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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광주는 너무 큰 도시여서 도시가 아닌 도시였다. 전라도의 변방, 영광. 그 영광이 굴비의 주산지인지도 몰랐을 만큼 외진 깡촌에서 살았던 내게 광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도시였다. 그런데 그 광주는 또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도시였다. 내가 생각했던 광주와 내가 본 광주의 간극이 컸다.
광주를 보고 와서도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산수경시대회 출전을 위해 다녀와서도 그랬고 중학교 때 수학경시대회를 다녀와서도 그랬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내가 다녀온 곳이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다.
대학시절에는 친구들을 따라 광주의 대학가를 가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는 좀 다른 의미였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주역이고 ‘녹두대’니 ‘오월대’의 전설을 간직한 학생운동의 성지를 상상했던 나에게 서울의 대학생들과 하등 다를 것 없던 광주의 친구들은 조금 충격이었다.
그리고 기자가 되어 이런 저런 이유로 광주를 찾을 기회가 많았는데,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의문은 계속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의 무대였던 금남로와 충장로는 쇠락한 구도심이 되어 생기를 잃은 상태였고 상무지구라는 신생 유흥가가 등장해 광주답지 않은 웃음을 팔고 있었다. 여전히 광주는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