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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것들이 지금의 내게 안겨 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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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직업에 오래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자료와 서적에 대한 애착이 있다. 그것을 모을 때도 신중을 기했지만, 버릴 때는 더 신중을 기한다. 그동안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그 자료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그걸 책장에 고이 넣어두었던 시간을 억지로 기억해내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대단한 보물이었던 것처럼 마음을 담는다.
내게도 그런 자료들이 책장 가득이다. 이사할 때마다 버릴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책장에 꽂는 자료들. 그중에 연출을 시작할 즈음에 공연했던 희곡을 우연히 읽게 되고, 어찌나 민망했던지… 그렇게 보물처럼 여겼던 자료인데, 그 겉만 소중히 했지, 그 안에 적힌 활자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안의 활자가 내게 주는 또 다른 충격이란!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때는 내가 그렇게 밖에 해석해내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이 언어의 액면가 그대로만 연출했을까…? 정말이지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연출을 했던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고 연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전제(前提) 했을 때, 그때의 일들이 많이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난 그 시간에서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래도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좀 더 현명했으면 좋았잖아…?’

<고도를 기다리며>를 20대 때 보았고, 30대 때 보고, 또 40대 때 봤다. 배우들이 바뀌면서 다져진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희곡 자체는 토시 하나 변하지 않고 초연의 번역본 그대로 계속해온 공연이다. 그런데 20대 때 ‘좀 어려운데, 철학적이구나’라고 느껴지던 것들이 30대 때는 ‘맞아, 맞아, 사람들이 다 저래’라며 웃기고 유쾌하더니, 40대 때는 ‘인간은 왜 이런 고통 속에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짠함으로 다가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대사는 변하지 않았는데, 대사하는 배우들의 억양도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난 똑같은 대사 속에서 내 시간의 흐름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20대에, 30대에 그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40대의 지금처럼 느꼈을까? 체홉의 희곡도 그러하다. 예전에 읽고 연출했을 때와는 다른 것들이 아니, 더 깊은 것들이 지금의 내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작품을 이해하는 능력이 좀 더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게 정말 다 일까? 몇 년 더 지나면 더 많을 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예술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기르게 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반복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삶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다른 전문분야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반복해서 보게 되면서 자신의 손의 쓰임새와 생각의 쓰임새를 느끼게 되고, 보다 나은 결과물을 위해 발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떡을 만드는 장인도 그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도 그러하고, 사람을 고치는 의사도 그러하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현명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 분야의 달인은 그 분야에서만의 달인이 아니라, 인생의 통찰력까지 생긴 달인으로 존경받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더 현명하게 된다. 하지만, 그 현명함은 내일의 나에게 덜 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현명함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주는 삶의 쌓임을 반갑게 맞이하다 보면 현명함도 물 흐르듯 내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할 듯하니.

책장에 먼지를 덮고 쌓여있던 내 전공 자료가 오늘의 내게 일깨워준 ‘현명함’을 내일은 무엇 대신할지 궁금하다.

태그 지난 것들이 지금의 내게 안겨 준 것,극단 사개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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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선

박혜선 연출가, 극단 사개탐사 대표
주요작품
<억울한 여자> <만파식적 도난 사건의 전말> <웰즈로드 12번지> <이단자들> <가을 소나타> <트릿> 외
junegoo@hotmail.com
제54호   2014-10-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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