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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가 위로하는 방식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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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지혜롭게 왕국을 잘 다스렸으나 이제는 늙고 지친 왕은, 왕국을 나누어주고 푹 쉬면서 자식새끼들 집이나 오가며 간지 나게 여생을 보내볼 요량으로 딸들을 불러 모은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상속세도 안내는 이 경영권 승계를 두고 과열경쟁 오바애교 선심공약 대잔치를 벌이고, 가진 건 진심이나 못가진 건 눈치였던 막내딸은 그런 언니들이 고까운 나머지 아빠한테 무뚝뚝하게 직언을 날렸다가, 쪽박도 못 건진 채 쫓겨난다.

    아는 분은 다 아는, 리어왕 얘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후 줄거리는 어찌될 지 뻔한 일. 뻔하게도 왕국을 물려받은 두 딸은 이내 돌변, 아빠를 짐짝 취급한다. 왕은 뒤늦게 막내딸의 진심을 깨닫지만, 이미 늦은 일. 이 폭망한 경영권 승계에 멘붕이 온 왕의 곁을 지키는 건 한명 뿐인데, 그게 왠지 간지충신캐릭 켄트백작일 것 같지만 그 양반은 애저녁에 막내딸하고 같이 쫓겨났고, 남은 건 바로 광대, 그 흔한 캐릭터 이름도 성도 없는 그냥 광대, 오로지 광대 한 명이다.

    두드려 맞고 쫓겨나면서도 첫째 딸에게도, 둘째 딸에게도 비아냥과 조롱을 멈추지 않는 이 광대가 그렇다고 차기 지도자를 잘못 뽑아 비탄에 빠진 리어왕에게만은 감성돋는소몰이창법 발라드를 부르며 위로하는가,

    전화기와 관련된 불쾌한 에피소드

    리어왕이라고 예외는 없다. 말로라도 듣기 좋은 말 한 마디 절대 없이, 시종일관 얄미울 정도로 옳은 말만 골라 남의 얘기하듯 익살부리며 리어왕 주위를 얼쩡댄다. 그런데 이상하다. 왕이 이 광대를 내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귀에 거슬리는 직언을 한다고 딸이며 충신이며 다 쫓아낼 때도, 광대는 예외였다. 광대가 첫째 딸에게 비아냥대다 두드려 맞을 때, 왕은 망설임 없이 광대를 데리고 딸네 집을 나선다. 가뜩이나 심난한 왕에게 조롱을 일삼는데도 왕은 그 익살에 웃기만 할 뿐이다.

    이상한 건 왕 뿐이 아니다. 광대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왕의 호응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광대 입장에선 별로 얻을 것도 없고, 왕과 함께하는 앞날엔 고생길이 훤한데도, 어디 다른 나라 극장이나 다른 직업으로 갈아타지도 않는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머리 풀고 홀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야에 선 리어왕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건, 그런 광대이다.

    전화기와 관련된 불쾌한 에피소드

    우리 모두의 가슴이 먹먹하고 고통스러운 이 시절, 어떤 광대들은 “이 판국에 음악축제냐”며 무대에서 내몰렸다. 어떤 광대들의 공연과 워크숍은 취소되었으며, 어떤 광대는 그 사고의 아픔이 연상될 수도 있는 연극을 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광대의 작업이 태평성대에나 어울리는 여흥으로만 비춰지는 데 대해, 광대들은 같은 아픔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이 아픔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과 서로를 반성하고 위로하듯, 광대에게는 광대의 반성과 위로 방식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리어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광대는 그 곁을 끝까지 지키며 끊임없이 왕에게 눈을 맞추며 말을 건다. 그것이 황야이건, 남쪽 어느 물살 센 바다이건. 그게 광대이다.

  • 무대와 객석사이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 - 1840) <해변의 수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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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제44호   2014-05-2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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