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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세계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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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탐험 신비의 세계”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목도리도마뱀이 “우-아-우아-우-아-”라는 노래가사에 맞춰 우아하게 달리는 오프닝으로 기억되는 이 프로그램은 야생동물들의 신기방기한 일상을 퀴즈로 맞추면 출연자들이 인형 하나씩 받는 형식이었는데, 요즘의 인기예능프로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른한 오후시간, 볼 게 없어 채널 돌리다 돌리다 멈춘 TV에선 으레 “동물의 왕국”이 나오고 있었는데, “하마가 하품을 합니다.”는 등 가만 듣고 있으면 웃음 터지는 성우의 나레이션이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른한 시간에 나른하게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빠져들곤 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어마어마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과 이것이 당시 BBC, NHK 등 외국의 유수 공영방송이 만든 엄청난 퀄리티의 다큐멘터리였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목도리도마뱀은 나야나.(출처: hiveminer.com)

지금은 풍비박산이 난 어느 공영방송이 되찾으려 애쓰고 있는 그 옛날 영화로운 시절에 제작한, 당시 국내 자연다큐멘터리의 한 획을 그은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당시의 보통 다큐멘터리 제작비의 몇 배를 퍼부어 1년 가까이 현지 촬영한 최초의 야생자연다큐였던만큼 기억나는 뒷얘기가 있다. 당시 제작진이 세렝게티 벌판에서 먹고 자며 몇 달 동안 야생 사자들을 쫓아다녔는데, 가뜩이나 야생동물인데다 사자라는 친구들이 눈치가 백단이라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해서 제작진의 애를 그렇게 먹였단다. 그렇게 다들 녹초가 되어 촬영을 포기할까 생각하던 어느 날, 사자 가족들이 조우하는 몹시 희귀한 순간이 왔다. 세계다큐역사상으로도 희귀한 인생컷임을 직감하고 카메라맨이 벅차는 마음으로 줌렌즈를 당기던 순간, 앵글 안으로 홀연히 어떤 오프로드 자동차가 잡히더란다. 깜짝 놀라 알아보니 그들은 BBC다큐제작진이었고, 사자를 쫓아 풍찬노숙하던 MBC제작진에게 황당하다는 듯 “에? 그 사자들한테 우리 위치추적기 달려있는데?” 하더란다. BBC다큐의 제작비가 MBC의 십 수 배인 것만이 아니라, 그런 지원으로 수십 년간 야생자연다큐를 만들어온 그 노하우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후로도 MBC는 꾸준히 자연다큐에 매달려 <아마존의 눈물> 등의 수작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었다. 풍비박산 나기 전까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종학살이 상호간에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90년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종군저널리스트들은 사라예보의 한 호텔을 거점삼아 모여 있었다고 한다. 아비규환인 내전현장에서 취재할 운송수단을 구하기 위해 이들은 여기서 모든 정보들을 동원해 동분서주했고, 그렇게 운송수단을 구한다 하더라도 현장에 나가면 이성을 잃은 군인들의 총탄세례에 벌집이 되기 일쑤였다. 그 때 이 호텔에 부동의 스타가 있었는데, 바로 뉴욕타임즈와 BBC 저널리스트들이었단다. 모두가 이 스타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이유인즉슨, 뉴욕타임즈와 BBC는 취재용 차량으로 방탄장갑차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취재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타 매체의 백배가 넘는 액수의 지원을 한 결과, 다른 저널리스트들의 모든 정보들이 뉴욕타임즈와 BBC 취재진에 흘러들어갔을 뿐 아니라 다른 매체가 접근할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가 독자의 시선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 2차이라크전에선 미군 병력이 종군저널리스트를 보호했는데, 취재의 방향과 결과물이 미군의 이익과 일치하는 매체에만 한해서였다. 결국 서방세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CNN에서 독점공급하는 화면으로만 2차걸프전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 화면은 알자지라TV에서 보여주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보여줬다.

CNN의 화면엔 절대 이라크시민들의 시신이 나오지 않았다.(출처:CNN.com)

프랑스 다큐멘터리 는 황제펭귄(Emperor Penguin)의 허들링(Huddling)을 나레이션 없이 비출 뿐이다. 우리가 서로에 의지하고 기댈 때 더 큰 고통과 고난을 막을 수 있다는 공감은 관객의 몫이다.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계기가 된다. 우리는 자연다큐를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깨닫는다. 인물다큐를 보면서 타인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고 내 감정의 보편성을 되돌아본다. 과학다큐를 보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되고, 시사다큐를 통해 나와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의 구조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되짚어보게 된다. 다큐멘터리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사유의 계기가 되기도,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창작의 레퍼런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계,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세계의 저편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우리가 외면했던 세계의 최전선에서 그 현상을 지독하게 응시하는 이들이 다큐멘터리 피디이다. 현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플롯이 진행되지도, 우리가 원하는 주제나 메세지를 쥐어주지도 않는다. 결론이나 결과물을 상정하지 않은 막연하고 지독한 과정의 순간들을 버텨내고 계속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엄밀한 과정을 거친 시선만이 우리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관은 다큐멘터리 피디들에 빚진 바 크다 할 수밖에 없다.

2017년 10월 방송예정이던 제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촬영 중 사고로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 피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즐겨보던 국내 다큐멘터리 상당수가 독립피디들의 고혈을 방송사가 착취하여 제작되었다는 현실은 이미 많이 알려지고 있다. 결론과 사유는 우리에게 넘기고 오로지 눈과 귀를 자청, 세계의 끝에 외롭게 서있던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뒤늦게 전할 뿐이다.

故 박환성, 故 김광일 피디.(출처: newstapa.org)

태그 박해성, 무대와 객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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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제122호   2017-08-1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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