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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하게 뻔뻔하게
막장드라마 제작기

고재열_시사IN 정치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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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전 드라마 연출을 하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소위 말하는 아침 막장드라마를 연출한 피디였다. 그리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직업인으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직분에 충실했다는 입장이었다. 그 친구와 막장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논의에 앞서, 일단 ‘막장드라마’라는 명칭 사용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누군가의 숭고한 일터인 ‘막장’이 함부로 활용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다만 이미 보편화 되어서 의미가 통용될 수 있기에 사용한다. 설마설마하는 구태의연함이 반복되어서 ‘설마드라마’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뻔한 방식으로 풀어서 ‘뻔데기드라마’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의미가 통하지 않을 테니 아직까지는 막장드라마라고 해두자.

    친구는 원래 실험적인 드라마를 만들던 피디였다. 그리고 그 넘치는 실험성이 업계와 마니아들에게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자신이 막장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지상파 방송사 공채 피디가 아닌 경우 막장드라마 연출은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 썩은 사과를 먹어 줘야 나중에 미니시리즈를 연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막장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마치고 온 친구는 말했다.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와 나쁜 드라마가 방송사 간부들이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와 나쁜 드라마와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방송사 간부들에게는 그저 시청률이 잘 나오는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였고 그동안 실험적인 드라마를 제작하며 민폐를 끼치다 처음으로 그들 기준에 맞는 드라마를 제작했더니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드라마가 끝나고는 배우와 제작진 전원을 해외여행까지 시켜줬다고 했다.

    친구는 시청률이 높아지니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했다. 막장드라마를 연출하며 실험적인 것을 시도해도 시청률만 높으면 만사 오케이였단다. 그렇게 열심히 설득하고 그렇게 열심히 촬영해서 방영해도 시청률이 낮을 때는 ‘타박의 이유’였던 것들이 시청률이 높으니 ‘칭찬의 근거’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 달콤한 칭찬에 취하면서 친구는 어느덧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쁜 방식인 줄은 알지만 막장드라마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뻔한 설정을 자신도 이용했다고 한다. 친구는 그것이 마치 맛집이라고 알려진 식당이 음식을 만들 때 화학조미료를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미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손님들이 화학조미료를 넣은 음식을 좋아하듯 이미 막장 설정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이 이런 설정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마치 마법의 묘약처럼 막장 기술을 쓸 때마다 시청률이 바로바로 올라갔다고 했다. 이런 식이었다. 아침드라마 시청 패턴을 보면 주로 주부들이 아침상을 차리면서 혹은 식사를 하면서 혹은 정리를 하면서 곁눈질로 본다. 정신없는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방법은 주역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라고 했다. 출연 배우의 목소리 데시벨이 높아질수록 시청률도 따라서 오른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가장 나쁜 방법일수록 가장 잘 통했다고 했다. 시청률이 흔들릴 때마다 막장 설정을 히든카드처럼 빼 쓰는데 약발이 아주 잘 통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스스로 ‘욕하면서 만드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요즘 아침드라마를 보면 점점 더 파렴치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점 하나만 찍고 나와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서 비웃음을 샀는데, 요즘은 드라마가 점하나만 찍고 나와서 다른 드라마라고 우기고 있다. 일종의 자기복제 드라마인 셈인데, 설정이나 구도 그리고 스토리까지 전작과 거의 비슷한 아침드라마가 많았다.

    아침드라마를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숨겨놓은 아이 만들기’가 사회적으로 큰 유행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마다 '숨은 아이 찾기' 놀이를 해도 될 만큼 많이도 꼭꼭 숨겨 놓는다. 드라마 홈페이지 주인공 관계도에 ‘알고 보니 부자 혹은 모자 관계’인 경우 점선으로라도 표시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아침드라마를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욕하면서도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침드라마에 등장하는 센 캐릭터들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와 시누이의 입장을 각각 대변한다. 그 캐릭터를 통해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면서 주부들은, 혹은 노인들은 스트레스를 푼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욕을 그들이 대신해줘서 일까? 막장사회는 막장드라마를 부른다.

     

태그 막장드라마, 아침드라마, 고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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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6호   2013-06-20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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