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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페이와 재능기부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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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일이다. 방송에 곧잘 나오는 모 교수님이 회사에 와서 팟캐스트 공동방송을 제안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랬다. '당신들이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돈도 들이고, 스텝도 준비하면 내가 나와서 방송을 해주겠다.'

당연히 들어줄 수 없었다. 회사에 팟캐스트를 할 예산도 없었고. 있었다면 <나는 꼼수다>로 팟캐스트 스타가 된 주진우 기자에게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고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후 회사에 보고해서 검토를 했으나 당연히 안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때 그 교수님 이야기를 듣다가 이분이랑은 절대로 무슨 일을 같이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있었다. 스텝은 그냥 대학생 무급 인턴들을 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스펙이 필요하니 이런 경험이 될 것이라며 무급을 너무나 당연하게 이야기를 했다. 말하자면 ‘열정페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교수님을 영화 GV시사회 장에서 만났다. 함께 영화에 대해서 토크를 하는 자리에서 그분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워낙 그런 공격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 교수 밑의 조교들이 걱정되었다. 그들은 얼마나 ‘열정페이’를 강요당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방송에 더 출연하고 더 이름을 알릴수록 밑의 제자들은 더 많은 ‘열정페이’를 강요당할 것 같았다. 나중에 그 교수에 대한 더 걱정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 그 교수뿐이랴? 기성세대에게 열정페이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열정페이 문제를 갑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정페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피해자인 청년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기회부여인지 아니면 착취인지. 마치 성폭력 성희롱 문제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 것과 같다.

사실 재능기부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말이 좋아 재능기부지 갑을 관계가 형성된 곳에서 부탁하면 ‘비자발적’으로 해주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는 그것이 생업인데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그들로서는 경제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선의로 도와준 사람이 계속 재능기부를 강요당한다는 점이다. 왜 저기는 해주고 여기는 안 해주느냐는 논리고 부탁하면 도리가 없다. 그나마 미리 재능기부라는 것을 고지하는 경우는 판단할 겨를이라도 있다. 아무런 사전고지도 없이 나중에 ‘재능기부로 생각하시라’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일전에 ‘기적의 책꽂이’라는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했던 적이 있다. 프로젝트를 위해 행사를 자주했는데 그때마다 재능기부에 의지했었다. 처음에는 주변 문화예술인에게 부탁했는데 여러 번 하게 되니 지인이 소개를 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열정페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같이 한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한 상태에서 온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열정페이와 재능기부는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기성세대들은 열정페이가 아니라 기회부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재능기부도 좋은 일에 동참하니 좋은 것 아니겠냐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렇게 해왔다. 이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달라져야 한다. ‘열정페이’가 아니라 ‘기회부여’가 되려면 혹은 비자발적 재능기부가 안 되려면 만족시켜야 할 조건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요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원리는 을의 입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과정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그 고재열의 리플레이,열정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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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시사저널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나 '삼성기사 삭제사건'에 항의해 6개월 동안 파업을 벌인 후 사표를 내고 동료들과 시사IN을 창간했다. 블로그 '독설닷컴'으로 인터넷 논객 활동을 시작했으며 요즘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트위터 @dogsul | 페이스북 facebook.com/dogsuldotcom
제75호   2015-09-03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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