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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의 계절
[연출가 김석만의 시선]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김석만 _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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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사년 한해도 저물어간다. 연초에 품었던 희망을 돌아볼 때가 온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연극] 편집위원으로 일을 할 때, 12월 호에 송년특집으로 <연극인과 술>을 기획하고 취재한 적이 있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그러면서도 대학로에서 오래 영업을 하는 음식점, 주점 사장님 네 분을 초청해서 좌담회를 열었다. 대학로 터줏대감으로 불려도 좋은 사장님들에게 대학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까닭을 물었다. 내심 그 이유를 들으면서 연극인들의 술버릇에 대해서 듣고 싶어서였는데, 한 분이 아주 감동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제법 큰 술집을 운영하고 있던 그 사장님은 연극인들이 하도 외상술을 먹고 돈을 갚지 않아서 폐업을 하고 대학로를 떠나 다른 동네에서 개업을 하려고 생각하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가게를 정리하던 중 급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단골손님인 몇몇의 배우들이 공연이 없는 휴일에(당시는 월요일에 쉬는 관행이 자리 잡기 이전이다) 낚시를 가서 붕어를 잡아와 정성껏 달여서 병문안을 왔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정성에 감동한 그분은 대학로를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더욱더 연극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연극인들이 해마다 외상값을 갚지 않고 지내는 게 마음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갖고는 대학로에서 장사를 계속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차, 3차로 술에 취해서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에서도 술을 마시고 술값을 달아놓으라고 하고는 다시 나타나서는 외상값을 갚을 생각도 하지 않고, 또 그런 식으로 외상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대학로에서 장사를 하려면 그런 사실을 잊어먹어야 한다고 판단한 그 사장님은 연말이면 미련 없이 연극인 외상장부를 찢어 버렸다고 털어 놓았다. 아마 그 분만큼 망년忘年의 뜻을 실천하는 분이 있을까 싶었다.

    망년의 뜻은 원래, 망년지교忘年之交라는 표현처럼 마음이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이를 잊고 친구처럼 사귄다는 의미였다. 정약용이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만들 때도 그보다 위로 아래로 나이가 4년 차이가 나는 이들을 동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이덕무(1741~1793)가 9살이나 아래인 박제가(1750~1805)와 평생 우정을 나눈 경우와 같다.

    우리는 한 해를 보내며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한 벗들, 선배 후배들을 만나 망년회를 열어 술을 많이 마신다. 잊자고 마시는 술이 몸을 망亡하게 하는 수도 있고, 여기저기 겨를 없이 황망慌忙하게 보내다가 소중하게 한 해를 정리할 수 있는 연말의 시간을 허망虛妄하게 보내어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될 수도 있다.

    매서운 겨울 추위와 함께 찾아오는 게 흰 눈이며 거리 곳곳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고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거리엔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들릴 것이다. 아무리 추워도 매주 수요일 정오에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항의 시위가 계속될 것이고 지금도 천주교 사제들은 제주 강정마을에서, 밀양에서, 대한문 앞에서, 둥우리막대머리에서 약자의 편에 서서 촛불을 켜고 미사를 열고 있다. 원불교를 위시한 4대 종단에서는 올해 3월 26일에 탈핵, 탈원전 선언을 발표하고 국토종단기행을 하고 있다. 이를 모른 체하고서 한 해를 보낼 수 없다.

    괴로움을 잊자고 해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먹고 취하는 풍습이 일본에서 건너온 좋지 못한 작태라고 하여 요즘은 망년忘年이란 말 대신 송년送年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송년送年의 송은 소중한 불씨를 ‘웃으면서 떠나보낸다’의 뜻을 지닌다고 한다. 아무리 괴로운 한 해를 보냈다고 해도 아직도 고통이 지속되는 이 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바로 예술은 보다 나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希望을 노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태그 망년회,김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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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만

김석만 연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극단 연우무대에서 활동하였고<한씨연대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최선생>,<가극금강>을 연출하였다. 최근 전통공연예술의 현재화에 관심을 두고 <영원한 사랑 춘향이>,정가극
<이생규장전> 등을 연출하였다.『연기의 세계』,『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연출가처럼 생각하기』를 냈다. 페이스북facebook.com/proksm
22   2013-12-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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