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top

연극인

검색하기

암전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
배우 김혜자

김지현_연극칼럼니스트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두 시간을 무대에서 홀로 분투하며 10살 꼬마 아이부터 70대 할머니까지 11개의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가 한국에 얼마나 될까?’ ‘모노드라마 주인공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고 나오면서 이 두 가지 질문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불 꺼진 무대 위에서도 오롯이 빛나던 그 배우와 꼭 연극데이트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만났다. 배우 김혜자. 따뜻한 봄날 같았던 그분과의 인터뷰, 그 현장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번 연극데이트는 최대한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 실어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지

    먼저 지금 공연 중인 작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작년부터 13개 도시를 투어하신 데 이어 지금 서울 공연이 한창인 작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말인데요, 어떻게 처음 접하셨나요?

    십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공연될 때 장미할머니 역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그때는 이 작품이 저를 확 끌어당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작년 8월인가 지금 연출하시는 분이 책을 보여주셨는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하면 말을 못 하겠어요. 다만, 저는 방송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뭐든 책 속에서 희망 같은 게 보이는 게 중요해요. 배우는, 연기자는, 정말 이것저것 다 해야 하지만, 저는 감당할 만한 걸 하거든요. 그래서 많이 안 하는데 작품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굉장히 따져요.

    김혜자

    이번에는 모노드라마로 한다기에 자세히 읽어 보니까 와 닿는 게 있었어요. 오스카라는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왜 하느님은 아픈 사람을 만드는 거야?” “왜 고통스러워야 해, 삶이?”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우리 다 그런 생각하잖아요. ‘왜 이렇게 인생이 불공평한가’, ‘왜 내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나’. 저는 아프리카에 가서 다섯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전쟁으로 죽는 것 보고 ‘하느님이 왜 아이들을 만들고 죽게 하는 걸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장미할머니가 오스카에게 이렇게 말하잖아요. “진짜 흥미로운 질문은 질문으로 남아있기 마련이야.” 신이 직접 답을 주시지는 않아요. 우리는 하느님을 다 이해할 순 없어요. 인명은 제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어떤 희망이 이 작품에 있었어요. 아이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질문을 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버겁겠지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습을 100일을 하고 열심히 하면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고 있어요.

    두 시간을 꼬박 홀로 무대에 계시잖아요? 암전 때마다 소품을 정비하시는 모습, 가만히 앉아서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했어요. 모노드라마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배우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했습니다.

    김혜자

    불이 꺼져도 걸음걸이 하나하나 연극 속에서 하려고 해요. 아이가 힘이 빠졌을 땐 힘없이 걷고, 신날 땐 신나게 걸어가고. 눈물 날 땐 눈물도 닦고 코도 풀고 살짝 물도 마셔요. 두 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힘이 달려도 거기서 견뎌야 해요. 저, 이 연극, 굉장히 열심히 해요. 자면서도 한 번씩 해봐요. 그래서 아주 작은 것까지 섬세하게 보시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나려고 해요. 그런데 어떤 날은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서 주무시는 분들이 있어요. 연출한테 “왜 잘까?” 그랬더니 너무 보고 싶어서 왔는데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서 그렇다고 생각하래요. 그러니 너무 가여운 거예요. 내가 재미없게 해서 자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연 중에 핸드폰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를 산만하게 하면서 시험에 들게 하는 거예요. 얼마만큼 정신력이 있나. 그래서 무슨 경우가 와도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집중해요. 최선을 다해서. 어찌됐든 혼자 하는 연극을 보러 온 분들이잖아요. 헛된 시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연극은 관객들한테도 그렇지만 내가 나한테 뭔가를 줘요. 연극을 하고 나면 힘을 얻는 것 같고, 힐링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하지만 그런 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나이 든 배우가 해야 할 일

    대학로 공연장에 가면 대학생이나 젊은 여성 관객이 많은데, 선생님 공연장에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층이 굉장히 다양해서 놀랐어요. 그분들 중 유독 중장년 관객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셨어요.

    나이 든 배우가 해야 할 일 같아요. 산만한 관객들 보면 젊고 글래머러스한 여배우가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 안 그러겠지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 연극은 그런 연극이 아니니까. 이 연극은 관객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연극을 보려면 관극 태도를 진지하게 가져줘야 할 수 있어요. 가끔 지방에 가면 훌륭한 관객들을 만나요. 그런 날이면 연극이 정말 잘 돼요. 제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거든요. 모노드라마는 10분의 1초도 다른 게 들어가면 집중을 잃어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무대예술은 관객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열흘에 한 번쯤 있을까 하고 대부분 열심히 봐주세요. 한 사람이라도 이 연극을 통해서 마음에 평화를 얻어 갔으면 좋겠어요.

    김혜자

    여기 오기 전에 인터넷 검색창에 선생님 성함을 넣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연관검색어로 뜬 단어들 중에 ‘봉사’가 있었어요. 이 작품을 열심히 하시는 것도 지금껏 해 오신 많은 봉사와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주 틀리지는 않아요. 봉사라는 말과는 좀 안 어울리지만, 사람들한테 뭔가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연설가가 아니잖아요. 토크쇼 하자고 하면 제일 싫어요. 말주변이 없어 무안해요. 저는 연기로밖에 보여줄 수가 없어요. 천성을 그렇게 타고 나서 연기로 뭔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걸 찾아요. 체력적으로는 물론 힘들었어요. 몇 개월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는 거, 나도 끝날 때마다 마음에 기쁨 같은 게 있다는 거,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건강도 굉장히 조심하며 하고 있어요. 제가 쓰러지면 연극 못 하잖아요.



    이건 직업이 아니라 내 삶이에요. 내 삶.

    KBS 1기 탤런트로 데뷔하셨는데, 연극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연극은 첫 아기 낳고 5년간 집중적으로 했어요. 둘째 때는 입덧 때문에 딸기만 먹으면서 했어요. 그러다 MBC가 개국하면서 다시 TV로 갔죠. 마흔 넘어서 또 연극을 하기 시작했고. 저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연극할 때는 다른 걸 안 해요.

    요즘 배우들은 방송을 하고 싶어 연극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던데, 선생님은 방송을 먼저 시작하셨네요.

    연극을 시작한다는 건 연기를 배우고 싶은 거예요. 이건 공부하는 거예요. 연극의 매력은 어제 몰랐던 걸 오늘 알아가는 거예요. 지난번에 연출이 “선생님 그거 너무 익숙해 보여요.” 그랬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익숙해지는 거, 선수같이 되는 거예요. 몸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연구를 안 하는 게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이에요. 이 연극을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익숙하게 보지 말아야 해요. 처음 느낌을 잊으면 안 돼요. 그러려면 매일 깨어 있어야 해요. 습관처럼 하면 그냥 선수가 되는 거예요. 보는 사람은 비슷비슷하겠지만 저는 너무 경계하면서 해요. 그래서 하루하루가 전쟁 같아요. 밥도 거의 못 먹어요. 죽 같은 거 조금 먹고 와서 공연 끝나면 집에 가서 먹어요. 연극할 때 배가 부르면 잘 못하거든요. 약간 구식이라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은 맛있는 거 많이 먹고도 연극 잘하는데.

    선생님께 이 질문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연극이란 무엇인가요?

    연극뿐 아니고 연기는요, 내 직업이 아니에요. 저는요, 외국 나갈 때 직업 쓰라고 하면 ‘연기자’, ‘배우’라고 쓰면서도 ‘이건 내 직업이 아닌데…’ 하고 생각해요. 이건 직업이 아니라 내 삶이에요. 내 삶.

    김혜자

    20여 년 전부터 가난한 나라를 다녔는데 그런 것과도 다 연관되어 있어요. 제가 인정받고 유명해져야 어디가 불쌍하다고 말할 때 관심을 받을 수 있잖아요. 보통 사람이 아프리카 아이들 불쌍하다고 하면 TV에서 방송도 안 할 거고, 신문에서 기사도 안 쓸 거예요.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 그런데 유명한 배우가 되니까 아프리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듣게 되잖아요. 아프리카 갈 때 방송국에서도 동행하고 신문사에서도 동행하고. 그래서 ‘아, 내가 이런 일을 하라고 유명하게 된 거구나’ 그런 착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2년 동안 아이들 만나러 못 갔어요. 이제 연극 끝나면 가야 돼요. 제 삶은 다 통해 있어요. 연기 따로 뭐 따로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작품을 굉장히 신중하게 고르는 거예요. 50년 가까이 연기했지만 숫자를 세어보면 얼마 안 될 거예요. 겹치기 출연도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건 못해요. 태생적으로.

    [사진 : 임진원 limjinwon@gmail.com]



  • 김혜자
  • 김혜자 (배우)

    주요작품
    연극 <셜리발렌타인>, <다우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만추>, <마요네즈>, <마더>
    드라마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태그 김혜자, 암전, 배우

목록보기

김지현

김지현 연극칼럼니스트
연극학을 전공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diario2046@naver.com
제44호   2014-05-22   덧글 6
댓글쓰기
덧글쓰기

승효재
글에서 김혜자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네요. 잘읽어습니다.글에서도 빛이나네요

2014-05-28댓글쓰기 댓글삭제

이유진
덕분에 김혜자선생님을 깊이 알게되었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볼 때 큰 도움이 될것같아요!!

2014-05-28댓글쓰기 댓글삭제


2014-05-31댓글쓰기 댓글삭제

김지현
승효재 님, 이유진 님,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인터뷰이 덕분에 제가 이렇게 칭찬을 받는군요. 다음 인터뷰도 기대해 주세요! :)

2014-06-05댓글쓰기 댓글삭제

모린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2014-06-06댓글쓰기 댓글삭제

김지현
모린 님, 감사합니다!

2014-06-16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