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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그늘
[고재열의 리플레이]

고재열_시사IN 문화팀장/블로그‘독설닷컴’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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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헐~’ ‘즐~’ ‘대박!’…. 청소년들이 주로 쓰는 감탄사였다가 어른들까지 쓰게 된 단어들이다. 형용사에 ‘개’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더워’ ‘개멋있다’ ‘개불쌍해’ 이런 단어는 아직 어른들은 쓰지 않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왜 이런 단어들이 그리 많이 쓰일까?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단순히 겉멋 들려서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네가 그렇게 강하게 느꼈어, 나도 그렇거든’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단지 ‘네 생각에 나도 동의해’ 정도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강도까지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시대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혹은 카카오스토리,) 밴드 등의 서비스를 통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기성세대 역시 ‘공감능력’이 중요시된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에는 ‘좋아요’ ‘멋져요’ ‘부러워요’ ‘싫어요’ 이모티콘이 있어 공감을 표시하게 해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으면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소통의 시대는 공감의 시대다. 열심히 소통하고 공감하라며 충고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공감치’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공감의 시대에도 그늘이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하던 시대를 거친 우리는 ‘나와 다른 감정의 강도’를 가진 사람도 용인하지 못한다.

    처음에 즐겁게 SNS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SNS 서비스는 ‘친구 끊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불편한 생각을 덜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다른 은하계에 살게 된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감정의 강도에 따라서 분리가 일어난다. 몇 번의 큰 사회적 사건을 거치면서 나와 감정의 강도가 다른 사람들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슬퍼서 이렇게 분향소도 방문하고 우울하게 지내는데 너는 왜 그리 밝고 가족 여행까지 가는 거야?’라며 상대방과 관계를 끊는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슬픔에의 강요를 겪었다면 월드컵 때는 기쁨에의 억제를 강요받았다. ‘내가 세월호 참사를 잊고 월드컵에 빠져도 되는 것일까?’ ‘월드컵은 브라질 철거민의 눈물 위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즐겨도 되는 것일까?’ 식의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SNS에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사람들은 강정의 슬픔을 잊은거지?’ ‘왜 밀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거야?’ 라는 생각들이 집단적인 감정의 일치화를 강요한다. 내 SNS 타임라인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의 자장이 느껴져야 안심한다. 혹시나 내가 그런 문제에 무심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적절히 맞장구 쳐주고 가끔씩 감정을 발산한다. 공감치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이런 공감의 강요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그래서 SNS 공간에서는 때로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그래서? 그래서 우리 편은 어떻게 생각하면 되는거야,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거야’라며 온라인 준거집단의 판단에 기댄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시작한다.

    일치에 대한 강박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분단 사회였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공격받았다. 그래서 내 생각이 보편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강요받았다. 예전에 사고의 일치를 강요받았던 것처럼 지금은 감정의 강도를 맞춰줄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부자유스럽다.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김수영 시인은 “‘김일성 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이라고 절규했다. 마찬가지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인가?’라고 불안한 시대가 정상이 아니듯 ‘내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라고 불안한 시대도 정상이 아니다.

    강요받은 공감은 공감이 아니다.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감은 자발적 관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누구나 스스로의 관심을 좇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허용하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발적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공감이 진정한 힘을 갖는다. 내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남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진정성이 나온다.
 

태그 감탄사, 청소년,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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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호   2014-07-03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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