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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과 광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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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과 광장 사이

어느덧 4월이다. 일 년이 하루 같았던 유가족들은 여전히 광장에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다. 주말마다 광장의 배경막을 만들어주던 경찰의 차벽 또한 지난 해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성난 시민들이 자신들의 잃어버린 양심을 어떻게든 인양하려는 힘겨운 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광장의 스펙터클이 극장을 압도한 지 너무도 오래되어서 연극적 상상력으로는 현실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한국 정치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청와대와 국회라는 미확인 비행물체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은 때론 덜떨어진 C급 마피아 같기도 하고, 때론 세금을 하도 까먹어서 비만해진 좀비들 같기도 하다. 그들은 만약 극장에서만 만났더라면 정말 신비롭고 오묘한 매력을 선사할 만한 극적인 캐릭터들이다. 관객들의 상식을 뛰어넘고 상상을 초월하는 그들의 존재감은 그들을 작품 속에 꼭 캐스팅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을 극장 안에다가 붙잡아 둘 방법이 없을까. 우리처럼 지하연습실에서 밤 10시까지 연습을 시켜보면 어떨까. 연습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있는 솔직한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발견하게 만들고, 고백하게 만들면 어떨까. 또 상대방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앙상블의 묘미를 일깨우면 어떨까. 어쩌면 그들도 연극행위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당신은 본래 정치인이 아니라, 연극을 했어야 했어요. 그게 운명이었어요.’라고 설득해서 그들을 극장 안에 잘 가둬둘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좀 더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극장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악마는 적어도 귀여울 수 있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치가 떨리게 만든 악마는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의 광장에서 펼쳐졌던 스펙터클이 극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면 하고 망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런 망상만큼 나는 부질없이 무기력하다.

극장과 광장 사이

얼마 전 베를린 크로이츠베르그 지역의 슈프레발트 광장에서 큰 집회가 있었다. 그날은 유엔이 정한 기념일로서 전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주요 이슈였다. 그날 베를린 시민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하며, 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My Right is Your Right"로 알려진 그 날 집회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접한 건 학전의 <지하철 1호선> 원작자로 알려진 폴커 루드비히의 극단 그립스(Grips) 공연 일정표에서였다. 또한 '탈-이주(Post-Migration)' 연극의 언더그라운드 메카로 자리 잡은 크로이츠베르그의 발하우스(Ballhaus) 극장에는 집회에 관한 주요 리플렛들이 놓여 있었다. 유독 추웠던 그 날 집회에서 베를린 연방정부에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이는 공공극장인 막심 고리키(Maxim Goriki) 극장의 예술감독인 세르민 랑호프 여사였다. '탈-이주 연극'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발하우스 상임연출가 출신 세르민 랑호프는 현재 막심 고리키 극장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예술과 삶을 더욱 강력하게 일치시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미 며칠 전 막심 고리끼 극장에서 도이체스 테이터(Deutsches Theater), 하우(Hau)를 비롯한 베를린의 주요 공공극장의 연극인들이 함께 모여 베를린에 유입되고 있는 난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었다. 공공극장의 예술감독들이 대정부 집회를 주도하면서 정부정책을 비판하고, 투쟁선언문을 낭독한다는 사실을 우리 한국의 공공극장을 이끄는 예술감독님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My right is Your right"라는 구호와 함께, 그날 광장에 모인 베를린 시민들을 열광하게 만든 세르민 랑호프의 외침은 바로 이것이었다. "My stage is Your stage!" 베를린 시민들은 연극인들을 믿고 사랑한다. 밤마다 공연장은 관객들로 넘친다. 그들은 이렇게 극장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부터 함께 한다. 그리고 그날 집회의 마지막 일정은 Yaam이라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탈이주민들이 직접 자기들의 모습으로 출연하는 커뮤니티 연극 "Letters Home"이라는 공연이었다.

극장과 광장 사이

크로이츠베르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베를린의 터키계, 아랍계 이주민 게토인 노이쾰른 지역에는 탈이주 연극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극장인 하이마트 하펜(Heimathafen)이 있다. 그 극장의 공동운영자인 여배우 인카 뢰벤도르프는 베를린의 공공극장인 폴크스 뷔네 소속이면서 동시에 <아랍보이>, <아랍 퀸> 등의 작품에 출연하는 등 탈이주민 연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베를린 연극은 늘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그럼, 정치를 빼면 연극할 게 뭐가 있냐’고. 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가들을 믿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베를린의 극장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정치가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또 우리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언제 나치 같은 놈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간혹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네오나치에 대한 끔찍한 소식들이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는 불가능했다. 네오나치 따위가 발붙일 틈은 없었다. 극장은 광장과 소통하고 있었고, 시민은 관객이자 행동가였다. 그날 밤늦게 Yaam에서 공연이 끝나고, 콘서트와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독일어 문장이 있다. Kein mensch ist Illegal. ‘어떤 사람도 불법적인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베를린의 새벽에 페이스 북을 통해서 우리 연극인들 가운데 광장에서 불법적으로 끌려간 배우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울한 밤이다.

태그 극장과 광장 사이,김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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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김재엽 극작가, 연출가
1973년 생 극작가, 연출가, 극단 드림플레이 대표, 연극실험실 혜화동일번지 4기 동인,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교수 대표작으로 <알리바이연대기>,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배수의 고도>, <여기, 사람이 있다>, <장석조네 사람들>,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령을 기다리며> 등의 작품이 있다.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연극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PAF연출상 등을 수상했다.
제66호   2015-04-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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