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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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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의 제목 혹은 이름이란 게 그 뭔가의 특징이나 성격을 드러낼 것 같지만, 사실 전혀 상관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고급”위생저라고 찍힌 나무젓가락 치고 고급인 경우를 본 적이 없으며, “희망”퇴직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나눔”로또에 1등 당첨된 사람이 당첨금을 사람들과 나눌 리 없으며, “환경”부는 환경을 지키기보다 파괴할 권한을 나눠주느라 바쁘다. 그뿐인가. 멤버십에 넌덜머리나게 하는 엠티, 우리의 안전을 위험에 빠뜨리는 안보정책 등등. 이쯤 되면 이름이란 게 본질을 드러내기보다 은폐하는데 더 유용하게 쓰이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바로 그 목적을 지닌 온갖 말들이 작렬하는데, 그 중의 백미는 대선후보의 TV”토론”이 아닐까 한다. #토론할_생각_1도_없음

대선 TV토론을 미처 못 보신 독자께 - feat.레드준표

우파가 집권하는 전지구적 유행은 유달리 좌파세가 강했던 남미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그 중에 아르헨티나는 “응용정치”를 앞세운 어떤 정치 컨설턴트의 오랜 도움을 받은 우파 정치인이 집권했나본데, 그 응용정치라는 게 1)자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유권자, 2)타후보에게 호감은 있지만 그닥 열렬하진 않은 유권자, 3)타후보를 지지하지만 자후보에게도 호감이 있는 유권자, 4)자후보와 정책에 반대하는 유권자, 5)자후보에게 확실한 반감을 지닌 유권자로 유권자를 분류한 후 2),3) 집단의 성향과 입장, 그 이유와 배경을 정량적, 정성적, 집단심리학적, 사회심리적으로 십 수 년 간 치밀하게 파악, 이들이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비전과 최적화된 정책을 마침내 맞춤형 마케팅으로 제시하는 것이란다. 물론 이런 정책과 비전들 사이엔 일관성이 없고 모순투성이지만, 이들에게 우파니 좌파니 하는 논리적 일관성은 전혀 관심이 아니다. 어차피 1), 4), 5)집단은 결론을 이미 정해놨고 절대 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치라고 일컫는다. #어디서_많이_본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후반에서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온 삶을 자각하고 “인형의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로라에게 남편 헬메르는 “허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허락 따윈 필요 없다며 로라가 집을 나서자 움찔한 헬메르는 로라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비웃는다. 이 기회에 나가서 세상물정을 배우겠다는 로라에게 헬메르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라고 꾸짖는다. 이에 로라가 내 자신에 대한 의무부터 생각해봐야겠다고 하자, 헬메르는 종교와 양심, 법을 따르라고 윽박지른다. 헬메르가 얘기한 법에 대한 공정성에 대해 로라가 문제제기를 하자, 헬메르는 로라가 심신미약 상태라며 정상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로라가 그 어느때보다 분명하고 또렷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계속 일관성 없이 태도와 논리를 바꿔오던 헬메르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매달린다. #내가_바뀔께 #하지만_목적은_하나

중세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원용한 교부철학이 설득력을 잃자, 중세교회는 새로운 세계관에 걸맞는 스콜라교리를 개발해낸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해하려면 믿어라” 류의 관념만으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자,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부터 시작해 신의 존재를 논리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식으로 교회의 논리가 바뀐 것이다. “믿으려면 이해해라” 류의 이 논리들이 언뜻 보면 그런갑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관에서 따지고 보면 좀 허술하고 옹색한데, 어차피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먼저 만들어놓고 온갖 난다 긴다 하는 학자들이 모여 논리를 끼워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애저녁에 토론이나 설득할 생각 없이 결론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만들어낸 과정이나 논리, 과학은 작위적이고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역전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 결론을 먼저 받아들이면, 즉 “믿음”을 가진 이에게는, 아무리 작위적인 논리도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해하려면 믿어라” #어디서_많이_본

네 그럼요.

신념에 의한 행동은 숭고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성적 논리의 세계에서 숭고한 행동은 위험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믿음은 논리와 설득, 토론의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의심이 필요할 때일지도 모른다.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논리를 찾다보면 음모론을 포함한 가짜뉴스들에 ‘좋아요’를 누르고 있는 인지부조화 속의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의 논리는 소수를 벼랑 끝으로 몰 뿐 아니라, 설득과 토론의 여지도 사라지게 만든다. 무슨 수를 쓰던지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기만 하면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고, 그렇게 전지구적 유행에 따라 극우민족주의나 자국중심 전체주의가 득세하게 될 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인 민주주의는 사실 끊임없는 의심과 토론, 설득을 통해야만 유지되는 것이었다. 결론을 열어놓은 민주주의는 그래서 어쩌면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며 고통스럽고 귀찮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반민주주의가 전지구적 유행인가보다

태그 열린 결론, 무대와 객석 사이, 박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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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제114호   2017-04-20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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