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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세계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_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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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전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이 인간의 기술과 상상을 넘어서는 재해와 그 피해의 규모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이 지면(화면)에 다시 옮길 생각은 없다. 그보다 1년 앞서 난 아이티 대지진의 피해규모와 희생자의 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비록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대부분의 세계시민에게는 TV모니터에 비춰진 -만져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과 희생을 접한 순간의 연민과 공포는, 운명에 맞서 싸우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무대 위 오이디푸스의 피투성이 눈을 보며 객석의 관객들이 느낄 숭고한 절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은 끝날 것이고, 우리는 어두운 극장에서 나올 것이다. 충격과 여운은 오래 남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내 일상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비극의 세계는 이토록 냉혹하다.

    물론 실제 -직접 만져지는-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다를 일이다. 비극의 무대 위 인물들에게 이 일들은 비극으로 완결되지 않는 끝없는 체험일 것이며, 존재 자체와 삶에 떨어낼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이티 대지진과 더불어 동일본대지진은 우리에게 완결된 비극으로 기억되지만,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깨진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그 침출수에 오염된 어패류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공포는 우리에게 비극으로 마무리된 공포가 아니라 극장 밖 일상의 공포이다. ‘만져지지 않는’ 핵과 방사능 문제에 관련한,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모호하고 불안정해진다.

    한국은 인구당 핵발전소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게다가 여전히 한국 정부는 핵 발전 산업을 국시로 간주하고 있다. 발전에 쓰이고 남은 핵폐기물의 방사능이 사라지는 데는 2만 년이 넘게 걸리지만, 2만 년의 시간은 지금 우리의 일상에 비하면 만져지지 않는 세계, 즉 무대 위의 비극이고, 우린 안전한 객석에 있다고 정부는 끊임없이 말한다. 전 세계에서 10년에 한번 꼴로 일어나는 재앙급 핵 사고의 현상적 통계는 몇 만 분의 일이라는 수치적 확률 뒤로 은폐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객석에 있고 싶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핵 발전이 만들어내는 잉여전력을 소모하기 위해 밝혀진 한강의 다리들과,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에어컨의 편리함을 객석에서 계속 누리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거대한 객석과 이를 가득 채운 관객을 위해 셀 수 없는 송전탑들이 산에, 들에, 마을에 들어서고 막대한 전기장을 쏟아내며 생태계를 파괴하지만, 우리는 도시에 있는 객석의 편안한 의자에 파묻혀 이 안전한 비극을 감상하고 싶을 뿐이다.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런 모순과 은폐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환영을 만들어내기 위해, 극장에서는 엄청난 전력을 들여 조명장치를 사용한다. 공연이 끝나고 환영이 사그라지면 속절없이 폐기될 세트를 제작하기 위해, 수많은 목재와 철재, 합성도료 등이 퍼부어진다. 여기는 세상과는 유리된, 비극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에 비극이 존재할까. 1986년 4월 26일에 벨라루스 국경에 인접한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제4호 원자로가 몇 차례의 폭발 후 무너졌다. 4월 29일에는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 5월 2일에는 일본, 4일에는 중국, 5일에는 인도, 5~6일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고준위의 자연방사선이 측정되었다. 체르노빌의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30년 전 일이지만,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데는 수만 년이 걸린다. 우리는 끝나지 않는 비극의 무대 위에 여전히 서있다. ‘만져지지 않는’ 핵에너지가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사라졌다.

    이제 비극의 시대는 끝이 났는지도 모른다. 스리마일 섬, 체르노빌, 후쿠시마, 고리, 밀양과 우리의 거리, 식탁은 하나의 세계이다. 이제 이 세계에서 차단된 채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비극의 극장은 없다. 무대와 객석, 모든 극장들까지도 이 거대한 하나의 세계의 동시대적 일부이기에. 경계는 사라졌다.

    비극의 세계
    다큐멘터리 <밀양전> (2013) 중 스틸화면

태그 비극의 세계, 무대와 객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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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제46호   2014-06-19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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