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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공간을 만들고 언어로 공간을 비우는
작가 김경주

김지현_연극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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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지도 않아?


    넘치는 말보다는 침묵이 주인공일 수 있다

    76스튜디오에서 한창 공연 중인 <블랙박스> 이야기부터 하자. 부제가 ‘추락을 겪어야 알 수 있는 진실’이다. 참 시기적절하다. 부제만 보면, 이 작품이 왜 7년이나 공연되지 못하다 이제야 빛을 보는지 알 것 같다.

    김경주

    블랙박스는 사고가 나야 열어볼 수 있는 장치 아닌가. 차량 블랙박스야 언제든 열어볼 수 있지만. 부제에 밝혔듯이 블랙박스란 사고를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진실이다. 그런데 블랙박스를 열어본다 한들 우리가 얼마나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항상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그곳에 어떤 사실이 존재했었는가보다 결국 그곳에 닿으려는 상상력에 주목해왔다. <블랙박스>는 기내라는 상황을 던져놓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보이지 않는 공간에 닿으려는 이야기다.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치유나 감정의 정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의 구석에서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역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게 의도였다.

    공연 전 희곡이 이북(e-book) 형태로 번역돼 몇 차례 외국에 소개되었고, 외국 대학에 세미나나 특강하러 갈 때 종종 소개했는데 꽤 흥미로워했다. 초고부터 한국적인, 토속적인 특징을 갖기보다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헤겔이 말한 세계시민으로서 누구나 한번 정도 고민해보는 불안에 주목해서 그런 느낌들을 추구해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외국 공연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 공연이 이뤄진 거다. 하지만 외국 공연 전에 모국어로 꼭 한번 무대에 오르는 걸 보고 싶었다.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 연극, 말 진짜 많다!’ 과장해서 말하면, 두 시간 동안 쏟아지는 수많은 말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뭘 말한다기보다 말하고 싶은 걸 일부러 숨기는 것 같았다. 말 속에 숨겨둔 진짜 말은 무엇이었나.

    <블랙박스>는 하나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설정이 주는 불안이 그것이다. 사람은 불안하면 말 뒤에 숨는다. 그런 인간 안에 있는 불안을 형상화하기 위해 여러 형식과 질감을 고민했다. 구조는 서사적이라기보다 알레고리적인 형식으로 접근했고, 문체도 리얼리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대사 역시 문어체와 구어체의 중간에 해당하는 화법을 사용했다. 관객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하거나 난해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인간은 왜 불안하며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고민이었고, 그 질문들이었다.
    작품 구상은 실제 내게 일어난 일을 모티브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다 난기류가 오고 있다는 기내 안내 방송을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100석 남짓한 소형 비행기 안에 외국인 한 명과 단 둘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둘 다 자연스럽게 신발부터 신고 있더라. 비행기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신발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희화화였다. 그것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다룬 게 <블랙박스>다. 부조리는 인간의 비극성을 희극성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에서 발생하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말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는 질문이 담긴 연극 형식이다. 거기서 무수한 말은 무의미해지고, 넘치는 말보다는 침묵이 주인공일 수 있다. 그런 점에 주목해주면 좋겠다.

    미련한 관객은, 그 많은 말을 굳이 이해하려 했다.

    이 작품에선 말의 무의미함을 말하기 위해 말이 필요한 것이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관객이 말에 집중하게 하려고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나는 꾸준히 시극운동을 해왔다. 거의 멸종하다시피 한 시극을 시와 연극을 하는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꾸준히 쌓아온 작업 중 하나가 이번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시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것, 침묵, 행간, 여백, 사이 등을 극성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번 역시 침묵의 질을 표현하고 싶었다. 불안 속에서 언뜻언뜻 만나는 침묵을 주목하면 오히려 말 뒤로 감추어진 불안이나 불안해지면 말 속에 숨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본을 고칠 때마다 관객과 만나고 싶었다

    시극운동이라는 게 무엇인가? 왜 하게 되었나?


    김경주

    부조리극이나 음악극 같은 게 다 시극 안에 있는 작업이다. 시적인 언어나 질감들을 제일 잘 다룰 수 있는 작업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2008년에는 희곡부활운동으로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라는 공동 창작집을 냈다. 읽는 희곡, 문학성 있는 희곡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작가와 장편을 하나씩 쓴 건데, 네 작품 모두 초연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블랙박스>가 운 좋게도 먼저 공연된 거다. 극단 에스와 76이 흔쾌히 함께해줘서 가능했다.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신나라 작곡가가 음악감독을 맡아주셨고,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에서 함께 작업했던 이창직 배우가 출연해주셨다. 좋은 사람들과 뜻이 맞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고맙다. 어느 분야나 거론되는 말이지만, ‘다양성’이 부족한 연극판에 이런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대본 분량이 상당할 것 같다. 완성까지 얼마나 걸렸나?

    A4용지로 약 120장이다. 일반 대본의 4~5배다. 7년간 수정하고 퇴고했다. 그런데 또 수정할 것 같다. 책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수정한다. 내가 <블랙박스>만 꺼내 보면 주위에서 불안해한다. (웃음) 나도 왜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을까 싶은데, 불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라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7년 만에 이 작품을 올리게 됐다는 데 굉장히 감격스럽다. 결국은 소통하고 싶다는 거 아니겠나. 대본을 고칠 때마다 관객과 만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지난한 기다림이 있었다.
    <블랙박스>는 여러 가지 대조를 이루며 극성이 드러나는데, 일단 언어와 침묵의 싸움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비극성을 희극으로 표현하는 부조리적 속성으로 이 작품을 대하면 어렵지 않다. 물론 이 이야기 안에도 분명 사건이 있는데, 퍼즐처럼 조각을 맞춰가야 하며 상징과 무언극적인 장치들이 알레고리적인 질감을 툭 툭 던지기 때문에 농담처럼 공연을 세 번 이상 안 보면 사건을 모를 거라고 말하곤 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수배자들이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밀항을 거래하고 비행기를 탔는데 갑자기 ‘그분’이 계획에 없던 거래를 시작해지고 이들은 불안해진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간 1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비행기가 엔진을 다 꺼놓고 활공 상태로 날며 지속되는 이야기다.

    ‘기내극’이라는 양식은 어떻게 고안했나?

    기내는 허공이지 않나. 땅이 아닌 곳에서 인간의 일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극적 공간으로서 매력이 있었다. <블랙박스>를 포함해 두세 편 기내극 시리즈가 있다. 비행기 안,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극을 더 선보일 예정이다. 기내극에선 의미보다는 상태를 따라와야 한다. 구름 위라는 상태는 내게 여러 가지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과 분투해야 한다

    요즘 매일 극장에 나오는 것 같은데, 작가 말고 관객으로서 이 공연을 어떻게 보고 있나?

    연출하신 유영봉 형님이 무대미술가 출신이고, 소극장 안으로 텍스트를 가져온 게 처음이다. 일단 공간의 구조나 색감적인 면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동안 드라마투르크 작업을 꽤 많이 했는데.

    김경주

    그렇다. 서울시극단이나 국립현대무용단 등 여러 곳에 작업을 관여하는 편인데, 가능한 내 작품에는 드라마투르크로 참여하지 않는다. 직접 연출하지 않는 이상 내 작품이 무대에 올라갈 땐 욕심을 비우는 편이다. 물론 리딩 작업이나 주제를 논하는 시기에는 미학적인 부분에 대해 공유한다.

    유영봉 연출은 어떻게 만났나?

    200년대 중반에 알과핵소극장에서 페스티벌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연출, 주연, 작가, 배우까지 맡아 이틀 정도 작은 모노드라마를 공연했었다. 그때 유영봉 형님이 페스티벌 무대미술을 맡으셔서 처음 만났고, 그 뒤로 서로의 작업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노드라마, 궁금하다!

    알과핵소극장에 뮤지컬 <헤드윅>이 올라가고 있던 때 같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만 2주를 빌려서 <114를 누르며>라는 공연을 했다. 114에 정말 장난전화를 거는 연극이었다. 114 직원은 전화를 건 사람이 끊기 전에는 못 끊게 되어 있다. 그 다음엔 일반 사람들한테 장난 전화 걸면서 도시에서 외롭게 시를 쓰는 자아를 알리는 작업이었다. 당시에 나는 1인 시위를 비롯해서 게릴라 공연을 많이 하곤 했다. 좀 뻔뻔하게 살고 싶은 시기이기도 했고.

    그럼 <114를 누르며>가 데뷔작인가?

    그건 아니다. 그리고 대학로에서 처음 연극한 것을 데뷔라 생각하진 않는다. 연극이나 공연 작업은 대학 때도 했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대안 공간이니 다른 공간 등에서 꾸준히 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데뷔도 마찬가지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데뷔했지만, 꼭 그렇게 데뷔해야만 시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굳이 대학로 공연을 기준으로 연극계 데뷔를 따지면 2008년이다. 혜화동일번지 4기 동인들과 함께한 작품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라고 있었다. 2046년 핵전쟁 이후 늑대인간을 다룬 작품이다. 박정석 연출가가 워크숍 형태로 올렸는데, 혜화동일번지 공연 후 앵콜 공연도 했고, 나중에 밀양연극제까지 갔다. 정말 사랑하는 작품인데 재공연 기회가 없었다. 희곡집이 6월 중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출간될 예정이다. 야생과 야성성이 강한 작품이다.

    시인으로 워낙 유명하니까 연극 작업이 덜 알려진 것 같다.

    따져 보면 연극 작업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일 년에 대여섯 번씩 했으니까. 작년만 해도 서울시극단 <나비잠>도 있었고, 국립현대무용단 <11분>도 있었고, 실험극까지 다 따지면 7~8개 된다. 홍대 근처 상수동에 방직공장을 하나 인수하고 개조한 다음 츄리닝바람이라는 복합문화 창작집단을 만들어서 몇 년간 공연을 업으로 하다시피 한 적도 있다. 나한테 연극은 순정 같은 거다. 처음에 연극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노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도 그랬다. 데뷔하고 6년 가까이 야설작가, 대필작가, 유령작가로 살았다. 야설작가로 꽤 유명했다. 팬레터도 엄청받았고. (웃음) 늘 예술하는 사람들은 구조보다는 자신의 상상력과 분투해야 한다. 연극 작업이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된 건 대학로 사람들과의 스킨십이 부족한 것 때문이 아니냐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뜻이 맞고 소중한 사람들을 조금씩 만나왔고 나는 꾸준히 시와 극으로 시극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시 쓰기나 희곡 쓰기 외에 번역도 하고 있고, 매월 인터넷서점 웹진에 공연예술인을 소개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최근 일간지에 축구에 대한 칼럼도 썼던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모두 몇 가지인가?

    김경주

    인터넷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나?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업무 내용이 인터넷에 노출된다면 비슷할 거다. 나한테 중요한 건 시인이자 극작가라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는 것이고, 그걸 공간으로 확장하기 위해 극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 노출되는 건 생계형 글쓰기다. 전업 작가다 보니 직업군으로 따지면 하는 일이 많을 수 있는데 예전에 비하면 줄었다.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대상에 집중하고 있을 땐 다른 일을 못한다. 현재는 <블랙박스>에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김경주에게 연극이란 무엇인가?

    언어로 공간을 만들고 언어로 공간을 비우는 일?
    새로운 공화국이 생기는 곳?


    [사진 : 임진원 limjinwon@gmail.com]

  • 김경주
  • 김경주(작가)

    한국 시극연구소 ‘팔할(PAL HAL)'을 운영하며 다양한 시극운동을 하고 있다. 또한 국립현대무용단,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등에서 작가 겸 드라마투르크로 활동 중이다.

    주요작품
    연극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나비잠>, <에코>

태그 언어로 공간을 만들고 언어로 공간을 비우는, 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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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김지현 연극칼럼니스트
연극학을 전공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diario2046@naver.com
제46호   2014-06-19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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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호기심도 상상도 욕심도 많으신 순정파!

2014-06-19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