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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딛고 포기를 넘어
[고재열의 리플레이] 강정마을 십만대권 상륙작전 참전기

고재열_시사IN 정치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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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평화책마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다. “끝까지 가봐야 자기 한계를 알 수 있어”라는 대사다. 강정평화책마을 조성을 위해 10만 권의 책을 모아서 전달하는 ‘십만대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이 말을 절감했다. 어찌어찌 끝까지 가보기는 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내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10월18일 아침, 강정마을에 3만5천 권의 책이 전달되었다. 책을 보관할 컨테이너 도서관 4동도 함께 설치되었다. 그렇게 6개월의 대장정이 끝이 났지만 아쉬움이 컸다. ‘강정마을에 10만 권의 책을 모아서 보내자’며 처음에 결의한 언론인-문화예술인 ‘결사대’는 125명이 넘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은 25명 남짓이었다. 다수의 부담 없는 참여를 바탕으로 진행하려던 프로그램은 소수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10만 권의 책을 모으려던 계획도 3분의 1이 조금 넘는 3만5천 권에서 멈췄다. 책을 보관할 시설도, 책을 관리할 자원봉사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6월초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반환점을 돌 무렵부터 ‘소수의 희생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방전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지쳐서 몇몇이 짐을 도맡아 지고 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에게는 기부·봉사의 DNA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도 프로젝트는 어떻게든 굴러갔다. 복기하면 이렇다. 지난해 말 400여 명의 문인들이 '강정평화책마을' 프로젝트를 결의했다. 올 봄에 1호 평화책방을 열었다. 이를 돕기 위해 125여 명의 언론인·문화예술인들이 '선봉대'를 조직해 '십만대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0만 권의 책을 모아 강정마을에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15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책정거장에서 봉사했다. 수백 명의 기증자들이 책을 보내주었고 수십 명의 기부자들이 1억 원 상당의 현금·현물을 기부해 주었다. 그리고 지난 10월17일 저녁 450여 명의 기부자/자원봉사자/재능기부자들이 이 책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해 10월18일 아침에 강정마을로 책을 전달했다.

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종료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일주일 전에 점검해 보니 적자규모가 3천만 원에 달했다. 계약을 진행한 회계 책임자는 YTN 해직기자인 노종면 선배였다. 배가 출발하기 전에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해직기자가 빚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급히 적자 부분을 나눠서 떠맡아줄 ‘결사대’를 조직했다. 다른 기획진은 ‘바다택배’를 함께 할 참가자 모집에 여념이 없었다. 3천만 원을 주고 800석을 예약한 상황이라 최대한 참가자를 많이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강정의 벽은 강정이었다. 프로젝트가 삐걱거린 것은 강정이라는 벽 때문이었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슬픈 강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강정이라는 말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나 단체가 의외로 많았다. '책 모으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강정으로 얽히긴 싫어' '강정에 대한 것은 저희 단체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강정은 우리 사회의 '금기어'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의미가 있든 없든, 사람들에게 강정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었다. '강정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로 불참의 핑계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칼을 들었다. 해직기자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어서도 안 되었고, 이 프로젝트가 좌초하게 해서도 안 되었다. 주소록을 보고 ‘경제적 여유가 있을 것, 천성이 착할 것,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에게는 과감히 연락을 돌렸다. 정말 칼 안든 강도였다. ‘이건 그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야’라며 자기 최면을 걸면서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극복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었다.
강정평화책마을
지난 10월 18일 제주항에 도착한 '십만대권 프로젝트' 참가자들
[출처] 오마이뉴스 10월 19일자
강정평화책마을
강정평화책마을
www.gangjungpb.org
이제 나의 숙제는 끝났다. 내 깜냥을 넘어서는 숙제였다.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잘 하지는 못했지만 내 숙제는 끝을 냈다. 이제 강정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처음 십만대권 프로젝트를 제안할 때 염두한 것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체념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해군기지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사람들은 이제 강정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를 지겨워했다. '지겹지도 않냐, 이제 그만 떠들어라'라는 비난과 '억울한 줄은 알겠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체념 사이에서 강정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 강정의 기억을 되살린 것에 만족한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든 아니든 사람들은 거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 계속 이어져야 할 그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했다. 우리는 절대로 강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정마을을 세계 7대 해군기지가 아니라 세계 7대 책마을로 바꾸는 것은 해군기지를 극복하는 길이고, 해군기지 찬반을 놓고 갈라진 마을을 다시 봉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책 전달이 끝날 무렵 이에 대한 작은 답을 얻었다. 십만대권 프로젝트의 다큐를 찍었던 허철 감독은 84세인 강정마을 할아버지를 인터뷰했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인데 책마을 운동이 마을 주민들의 상처를 치유해서 주민들 간 소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자문단에 참여하겠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그 강정마을 십만대권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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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4호   2013-10-2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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