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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고 두근거리고 계속 두근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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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안재영입니다.
저는 연극배우
그리고
뮤지컬배우입니다.

남들보다 끼가 많거나 남들 앞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어요.
딱 한 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교과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이었어요.
특히 교과서에 있는 소설이요.

수업시간마다 선생님이 ‘여기 읽어볼 사람?’ 하고 물으면
늘 제가 손을 들었죠.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소설을 읽고 있는 제가 왜 그렇게 좋았었는지.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도덕선생님께서 1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하셨어요.
계속 생각을 해봤어요.
난 10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문득
배우가 되어 있을 것 같더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연예인이 아니라 배우였어요.
물론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뭐랄까, 배우는
연예인을 넘어서는 더 숭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등학생이 되어서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물론 망설여지는 건 있었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끼가 많지도 않은데
내가 가도 되는 걸까.
몇 번이고 거듭 생각을 했는데
가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가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 나름의 최종점검을 했어요.
다니던 교회에서 성극을 올리기로 했는데 배우로 지원했어요.
교회 애들한테 성극은 인기가 없었고
다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려고 했는데
저만 거의 유일하게 성극을 하겠다고 했어요.

대본도 제가 선택했어요.
따뜻한 가족 이야기였어요.
성극이라고 하면 꼭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동방박사가 나오고 부활절 소동 나오고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에게 뭔가 강요하는 느낌이 싫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걸 하고 싶어서
가족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찾아냈어요.

저는 아빠 역할이었죠.
너무 재밌고 즐겁고 전혀 떨리지도 않고.
오히려 무대에 끝까지 남아있고 싶고
그래. 난 배우가 돼야겠다.
고3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웠어요.
좋은 선생님을 만났죠.
원래 제가 뭘 좀 많이 배웠어요.
기타도 치고 마술도 하고
그러다 쉽게 질리고
6개월을 넘긴 적이 없었죠.
그런데 연기는 하면 할수록 너무 재밌는 거예요.
1년 넘게 뭘 해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아, 이 길이 맞나보다.
나는 배우가 되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연기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너는 분명 배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연기에는 악이 없다.
넌 인생을 착하게 살았다.
배우가 되고 싶으면 너무 착하게 살지 마라.

조금 충격이었어요.
아 내가 착하게 살았구나.
그럼 조금 독해져야겠다.
독하게 살 거야, 진짜 독하게 살 거야.
근데 잘 안 되더라구요. 하하하.

대학을 졸업하고 무대감독 일을 먼저 시작했어요.
지방공연을 다니면서
무대 설치하고 조명 셋업하고 오퍼하고 포스터 붙이고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 작품에서 배우를 했던 형이
어느 뮤지컬의 조연출을 맡으면서
저를 배우로 추천했어요.
저의 첫 데뷔였죠.
경험이 많으신 선배님들이 많아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 많이 혼나기도 했죠.

학교에서 맨날
체홉, 아서밀러, 셰익스피어만 접하다가
갑자기 창작뮤지컬을 접하니까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없이 눈만 높았던 거죠.
그 작품을 계속 연습하면서
아, 이런게 창작이구나.
아, 이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아, 이건 이런 재미가 있구나.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어요.
그 날 이후로 창작극에 대한 매력에 푹 빠져버렸죠.

그 날 이후로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어요.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과장을 섞어서
백번을 보면 한두 번 붙을까 말까 했어요.
하하하.

그러다 처음으로 붙은 작품이 뮤지컬 <스페셜 레터>였어요.
첫 상견례 시간을 잊지 못해요.
돌아가면서 소개를 하는데
저는 무슨 역할의 누구입니다.
저는 무슨 역할의 누구입니다.
그 소개가 너무 행복했어요.
이제는 나도 역할로 소개를 할 수 있구나.
역할로.

그 다음 붙은 작품은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였어요.
그 당시는 오디션에 워낙 많이 떨어져 본 때라서
하나도 긴장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솔직하게, 정말 솔직하게 봤어요.
“전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어요”가 아니라
“전 이 정도 배우이고 이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엄청 작은 역할이긴 했어요.
2시간 30분짜리 극인데 등장하는 시간이 15분 정도였어요.
대사는 딱 두 줄이었죠.
하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작품이 너무 좋았거든요.
강필석과 전미도라는 두 배우가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사랑이 너무 좋아서
그 배우들의 연기를 너무 배우고 싶어서
하루도 빼지 않고 무대 바깥에 몰래 앉아서
넋이 나가도록 봤던 기억이 나요.

저의 첫 연극은 장 주네의 작품이었어요.
2010년에 장 주네 탄생 100주년 페스티벌을 했는데
극단 뮈토스에서 올린 <유형지>라는 작품에 출연했죠.
프랑스령에 있는 어떤 섬의 감옥 이야기였어요.
저는 로제라는 역할이었는데
감옥에서 가장 젊고 예쁜 죄수였어요.
연출님께서 무대에서 한 없이 예뻤으면 좋겠다, 하셔서
손으로 팔찌도 만들어서 하고 다니고
걸을 때도 예쁘장하게 걸으려고 노력하고.
하하하.

제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연극 작업이 있는데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작품이에요.

<번지점프를 하다>의 피디님이
저를 좋게 보셨는지 어느 날 물으시더라구요.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작품이 있는데
‘스크립스’라는 역할을 해보겠냐고.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당장 하겠다고 했죠.

피아노를 칠 줄 아냐고 물으셨어요.
하나도 못 친다고, 하지만 독하게 연습하겠다고 했어요.
공연이 다음년도 3월이었는데
전년도 10월부터 피아노 연습을 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들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가서 원장님한테 매달렸어요.
전 이런 작품을 하고 이런 곡을 쳐야 되는데 제발 좀 도와달라고.
그 곳에서 지옥훈련을 했죠.
번지와 히스토리의 음악감독이셨던
주소연 감독님이 레슨도 많이 해주셨구요.
그 시기에는 <히스토리 보이즈>만 준비하고 싶어서
모든 스케줄을 하나도 안 잡았어요.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히스토리 보이즈>를 위해 살았죠.
영국의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앨런 베넷이라는 70대의 위대한 작가가
모든 것을 뿜어낸 작품이어서
그 분에 대한 존중 때문에라도 모든 것을 쏟고 싶었어요.
그 작품에 나오는 모든 시와 인용구와 영화와 음악을
모조리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히스토리 보이즈>를 공부하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어요.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두근거리는 시간들이었어요.

<히스토리 보이즈>가 끝나고 일본 여행을 갔어요.
어느 신사에서 운세를 뽑았는데 대길이 나왔어요.
그리고 바로 국제전화를 받았는데
연극열전의 허지혜 대표님이었어요
<취미의 방> 이라는 일본 희곡을 공연할건데 출연할 생각 없냐고.
바로 승낙했죠.
대길을 뽑았으니까요.

<히스토리 보이즈>와는 정 반대의 장르였어요.
엄청나게 웃긴 코미디였죠.
김진수 김늘메 선배님들에게 코미디의 호흡을 익히는 시간도
참 행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어요.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라는 야구 뮤지컬이었어요.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처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았다는게 중요했어요.
너무 두근거렸어요.

지금까지는 다른 배우의 호흡을 맞춰주는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내 호흡 하나하나에 작품의 공기가 바뀌게 되었으니까요.
근데 문제는 야구 뮤지컬인데 제가 야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전직 선수출신 코치를 찾아가서 열심히 야구를 배웠어요.

잠깐 나와서 에너지를 다 쏟고 나가는 역할만 하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역할을 맡으니
에너지를 배분할 수 있게 되고
전체를 볼 수 있게 되고, 여유도 생기게 되고.
상대배우에 대한 고마움과 배려심도 생기게 되었죠.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다가
도움을 받으니까 너무 고맙더라구요.

한 번도 목이 쉰 적이 없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목이 쉬었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었는데
혼자 5분 넘게 노래를 불러야 되는 씬이 있는데
같이 출연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손을 잡고 기도를 해줬대요.
아마도 제 안에 배우를 평생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때 그 기도의 힘일 거예요.

배우로서의 꿈은 식상할 정도로 단순해요.
평생 배우를 하는 것.
평생 배우를 하면서 좋아하는 작품 하고
밥 굶지 않고 좋아하는 이들과 술 마실 수 있고
정말로 이렇게 평생 배우를 하고 싶어요.
나이를 먹을 때마다 생각과 경험이 점점 쌓여갈테니
저는 점점 더 쌓여진 배우가 될 수 있겠죠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두근거려요.

얼마 전에 친구랑 술 먹다가
내가 계속 배우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생각해봤어요.
아직 8년 밖에 안 해봤지만
그 8년 동안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더라구요.
울컥했어요.

아, 나는, 8년동안 배우라는 일을 정말로 사랑했구나.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수 있겠구나.
계속 두근 거리는 동안에는
계속 사랑할 수 있겠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지
작품이 들어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그 인물을 연구하고
그 인물처럼 생각하고 경험하고
그러다보면 제 얼굴이
왕이 되기도 하고
걸인이 되기도 하고
선인을 하다가도 악인을
이성을 사랑하다가도 동성을.

‘아! 오늘 공연은 정말 좋았어!’ 라고
만족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지만
어느 날은 정말로
그 말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어요.
그 날은 정말로 심장이 터질 것 같죠.
그 두근거림이 너무 행복해서
그 두근거림을 또 만나고 싶어서
저는 오늘도 무대에 서요.
두근거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대에 있을 거예요.

저에게
연극이란 뮤지컬이란
두근거림이에요.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안재영(배우)

주요작품
<취미의 방>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보도지침> <히스토리 보이즈> <라흐마니노프> 외

태그 배우 안재영,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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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제103호   2016-11-03   덧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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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베리
연기도 노래도 잘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에 임하는 마음가짐까지도 무척 훌륭한 배우라서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2016-11-04댓글쓰기 댓글삭제

jungsoo62
글 쓰신 분이 연출한 <보도지침>에서 안재영 배우님의 연기를 봤었습니다. 강직한 캐릭터의 배역을 맡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인상 깊은 연기였었습니다. 물론 그 작품의 배우 모두 훌륭했지요,,,이렇게 걸어온 길을 알게돼니 새롭네요, 건강하시고, 찰진 활동 기대합니다.^^

2016-11-04댓글쓰기 댓글삭제

chlo
와 진짜 임하는 태도가.. 대길을 뽑아서가 아니라 성실+독기 로 걸어오신 것 같은데요 ㅎㅎ 존경스럽습니다. 잘 몰랐던 배우분이신데 나중에 작품으로 만나뵈면 더욱 반가울 것 같아요~

2016-11-08댓글쓰기 댓글삭제

ㅇㅇ
항상 응원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더 뭉클하고 감사하네요. 앞으로도 더 좋은 활동 기대할게요!

2016-11-21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