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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배우의 문제적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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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백석광

나는 백석광입니다.
나는 지금 배우입니다.
‘지금’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내가 또 다시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등이 굽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등을 펴기 위해
집 앞의 무용학원에 보냈습니다.

저는
등이 펴지는 것을 넘어서
눈이 떠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무용에 빠져들었습니다.
무용이 너무 좋아서
한예종 무용원에 진학했습니다.

제 전공은
한국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발레나 현대무용이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발레와 현대무용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콩쿠르에 나갔는데
덜컥 입상을 하고 말았습니다.
군대를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한테 몇 년의 시간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요.
다른 무용수들은 주로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는데
저는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새로운 장르’로
유학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배우 백석광

6년간 함께 작업했던
정영두 안무가가 있었는데
원래 베이스가 연극이었습니다.
그 분을 따라서
저도 연극에 참여하다가
연극에 빠져들었습니다.
배우도 하고
연출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극을 하다가
이십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문득
연극을 열심히 할 거면
영화도 열심히 해보고 싶었습니다.
곧바로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를 찍었습니다.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솔로 36분>이라는 작품으로
감독상을 받고
대종상 단편 영화제에서
<방관자>라는 작품으로
시나리오 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화에 빠져들었고
동료와 함께
시나리오 팀을 만들었습니다.
안현수 선수의 이야기로
영화를 찍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스케이트 이야기를 쓰려면
스케이트를 타봐야겠다는 생각에
태릉선수촌에 가서
쇼트트랙을 배웠습니다.
우습게도 저는
스케이트에 빠져들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하루 종일 스케이트만 탔습니다.
영화는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게 나구나.
난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대로 이렇게 빠져버리면서 사는 게
나한테는 가장 행복하구나.

‘미카엘 하네케’라는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 분은 연극을 오래 하시다가
나이 들어서 영화를 하시는데
자신의 예술적 사고들이 훼손되지 않고
좋은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사고와 내 생각을 훼손시켜가면서
다급하게 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계속
빠져드는 것에 빠져들면서
행복하게 작업을 해왔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배우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 백석광

저는
극단 ‘아,어’의 단원입니다.
전진모, 윤성호, 이강욱, 박용우, 정새별, 문현정
등이 있습니다.

연출 전진모 형이 졸업작품으로
<바냐 삼촌>을 각색한
<외로운 사람, 슬픈 사람, 힘든 사람>을 공연하는데
저한테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30대 배우가 필요한데
30대 배우가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우스운 이유로 출연을 했지만
저는 그 작업이 참 행복했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작업에 참여했던 멤버들 위주로
극단 ‘아,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윤성호 연출의 <외계인들>에 출연하기도 하고
전진모 연출의 신작에서 객석진행 일을 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극단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립극단 시즌 단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연산 역을 맡았습니다.
이윤택 선생님과의 인연이 컸습니다.

밀양연극제에서
김광림 작, 최준호 연출의
<너도 고백해봐>에 출연했는데
선생님이 공연을 보시고는
<혜경궁 홍씨>의 사도세자 역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세자와 이별할 무렵
이번에는
연산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왜 같이 하자고 하셨을까.
저는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아직 깨끗해서 더 채울 수 있다’고
‘당대성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제가 아직 그 뜻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작업을 할 뿐입니다.

선생님은 참 멋진 분입니다.

식사를 하시다가도
화장실에 계시다가도
갑자기 달려오셔서
디렉션을 하십니다.

한 시간 수다를 푸시면
한 시간 동안 연극 얘기만
세 시간 수다를 푸시면
세 시간 동안 연극 얘기만 하십니다.

밥보다 화장실보다
그 무엇보다
연극이
일순위인 분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좋은 연극 만들기’라는
아주 간단하고 확고한 욕구로
세상을 질러가시는 분입니다.

‘디씨인사이드’에
“연출님! 팬이에요!” 라는 글이
아직도 종종 올라오는 분입니다.
그 젊은 세대와
그 거장이
아직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울 뿐입니다.

배우 백석광

선생님 말씀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은.
햄릿이 누구냐.
없다.
햄릿을 연기한 배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 연산은 누구냐.
없다.
그 누구도 연산을 알지 못한다.
그럼 연산은 너다.

결국
백석광의 의식이
연산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백석광 이라는 인간과
연산이라는 인물이
만났다 떨어졌다 만났다 떨어졌다 하면서
계속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아직
만났을 때보다는
떨어졌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제가 더 깊은 배우가 되면
만났을 때가
더 많아지는 날이 오겠지요.

연산의 마지막 장면은
제가 옷을 뺏깁니다.

“구장복을 벗으시오
당신은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야 하오“

구장복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막상 사라지려고 하니까
부아가 치밀어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몸부림 쳐봤자
공허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왜 이렇게 와 닿을까요.

연산이 사랑했던
기생 녹수 역은
제가 사랑하는 예술가
이자람 씨가 맡았습니다.
저와 이자람 씨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삶에서도 무대에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자람 씨는
스물여섯 살 때 처음 만났습니다.
어떤 작품에
둘이 무용수로 출연을 했었는데
조금씩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삶이 힘들 때라서
자신도 없고 그럴 때였는데
어느 날 밤에
쓰레기 잔뜩 있는 홍대 거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때는 많이 표현을 못 했는데
정말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행복할 때였습니다.

이자람 씨는
일상과 예술이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멋지고 건강하고 지혜롭고
자잘한 일들도 잘 해결하고
작품도 그렇게 잘 풀어나가고.
성실하고 좋은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아주 아름다운 예술가입니다.

배우 백석광

저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내 인생에
행복한 무언가가 또 찾아온다면
전 또다시 그것을 할 테지만
지금은 연극이 가장 행복합니다.
내 인생이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지금 이 순간
연극을 할 겁니다.

연극은 빈칸이니까
사람도 담을 수 있고
문화도 담을 수 있고
정신도 담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극에는
가장 강력한 것이 있습니다.
독백.
그 긴 말.
일상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그 긴 말.

엄청 드라마틱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그 긴 말.

작가가 하나의 생각에 천착해서
깊게 퍼울리는
그 긴 말.
독백이 존재하는 한
연극은 계속 될 것이고
저도 연극을
계속 사랑할 겁니다.

저한테 연극은
담금질입니다.
담금질을 하기 전에는
형태나 색깔들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담금질을 하고 난 뒤에야
그 빛깔과 형태가 보이고
아주 아름답기도
아주 날카롭기도
아주 부드럽기도 합니다.
담금질을 한 뒤에야
그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담금질 된 연기, 연출, 희곡,
그 본연의 것을 봐야
배우들도
관객들도
비로소 연극을 알게 될 겁니다.

배우 백석광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배우 백석광

백석광(배우)
주요작품
<문제적 인간, 연산> <혜경궁 홍씨> <외계인들> 외

태그 배우 백석광,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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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제73호   2015-08-06   덧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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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글을 쓴 오세혁님도 배우 백석광님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글을 읽으며 도전이 됩니다.

2015-08-06댓글쓰기 댓글삭제

Jackie
인간 백석광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이였습니다.
초심을 잃지 마시고 계속해서 다양한 모습 보여주십시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2015-08-07댓글쓰기 댓글삭제

으아
혜경궁 홍씨보고 눈여겨 보게되고, 연산 보고 팬이 되었습니다!
응원해요!!!

2015-08-10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