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top

연극인

검색하기

날씨만 읽을 것인가
[고재열의 리플레이] 요즘 기자의 자질

고재열_시사IN 정치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장면 하나, “박근혜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공식 환영식이 열린 5일(현지시간). 아침부터 비를 퍼붓던 런던의 하늘은 환영식이 시작될 즈음부터 개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후 12시10분 행사가 시작되자 잔뜩 찌푸린 하늘 뒤에 숨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을 태운 왕실마차가 버킹엄 궁에 들어설 때는 햇빛이 쨍쨍 비췄다.” 이데일리의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 기사의 일부다.

    #장면 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검찰총장까지 잘라 내는 '박근혜 씨'가 바로 독재자 아니냐 정권 비판한다고 야당에 대해 내란음모죄를 조작하고 정당해산까지 청구하면서 헌법을 파괴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박근혜 씨'가 바로 독재자 아니냐." 11월9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집회에서 ‘박근혜 씨’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자 언론은 이 대표를 맹비난하며 논란을 키웠다.

    #장면 셋,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반신반인으로 하늘이 내렸다란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오늘날 성공은 박 대통령에서 시작됐다.” 11월14일 남유진 경북 구미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96주년 탄신제’에서 한 말이다. 이 생가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34주기 추도식에서 새누리당 심학봉 의원이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고 발언하기도 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왕정시대에 살고 있다. 대통령의 동정에 대해 과잉보도는 이제 예의가 되었고, 대통령은 감히 ‘씨’라고 부를 수 없는 ‘절대존엄’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인간과 신의 중간에 있는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 우월적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된 그 분을 보면서 잃어버린 왕조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왕정시대라는 것은 여당 의원도 잘 알고 있다. 11월13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재오 의원은 “1년 동안 정치를 국정원과 검찰이 다해서 그렇다. 여당은 뒷바라지 하다가 볼 일 다봤다.”라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통치가 정치보다 우위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의 통치 행위를 여당의 정치는 설거지 하느라 바쁘다. 대통령은 국민과 야당 위에 군림한다.

    왕정복고를 부추기는 곳은 언론이다. 대통령을 찬양하는 '애국보도'는 해외순방 때 특히 심해진다. 대통령의 문화적 식견보다 한복 맵시를, 방문국에서 한 연설의 내용보다 현지어 발음을, 상대국과의 협상 내용보다 상대국으로부터 얼마나 극진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상대국으로부터 한국 이미지를 어떻게 바꿨느냐가 아니라 현장의 날씨를 어떻게 바꿨느냐를 위주로 보도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는 풍백 우사 운사를 대동했었나? 참고로 지난 7월1일의 파이낸셜뉴스의 기사다. “방중 첫날인 6월2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단독·확대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틀째인 28일에는 전날 국빈만찬에 이어 특별 오찬까지 하는 최고 예우를 받았다. 이날 저녁 베이징에는 드물게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낮에는 찜통더위와 높은 습도로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흐를 정도이고, 불쾌지수마저 꽤 높았던 데다 각종 매연과 안개가 뒤섞인 스모그로 목이 따가울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이날 비는 베이징 하늘에 켜켜이 쌓인 오염을 말끔히 씻어 내릴 만큼 시원함과 상쾌함을 선사했다. 연평균 강수량이 500㎜ 정도에 불과한 '마른하늘'의 베이징에서 모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반응이다.”

    베이징에서는 비가 내리게 하고 런던에서는 햇빛이 비추게 한 기상 조정 능력은 박근혜 대통령의 전유물은 아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만만치 않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기억하게 해주는 ‘땡전뉴스’ 시절 전설적인 앵커멘트다.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돌아오시는 오늘은 지루한 장마 끝에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역시 기상 조정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도 하고 미국기자협회 이사도 역임한 문명자 여사의 기록이다. “그(조선일보 기자)가 내미는 기사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혔다. ‘하늘도 박대통령을 알아보는지 박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 하자마자 소나기가 멈추고 햇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요. 요즘 하와이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 한 대요. 그 기자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하와이 일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엄혹한 유신시절에도 박정희를 ‘박정희 씨’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있다. 그 중 두 명이 대통령이 되었다. 바로 김대중과 김영삼이다. 그들은 유신독재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박정희 씨’라고 칭했다. ‘이정희 씨’가 대통령을 ‘박근혜 씨’라고 부르는 것이 싸가지 없는 일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정희의 싸가지’는 뉴스가 아니라 술안주다. 술자리에서나 할 험담이 버젓이 주요 신문과 주요 방송 뉴스에 나온다.

    이정희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박근혜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어느 집에 철거 용역 깡패가 들이쳤다. 그리고 진상을 떨었다. 그러자 그 집 큰딸이 나서서 ‘깡패 놈들 꺼져’라고 했다. 그러자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용역 깡패들의 행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주인집 딸 싸가지 없어’라고 기사를 쓰는 것이다. 지금 '통진당 해산'이 이슈인가? '이정희의 싸가지'가 이슈인가? 이정희가 싸가지가 있건 없건 그것이 민생과 무슨 상관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네이버 뉴스스탠드의 각 언론사 기사를 둘러보다 발견한 제목들이다. 대한민국 기자의 자질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유형별로 묶었다. 라인 감별형 - “‘유부녀 맞어?’ 톱 여모델, 골반 라인 ‘아찔’”, 속옷 착용 감별형 - “애비 클랜시,‘노팬티 노출 드레스 입고 헉!’”, 현기증·신경쇠약·호흡곤란 등 병약형 - “한채영 ‘짧아도 너무 짧아!’ 아찔 초미니”

    죽은 대통령에 대한 신앙심도 없고 현직 대통령의 신통력도 읽어내지 못하고 야당 정치인의 싸가지에도 문제의식이 없고 여성 연예인에 대한 변태적 시선도 없는 내가 계속 대한민국에서 기자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태그 기자, 자질, 날씨, 고재열

목록보기

웹진 36호   2013-11-21   덧글 1
댓글쓰기
덧글쓰기

시너지
연극in 메일을 받으면 항상 먼저 읽게 되는 고재열 기자님의 글^^ 나즈막한 위트가 느껴지는 글입니다~221.163.32.101

2013-11-22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