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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배우 이항나

김지현_연극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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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툭툭하자, 항나야.”

    21일 <래빗홀>과 일정이 겹쳐서 영화 작업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출연을 결심하게 했나?

    이 작품을 정말 좋아했다. 미묘한 감정들이 모던하게 묘사된 작품이라 대중적으로 관객을 끌어당길 요소가 많지 않아서인지 연극계에서 여러 제작자가 관심을 가졌지만 오랫동안 공연되지 못했다. 내가 대본을 읽은 것도 꽤 됐다. 꼭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던 차에 김제훈 연출한테 읽어보라고 권하게 됐다.

    이항나


    배우로서, 연출가로서, 그리고 극단 대표로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각각 다를 것 같다.

    연기자로서는 30대 때까지 주인공 위주의 작품을 많이 했다. 그런데 40대가 되면서 연기의 폭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에 조연도 하고 그동안 해오지 않았던 캐릭터에 도전하게 됐다. <가을 반딧불이>도 그렇게 택한 작품이었다. 연출가로서는 뮤지컬을 많이 했는데, 라이선스 뮤지컬을 하면 한계가 많다. 그래서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는 작품은 직접 쓰기도 한다. 살면서 관객들과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는다.

    연극이란 게 이제는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헐거워졌다. 국제 연극제를 보면 이게 연극인가 무용인가 싶은 작품이 많지 않나. 그런 데 관심을 가져서 2005년부터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시도를 해왔다. 관객들이 기존의 연극과는 다르게 퍼포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형식을 고민한다. 그래서 영상이라든가 무용, 음악 등 다양한 소통 방법을 찾았다. 내용적으로는 서울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택하게 된다.

    <변호인> 때문에 영화 팬들이 많아졌을 것 같다. 어떻게 참여하게 된 작품이었나?

    우연한 기회에 <변호인> 제작자를 만나게 됐다. 오랫동안 연극을 보신 연극 팬이고 내 팬이었는데, 영화를 준비하면서 내가 갑자기 생각났다고 하셨다. 송강호 선배님, 오달수 선생님, 김영애 선생님 등 존경할 만한 연기자들, 좋은 작업자들을 만난다는 게 설레고 좋았다. 오랜만에 하는 영화 출연이라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송강호 선배님은 참 좋은 배우다. “툭툭하자, 항나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런 긴장을 한번에 날려주신다. 툭툭. (웃음) 그분께 배운 점이 참 많다. 나도 후배들에게 그래야 할 텐데.

    그동안 만난 좋은 선생님들도 많을 것 같다.

    그렇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자꾸 없어지고 내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학교 다닐 때는 연기자로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연출로 졸업했다. 그런데 러시아에 가서 나도 연기자가 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됐다. 여든 살이 넘는 백발의 고수들 네다섯 분이 한 학생을 전담하시는데, 그분들이 내게 꼭 연기자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러시아 유학은 어떤 계기로 가게 되었나?

    동국대와 쉐프킨연극대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졸업동기였던 김태훈, 전훈, 박신양, 김유석 등과 잘 맞았고 꿈도 같았다. 극단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럼 다 같이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 연극계의 중흥을 이끌어보자는 거창을 꿈을 갖고 떼거지로 몰려간 거다. 어릴 때니까. (웃음) 다녀와서 서로 길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만나면 참 반가운 사람들이다.

    이항나

    떼아뜨르 노리가 그들과 시작한 극단인가?

    맞다. 93년 러시아 교민을 상대로 첫 공연을 했고, 95년에 러시아 젊은 배우들과 <고도를 기다리며>로 거창국제연극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97년 귀국하면서 극단이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 거다. 그때 공연한 작품이 <유리가면>, <결혼전야> 등인데, 당시 제법 화제가 됐다. 그런데 사실 맨땅에 헤딩하듯 한 공연이었다. 제작비 200만 원으로 만든 무료 공연이었다. 공연 기간에도 보통 월요일에는 쉬지 않나. 그래서 오태석 선생님, 정대진 선생님 등을 찾아가서 쉬는 날 극장 좀 쓰게 해달라고 부탁해 극장을 마련했다. 생면부지 후배들의 부탁이었는데도 극장을 내주셨다. 원래 있던 세트를 검은 천으로 가리고, 분장실은 쓸 수 없으니 카페에서 분장을 하면서 공연을 했는데 대박이 났다. 화제가 돼서 6개월 정도 공연을 하다 보니 임영웅 선생님, 송승환 대표님, 유인촌 선생님 등등 많은 분이 보러 오셨다.

    그렇게 떼아뜨르 노리가 데뷔를 하게 됐다. 이후에 전열을 가다듬으며 단원들이 각자 활동을 하기 시작하고 <바람의 키스>라든가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굵직한 작품을 올리게 됐다. 사무실도 공짜로 얻게 되고. 그러다 생각들이 달라져 헤어지는 순간이 왔는데, 난 계속하겠다고 남은 거다. 그런데 배우를 겸하는 사람이 대표를 하다 보니 극단 시스템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어디 가서 출연을 하면 극단은 놀게 되지 않나. 그래서 프로젝트 극단으로 전환한 건데, 극단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재작년에 슬럼프 겪을 때 써놓은 작품이 있다. 드라마전시 시즌 4로 작은 실험을 해보고 싶다.

    나는 내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슬럼프를 겪었다니….

    <아시안 스위트> 끝났을 때쯤이었다. 몸도 아팠고, 연기자로서나 연출가로서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생각에 조금 지친 시기였다. 주인공만 주로 하다가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배우로서 전환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일 년 정도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작품도 쓰게 되었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 시기를 잘 극복하니까 좀 편안해졌고 더 당당해졌다. 나는 내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누가 무엇을 알아주고 내가 무엇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동료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니 얼마나 행복하랴 생각하게 됐다. 누구나 꼭 연극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런 시기를 겪지 않나. 지금은 작업을 하고 일을 하면서 매일 행복하면 좋은 작업이 될 수도 없다. 항상 고민하고 어렵고 생각하던 시간들이 당연히 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아 그래? 또 나한테 이런 시기가 왔네? 하고 생각한다. 내공이 생긴 건가? (웃음) 어릴 때보다 그런 거에 덜 불안해한다.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많아졌을 것 같다.

    “빨리 성공하면 뭐해. 그러면 재미없어. 성공이 뭔데? 니네가 대학로나 어디서 일약 스타가 된다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지? 그렇지 않아. 내가 해 봐서 알아. 길게 나 자신에 대한 투자와 성찰, 수행의 시간을 많이 겪은 후 얻은 무언가가 진짜 행복하고 오래 가는 거야. 어차피 배우란 평생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평생 좋은 역할만 얻을 순 없어. 스타가 되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술가가 되겠다고 생각하면 멀리 볼 수 있지 않니? 빨리 되면 안 좋아. 그 뒤가 없거든.” 이렇게 말한다. 애들이 끄덕끄덕은 하는데…. (웃음)

    진심으로 빨리 무언가를 이루는 게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학 다녀오자마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그런 시기가 좋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얻지 못한 것도 있다. 좀 천천히 했으면 다양한 역할도 해보고 여기저기서 다양한 사람도 많나봤을 텐데, 너무 주인공만 하다 보니 좋은 동료를 만나는 데도 한계가 있고 일정한 배역들만 맡아왔다. 물론 좋은 배역들이었지만, 돌아보면 그때 좀 천천히 해서 편안한 시간들 더 가졌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항나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에서도 많이 찾았을 것 같다.

    그런 시기가 있었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했다. 연극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그쪽에 맞춰지지 않았다.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창작자로서 살 수 있는 기회, 거창하게 말하면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얻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그 선택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제자나 후배들에게 많이 한다. 뭘 선택할지는 모르지만 당장 빛나는 뭔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불행하고 좌절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상한 얘길 하고 있네. (웃음)

    동국대 여성 연출 1호

    연극영화과에는 왜 가게 되었나?

    외할아버지가 신춘문예로 데뷔하신 시인이셨는데, 나중에 희곡도 쓰고 악극단을 크게 경영하셨다. 당시 유명한 제작자 겸 연출자이셨다. 외할머니는 이북에서 오셔서 음악대학을 다니다 할아버지한테 캐스팅되어 연구단원이 되고 프리마돈나를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분장실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외가에 오화섭 선생님을 비롯해 연극계 분들이 더 계신다.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희곡이 많았고 할머니가 공연 분장하신 사진이 즐비했다.

    그런데 내가 연극은 할 줄은 몰랐다. 내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연극영화과를 가라고 하셨다. 재능이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연극학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연극학을 하려고 입학했는데 연극이 너무 재밌어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연기는 너무 못해서 연출을 한 거다. 연출이 멋있어 보였다. (웃음) 내가 동국대 여자 연출 1호다. (웃음) 80년대만 해도 보수적이니까.

    엄마의 권유가 없었더라도 연극을 했을 것 같다. 운명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외할머니가 2년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학교 다닐 땐 연기를 못해서 주인공을 많이 했다. '엄마' 같은 역할은 연기를 잘해야 할 수 있지 않나. 할머니가 의상도 사다주시고 학생 공연을 3~4번씩 보러 오셨다. 엄마도 기쁘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더 스타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그러지 못했다.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TV에도 많이 나왔으면 할머니가 더 기뻐하셨을 텐데. 할머니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가셨다. “연극을 끝까지 해야 한다. 무대를 포기하면 안 돼.”

    여성 연출 1호로서 공연한 작품은 무엇이었나?

    원래 3학년이 돼야 연출을 할 수 있었고, 복학생 남자 선배들만 할 수 있었다. 왜 그래야 하나 싶어서 2학년 때 최진석, 남성진, 노진원 등 친한 남자 동기들, 후배들을 설득해서 방과 후에 연습을 했다. 엄청 싸우면서도 재밌었다. 사진 하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포스터 만들고 온 학교에 붙이면서 난리를 쳤다. 또, 세트를 못 만드니까 어떻게 할까 하다가 소극장 벽을 빨주노초파남보로 칠해서 다음날 학교가 발칵 뒤집혔는데 일단 공연은 하게 해주셨다. 그렇게 사고를 치면서 입봉을 했다. (웃음) 그 다음부터는 연출하는 게 조금 편해져서 3~4학년 다 연출을 하고 유학을 가게 됐다. 장 주네의 <엄중한 감시>라는 부조리극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걸 한 거다. (웃음)

    이항나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어떤 건가?

    살아가면서 많이 바뀐다. 2005년에 <그녀의 방>을 했을 때는, '소외'라든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우울증 같은 것이었다. 요즘 세상에 호환마마는 없지 않나. 굶어 죽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인 빈곤이 더 문제 아닌가. 내 마음 속에 있는 지옥,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 그런 데서 오는 박탈감이나 소외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젊은이들 너무 힘들지 않나. 나는 바보처럼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거침없는 선택들을 해왔는데, 지금은 그런 젊은이들이 없는 것 같다. 사회 구조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네가 나인지 내가 나인지 모르지 않나. 같은 계층 안에 섞여서 그냥 먹고 사는 88만원 세대를 바라보면서 그런 게 안타까웠다. 다이어트 약을 과도하게 사다가 빚에 시달리는 여자, 취업이 안 되고 공황장애를 겪는 여자, 대학원 진학을 못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 사회부적응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여자 등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했다.

    지금 관심 가는 건, 인생을 사니까 나도 조금씩 달라진다. 예전에는 미혼에 아이도 없었으니까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서 하다가 이제는 우리 사회 젊은이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사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다 보니 가자지구 공습이나 세월호 사고가 남 일 같지 않다. 그런 이야기 쪽으로 마음이 가고 있다.

    연극 말고도 삶이 많지만

    이항나에게 연극이란 무엇인가?

    모르겠다. 글쎄….

    후배들한테 이런 이야기 많이 한다. “연극 말고도 삶이 많아.” (웃음) 옛날엔 연습실에 지각하면 안 되고, 부모님 돌아가셔도 공연하러 와야 하고, 링거를 꽂아도 무대는 올라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연극 말고도 인생이 많은데. 연극보다 더 중요한 일도 많다.

    이항나

    그렇지만, 그렇게 연극 외에도 내 삶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내 인생에 내 삶은 그냥 연극인 것 같다. 그렇게 벗어나고자 하고,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음에도 한 번도 다른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영화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탤런트가 부러운 적도 없었다. 누가 좋은 공연 하면 그게 너무 부럽고 배가 아프다.

    그러니까 여전히 그게 삶인 것 같다. 어느 날 부부싸움 중에 남편이 "무대에서 내려오란 말이야, 무대에서 내려와!" 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남편이 보기엔 내가 연극하는 것 같은가보다. (웃음) 그리고 한번은 아기 물건을 바꾸러 갔다가 안 바꿔줘서 너무 화가 났는데, 사장을 설득해야 하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한 대로 연기를 했다. 그랬더니 사과를 하며 물건을 바꿔줬다. 직업병이다. 내가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생각했다. (웃음) 그 에피소드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 너무 깊숙이 몸을 담갔고, 연극이 나인지 내가 연극인지, 내 삶이 연극인지 연극이 삶인지 도대체 알 수 없구나 싶었다. 남편도 무대에서 내려오라 그러니 직업병이 점점 깊어진 것 같다. (웃음)


    [사진 : 임진원 limjinwon@gmail.com]

  • 이항나
  • 이항나 (배우, 연출가)

    수상경력
    2000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1 한국연극협회 연기상

    주요작품
    연극 <가을 반딧불이>, <아시안 스위트>, <이웃집 발명가>, <휘가로의 결혼>, <클로져>, <낮잠>, <갈매기> 외 다수
    영화 <변호인>, <송어>, <첫사랑> 외 다수

태그 연극데이트, 이항나,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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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김지현 연극칼럼니스트
연극학을 전공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diario2046@naver.com
제50호   2014-08-2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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