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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지만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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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현미입니다.
나는 배우이고 작가이고 연출이고
그리고
극단 걸판의 대표입니다.

‘쥐불.’
고등학교 연극반에 무심코 들어갔어요.
동아리를 정하는 시간이었는데
연극반 선배들이 돌아다니면서
연극반은 그냥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3차 시험까지 봐야 들어올 수 있다
자신 있으면 모여라
그 말이 좋아서 시험을 봤는데
1차 2차 3차 모두 붙었어요.
하하하.

1차는 다 같이 모여서
내가 누구고 왜 연극을 하고 싶은지 발표를 했어요.
2차는 2학년 선배들이 1대1로 앉아서 대화를 했어요.
3차는 3학년 선배들이 심사를 보고
한 명씩 들어와서 미션을 수행했어요.
나한테는 이걸 물어봤어요,

“선배가 기합을 주면 어찌할 것인가”
“뒤에서 씹겠습니다.”

난리가 났어요.
1학년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쟤는 떨어뜨려야 된다.
그때 3학년 반장 언니가 말했어요.

“가장 솔직하네.”

그렇게 나는 ‘쥐불’이 되었어요.

연극반 활동이 즐거웠지만
평생 연극을 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대학도 마찬가지였어요.
친구가 광고를 전공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친구가 하고 싶다니까 좋은 일 같아서 나도 하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한양대 광고홍보학과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풍물패 한우리를 만났고
풍물패에서 계속 공연을 올리는데
연극반을 했다고 하니까 계속 역할을 맡겼고
그래서 놀랍게도 또 연극을 하게 되었어요.
하하하.

대학 3학년 때 취업을 앞두고
광고팀장을 맡아서
어느 회사의 광고제작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경쟁 PT에 참여했어요.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교수님들에게도 참여한 친구들에게도
가장 칭찬을 받았죠.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거 어쩌면 나한테는 재미없겠다.
그 와중에 한우리 출신들이 극단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거 어쩌면 나한테는 재미있겠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지겹도록 방황하고 방황하고 또 방황했거든요.
걸판을 처음 만들었을 때
회의시간만 되면 늘 수첩에 적었던 문구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어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일이 년 하다가 안 되면 접고
취직을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적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마음이 드니까
작은 일도 엄청 불합리하게 느껴지고
작은 갈등에도 크게 싸우고.
여차하면 떠나고 싶어졌어요.

불만이 생겨서
며칠 동안 출근 안 하고
방에만 있던 적도 있었고
술 먹다가 크게 싸워서 어디로 훌쩍 떠난 적도 있었고
유럽에 공연을 갔었는데
다들 처음 가는 유럽이라
공항출국부터 공연까지
너무너무 좌충우돌하니까
갑자기 너무 속상해져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선언을 하다시피 했었죠.
그런데 계속 얼마 못 가서 돌아왔어요.
하하하.

어느 날
정말로 떠날 마음을 먹고
직업학교에 가서 디자인을 배운 적이 있어요.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크게 교통사고가 났어요.
한 쪽 어깨는 쇄골 골절
한 쪽 어깨는 인대 파열
양쪽 어깨를 못 쓰게 되어버렸어요.
그 순간
아, 이걸 하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병원에서 많이 생각을 하고
퇴원하자마자 재활을 하면서 다시 걸판을 시작했어요.

다시 걸판에서 활동하면서
난 정말 연극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연극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연희단거리패 우리극연구소를 찾아갔어요.

정말로 한 달 내내
연극 연극 연극
연극만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너무 좋았어요.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라는 작품에 이승헌, 고윤희 선배와 출연했어요.
하녀 역할을 맡았는데
아아
내가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
내 안에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나도 어쩌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
배우가 되고 싶다
정말로 미치도록 배우가 되고 싶다.

그렇게 연희단거리패 활동을 하고
대전에 있는 마당극단 좋다에서도 활동을 하면서
내가 좀 더 떳떳해지면
다시 걸판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잘 안 떳떳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다시 돌아갔어요.
하하하.

그 이후로는
싸우는 것은 더 화끈하게
더 치열하게 싸웠지만
다시는 나가지 않았어요.
내 나이는 이제 서른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걸판과 나의 운명을
함께할 수 있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계속해서
걸판에서
싸우고 풀고
화내고 사과하고
울고 웃으면서
12년 동안 계속해서
연극을 하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대표를 맡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일이 많아지고
사람도 많아지고
고민도 많아지면서
다시 엄청나게
힘들어지고 있는 중이죠.
걸판 안에서 활동하지만
걸판 바깥에서도 활동하게 되고
배우만 하다가
작가와 연출도 하게 되고
기획도 하게 되고

이 모든 활동들이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내가 모르는 길로 낮선 길로 계속 가야
걸판도 계속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천천히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갈 뿐이에요.
그래도 아직은 계속 걸판 안에서의 삶이 더 익숙하고 좋고 행복해요.
결국에는 걸판 작업 위주로 내 삶을 보내게 될 거예요.
안산 주민으로서
안산에 있는 극단의 대표로서
안산문화재단의 상주극단으로서
그게 정말 중요해요.
배우 최현미입니다, 작가 최현미입니다, 연출가 최현미입니다
이런 소개보다는
걸판의 최현미입니다. 안산의 최현미입니다. 안산의 걸판 최현미입니다.
이런 소개가 나를 더 뿌듯하고 울컥하게 만들어요.

걸판의 12년을 돌이켜보면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지지만
떠나는 사람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걸판 식구라는 범주가 넓어지는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예전처럼 출퇴근을 하고 같이 밥을 해먹고
이런 일은 점점 줄어들지만
다양한 작품과 프로젝트 안에서
더 많은 배우 더 많은 스태프들과
더 좋은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있으니
어쩌면 진화이기도 하고

이제는 일 년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열 가지에 집중을 해야 하니까
제가 그릴 수 있는 더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어요
좋은 배우 좋은 작가 좋은 연출 좋은 스태프들과
더 자유롭게 만나고 헤어지는
커다란 원.

예전에는 현장에서 마당극을 했기 때문에
극장 바깥에서만 관객을 만났지만
이제는 극장에서도 관객을 만나고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소극장에서 공공극장에서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관객을 만나니까
그 다양한 판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어느 판에서건
걸판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는 중이죠.

광장에서 공연할 때는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천 명이었다면
극장에서 공연할 때는
이백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백 명인 느낌이에요.
그 모든 생각의 수를
우리는 아우를 수 있어야겠죠.

이십대 때 걸판을 시작했는데
이제 5년이 지나면 마흔이 돼요.
마흔이 될 때까지
정말로 걸판의 색깔이 촉촉하게 베어있는 작품을
5개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호흡이 긴 작품들.
3년 5년 10년을 갈 수 있는 작품들.
우리가 매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새로움에 다급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갈 수 있는 한 편 한 편

12년 동안의 걸판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해서 힘들었어요.
이제는 좋은 작품을 길게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도 길게 길게 보고 싶어요.

배우로서의 최현미는 답을 내리기 힘든 배우가 되고 싶어요.
뭔가 이상한데 뭔가 어울리는 배우
뭔가 어울리는데 뭔가 이상한 배우
작가와 연출로서의 최현미는
글쎄요.
극단에 필요한 일이니까 시작한 일이어서
아직은 작가 연출로서의 정체성은 잘 모르겠어요.
계속해서 극단에 필요한 작품을 하고 싶어요.
내가 쓴 작품과 내 연출작품이
극단에서 오래오래 쓰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참 행복할 거예요.

연극인으로서 나는
내 작업을 통해서 나를 알고 싶어요.
내가 출연하는 무대를 통해서
내가 쓰는 글을 통해서
내가 남들과 얼마나 같은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
내가 남들처럼 얼마나 평범한지 혹은 얼마나 독특한지

나한테 연극은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를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이에요.
계속 해야 하고
계속 하고 싶고
계속 할 거예요.

내가 계속 연극을 하면
나는 계속 연극을 닮아갈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젠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내가 사랑하는 연극을
점점 닮게 되겠죠.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최현미(배우·작가·연출가)
극단 걸판 대표

주요작품
출연 <그와 그녀의 옷장> <늙은 소년들의 왕국> <분노의 포도> <페스트> 외 다수
작 <어중씨 이야기> <나무 위의 고래> 외 다수
연출 <명랑음악극 ANNE> 외 다수

태그 최현미,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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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제105호   2016-12-01   덧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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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soo62
멋지심, 이렇게 얘기하면 남얘기하듯, 하네 하시겠죠? 그래도 대단하고 멋지게 생각드는 걸 어쩌죠? 인구에 회자된 좋은 작품 많이 만들고, 하시길 기원!!!

2016-12-01댓글쓰기 댓글삭제

구보씨
꽤 오래전이지만 '하녀'에서 뵈었을 때 기억이 아직 깊게 남았는데요. 이후로 무대에서 뵐 때 반가웠습니다. 표현한 적은 없지만 반가워하는 팬이 있음을 기억해주세요.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2016-12-02댓글쓰기 댓글삭제

namba01
멋집니다! 걸판 언제나 응원합니다! ㅎㅎ

2016-12-10댓글쓰기 댓글삭제

ㄹㄹ효
예쁘세요

2016-12-11댓글쓰기 댓글삭제

尹南洙
오랜만에 웹진 연극人에 들어왔더니 현미님 인터뷰가 떠억!여기서 만나니 새삼스럽게 더 반가워요.이제 5년이 지나면 마흔이 돼요.라고 하셨네요.난 10년 전에 마흔을 지나고 드디어 반백살이 되었어요.안산은 떠났지만 도처에서 걸판은 여전히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안심이 돼요.

2017-03-06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