만....

2014-04-04댓글쓰기 댓글삭제

오세혁
조수지님-고맙습니다. 연극데이트 코너 참 좋죠? ㅎㅎㅎ

2014-04-04댓글쓰기 댓글삭제

오세혁
졍석민님-아! 그러셨군요! 이렇게 아쉬울수가! 아아!

2014-04-04댓글쓰기 댓글삭제

임소은
전 아직도 한참 멀었군요...! 글로벌한 연극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ㅎㅎ 인터뷰 장소에 같이있는 것 같네요 ㅎㅎㅎㅎ

2014-04-09댓글쓰기 댓글삭제

오세혁
임소은-하하! 잘하고 계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고래 화이팅!

2014-04-09댓글쓰기 댓글삭제

박일섭
아... 이윤택 연출님의 딸이셨군요... 엄청나네요. 좋은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2014-04-11댓글쓰기 댓글삭제

오세혁
박일섭-^^

2014-04-11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