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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리볼버>에서 발사된 총알은 어디로 날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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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오후 1시 50분. 빨간색 건물들이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국립극단 인조잔디마당에서는 <페미리볼버>(김슬기 작, 연출)가 게릴라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국립극단에 들어설 때 정문 한 가운데 서 있던 안내문이 역설적으로 이 공연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2009년 개관 이래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국립극단 마당은 공연 관람객을 위한 휴식 공간입니다. 저희 극단 측과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행사나 공연은 불가하오니 많은 양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협의되지 않은 공연

예고된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인조잔디마당에는 이 게릴라 공연을 보기 위해 50명 가량의 관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연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공연을 준비해야 할 공연팀은 국립극단 직원들과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2시가 넘어서자 김슬기 작가는 대화를 중단하고 관객과 약속한 시간이 이미 지났다며 공연을 시작했다.

<페미리볼버>는 두 남자 배우가 각각 여성과 남성 역으로 분해 진행된다. 망사스타킹, 하이힐, 어깨와 등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탑 그리고 하얀 면사포. 여성으로 분한 배우의 의상이다. 이에 비해 남성으로 분한 배우는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단순한 의상이다. 이러한 의상의 대비는 흥미로운데, 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한 반면 남성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또는 여성과 남성 각각의 차림새에 쏟아지는 ‘말’과 ‘시선’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공연은 상황이나 맥락이 제거된 여성에게 쏟아지는 폭력적인 말들로 전개된다. ‘말’들만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여성은 허리에 줄이 묶어 있고 남성은 그 줄을 잡고 있다. 이 말들은 줄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의 몸부림과 그 줄을 잡고 있는 남성의 거친 당김 속에서 전개된다. 벗어남과 당김이 격렬해지면서 남성의 허리 아래 매어 있던 빨간 고무장갑이 점점 부풀어 간다. 이러한 단순한 전개는 한편으로 폭력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 이 거친 말들이나 거친 퍼포먼스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러한 ‘막말’들을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자주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면 객석 앞에 앉아 마치 판소리의 고수처럼 공연 진행을 돕던 김슬기 작가가 관객들에게 케이크를 자르는 플라스틱 칼을 나눠주고 함께 줄을 끊자고 권유한다. 그런데 아뿔싸. 줄이 끊기기는커녕 플라스틱 칼의 날이 누워버린다. 어찌어찌 색종이 가위가 구해져서 어렵게 줄을 끊었다. (이건 의도된 연출일까. 우연일까. 그저 면실을 꼬아 만든 지름 1센티도 안 되는 줄을 끊어내기에 우리에게 쥐어진 도구는 너무나 허약한 것이었다.)

이제 공연의 마지막 장면. 줄에서 풀려난 여성은 권총을 든다. 장전된 총알은 무대 위의 남성을 향해, 그리고 객석 정면에 있는 국립극단과 문화관광체육부가 함께 쓰고 있는 사무동을 향해 발사된다. 한눈에 장난감 총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조악한 총이었지만,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화약이 터지는 소리는 사뭇 위력적이었다.

<페미리볼버> 게릴라 공연이 처음 발표된 것은 <젊은 극작가들의 창작환경과 공공극장의 역할 - 국립극단 ‘작가의 방’ 사태를 넘어>에서 였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토론자로 참여한 김슬기 작가는 “1. ‘작가의 방 낭독극장’의 최종 선정에서 ‘페미니즘’ 성향의 작품이 배제된 것에 대한 저항이자 2. ‘공연을 올려준다’는 식의, 국립극단이 예술가를 대하는 다분히 ‘갑질’적이고 시혜적인 태도에 대한 저항이자 3. 대학로에는 앞으로 페미니즘 이슈 등의 더 다양한 주제들이 주요하게 다뤄져야 하며, 그것엔 공공극장의 ‘문턱을 낮추는 서포트’가 필요하다는 제안으로써 준비하는 공연”(김슬기 작가 페이스북에서 인용)이라고 밝혔다.

이 공연이 준비되는 동안 국립극단 직원들은 국립극단 인조잔디마당에서의 공연이 허가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필자가 다시 국립극단 측에 확인한 바로는) 현재 국립극단이 사용하고 있는 부지와 건물 등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유로 국립극단은 위탁운영자라는 것, 운영원칙에는 국립극단 자체 기획 제작 공연만 이곳에서 공연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페미리볼버>와 같이 국립극단이 직접 기획 제작하지 않은 공연은 국립극단에서 공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국립극단 측은 김슬기 작가에게 국립극단 기획 공연으로 명동예술극장 앞 마당에서의 공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슬기 작가는 공연 취지와 맞지 않기에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김슬기 작가의 페이스북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김슬기 작가 페이스북 바로가기)

이번 공연은 결과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적중한 공연이었다. 극장 정문의 안내문은 이 공연의 맥락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국립극단이 단원제 폐지 이후 프로덕션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국립극단 자체 기획 공연 이외의 공연은 서계동 국립극단 담벼락으로 경계 지어진 시설 내에서 올릴 수 없다는 것이 운영규칙으로 명문화되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연극계에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세세한 운영규칙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예의 안내문은 이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운영규칙이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없이 문자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그러니까 국립극단의 시설물은 (지난 ‘토론회’의 내용을 볼 때, 문체부에 보고와 승인을 거친) 국립극단 자체 기획 제작에 의한 사용 이외에는 일체 불허라는 이야기이다. 이 규칙이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사용이 과연 공공극장으로서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립극단 시설물들이 사용된다면 비단 ‘젊은’ ‘여성’ ‘작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창작자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국립극단은 문턱 높은 위압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젠더 이슈. 사실 공연에서 제기하는 젠더 이슈란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젠더감수성은 차지하고 그 자체 언어폭력인 말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러한 말들은 우리 일상에서도 너무 익숙한 것이다. 여성주의적 시선을 정치하게 구축하기에 게릴라 공연은 적절한 형식이 아니었다. 또한 공연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작가의 방’에서 제기되었던 국공립기관 단체들의 고압적 행태가 교차되면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공연은 젠더 이슈 자체보다 이러한 현실을 살아내는 작가 자신의 분노가 더 다가왔다. 그것은 공연의 전개가 그렇고 게릴라 공연이라는 형식이 그렇다.

그런데 이 공연이 제기하고자 하는 젠더 이슈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사후적으로 드러난다. 필자는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본지에 ‘꽃점과 한줄평’을 게재했다. “분노를 장전하여 빵야 빵야~ (첨언. 국립극단 공연 금지 공지문은 장소특정 공연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훌륭한 세트.)” 채 수십 명의 관객이 전부였던 일회성 게릴라 공연이었지만 기록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페미리볼버>는 화학작용3이 열리고 있는 미아리예술극장 앞마당에서 6월 8일과 9일 이틀간 다시 공연된다고 한다.) 지금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이 등록된 후 ‘꽃점과 한줄평’으로는 이례적으로 수많은 관객 평점과 관객 평이 게시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총 38명의 관객들이 등록한 꽃점 평균은 꽃 한 개 반, 관객평은 27개가 게시되어 있다. 아마도 연극인 사이트가 운영된 후 최다 관객 평이 아닌가 싶다.

이 열광적인 반응(?)의 대부분은 공격적인 혹평이다. (참고로 필자는 꽃 3개 반을 등록했다. 공연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것이 일요일 낮 2시 급작스러운 공지로 이루어진 수십 명 남짓의 전부였던 관객들이 모두 꽃점을 남겼단 말인가. 게다가 그 시간 일부러 이 공연을 찾았던 관객이라면 공연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을 텐데 왜 관객평의 대부분은 혹평뿐인가.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달리 공연을 놓고 언급한 것은 극히 일부이며 페미니즘,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적 언사들이 계속되고 있는가. 물론 이 코너의 관객 평이 해당 공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전문가’라고 지칭되는 이들의 평에 대한 메타비평부터 연극계에 대한 불만들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유독 이 공연에 대해서는 여성주의를 다룬다는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 거의 대부분이다.

나는 도리어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여성주의를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물론 한국연극은 사회적으로 불거져 있는 여성주의에 대한 이슈를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작품 자체도 만들어지지 않을뿐더러, 오늘도 수 없이 막을 올리는 많은 공연들에서 젠더 감수성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가 곧바로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니고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보는 좀 더 다양한 시선들이 연극창작현장에서 제안되기를 바라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다루었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었나 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아주 게으른 것이었다.

<페미리볼버>에 계속 이어지는 익명의 관객 평은 익명성이 갖는 공격성을 감안하더라도, 그러나 이 사이트의 일반적인 경향과 비교할 때, 여성주의 그 자체에 대한 적의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이러한 적의를 보면서 여성주의적 시선이 왜 한국연극에서는 그렇게 부족한지에 대한 하나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작가에게는 편견을 뚫고 우리의 일상 너머를 드러내는 예리한 시선과 집요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대한 이러한 시선이 작가들을 얼마나 위축시킬 것인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희곡은 극작가가 책상에서 희곡을 탈고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 상연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때, 주변의 환경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페미리볼버>가 관통시킨 두 개의 과녁

한편 대부분의 혹평들은 (아마도 공연을 직접 보았다고 할 수 없는 평들에서도) ‘완성도’를 이야기한다. 이건 평론가, 예술감독 등등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그리고 관객도) 어떤 절대적 기준처럼 되뇌이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완성도’라는 것이 가능할까.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보여주었는가? 얼마나 현실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내고 있는가? 얼마나 세련된 미적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러한 척도들에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 기준이란 가능할까? 더구나 이러한 이십 여분 남짓의 게릴라 공연에서의 ‘완성도’란 무엇인가.

나는 작품에 대해 진지하고 날카로우며 현실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내길 요구하는 것처럼 작품을 읽어내는 데에서도 그러한 진지함과 예리함과 복합적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페미리볼버>는 비록 짧은 게릴라 공연이었지만 공연이 준비되는 과정부터 사후의 논란까지 우리 사회의 두 개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고 관통한다. 하나는 국립극단은 그저 문체부로부터 시설물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일 개 기관일 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적의. 이 두 개의 총알을 장전하고 발사시켰던 공연도 비록 단순할지언정 명료함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의상, 대본, 퍼포먼스 등등 공연의 모든 요소들은 이 공연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정당화를 위한 장식 없이 ‘젊은’ ‘여성’ ‘작가’로서 자신이 겪었던 현실을 게릴라 공연이라는 형식 속에 잘 정돈하고 있었다. <페미리볼버>는 예리하고 집요하면서도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드러내는 공연이었다.

분노를 장전하여 빵야 빵야~

태그 페미리볼버,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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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연극평론가.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제108호   2017-06-28   덧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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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33
네. 혹평을 달았다가 졸지에 '여성주의 적대자'가 된 사람입니다. 이 공연에 대한 혹평이 어째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으로 둔갑해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질에서 매우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말씀대로 이 공연은 국립극단에서 주관한 한 프로그램에서 김슬기 작가의 작품이 경쟁 탈락한 것이 그 시작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탈락한 것인가?"의 지점이죠.

2017-06-28댓글쓰기 댓글삭제

관객33
김슬기 작가가 호도하는 '경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술가의 실존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소수 권위자의 인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참으로 슬프고 우스운 일이지요. 그러나 현실-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네요-에서 경쟁없이 보장되는 기회가 어디있으며, 김슬기 작가는 그 동안 많은 혜택을 받아 온 일종의 메이저 작가인데, 왜 자신이 (경쟁에서 승리해) 누려온 것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가, 유독 자신이 (경쟁에서) 탈락한 레이스에서만 '여성'이란 논리를 들먹이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녀가 누려 온 그 수많은 제도들과 지원금들은 '경쟁'이 아닌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단 말인가요? 이번 그의 작품이 정말 '여성'이란 이유 하나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게 수긍이 갈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었나요?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냐를 감시해야지, 왜 '경쟁'을 하느냐고 따지는 게 정말 맞는 걸까요?

2017-06-28댓글쓰기 댓글삭제

관객33
게다가 평론가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완성도'란 대체 무엇인가요?
명료함이란 추상적인 언어 하나로 이 공연을 혹평한 사람들을 졸지에
반-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건 너무 저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결국 당신께서도 이 공연을 평가하는 건 '의도' 뿐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사회운동가의 퍼포먼스가 아닌, '연극'으로 불려야하는 이유는 대체 뭔가요?
공연이 공연으로써 평가 받지 않고 그 외의 요소들로 평가받으며,
'의도가 선하면 완성도가 부족해도 선한 공연이다'는 평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2017-06-28댓글쓰기 댓글삭제

구경꾼
여성이라는 말을 걸고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행태는 그만하셔야죠. 연극평론가가 과연 소수를 대변해왔는가? 라는 물음에 답할 만큼 잘해왔던가요? 성별이 아니라 인간을 보라는 말이 있죠. 평론가 님은 편견이 가득한 나와 다른 사람일까요? 신인 작가들이 사라질 때 어디서 뭘 했습니까! 이름있는 작가들 연출가들 극단들 말고 데뷔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신인들을 위해 작품 평론을 하신적이 있던가요? 공연에 오르지 못한 작을 진흙속에서 끌어 올린 적은 있나요? 반 페미니스트가 나쁜 것이 아닌 이유가 페미니스트가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해서 그렇습니다. 여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본인들보다 더 소외되고 도태된 신인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하세요. 내가 피해자야, 이게 아니라, 너는 내가 도와줄게, 이런 말을 하는 편이 낫겠지 싶습니다.

2017-06-28댓글쓰기 댓글삭제

관객33
구경꾼님께서 말씀 잘해주셨네요. LG 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유명 해외 연출가 공연에는 꼬박꼬박 잘도 가시는 평론가 및 PD 분들께서 왜 신인 작가, 신인 연출가들 공연장에는 코빼기도 안비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지면에는 '연극의 위기', '신인 예술가의 실종'을 어찌 그리도 잘쓰시는지요. 지원 제도는 네임벨류 순으로 나열해 뽑으면서, 신인 예술가들의 실수는 한치도 용납안하면서, 이슈가 되는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잘도 떠드는 연극계 양반들이 수많은 지원제도들의 기회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 에휴...

2017-06-28댓글쓰기 댓글삭제

꼬깔콘
익명이기에 그렇다는 생각이 참 우습다. 익명이나 다름없는 존재감이 그간 비판에서 비껴나게 해줬다는 건 왜 모를까? 연극인들이 영화인들 만큼이나 노출되면 당신들이 모른체 넘어가던 것도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해보나? 관객들도 댁들 공연보는데 질릴 만큼 질렸다. 불합리한 심사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라서 당했다는 논조가 말이냐? 방귀냐? 한심해서 정말

2017-07-07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