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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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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연극in은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그 첫 번째로 현재 활동 중인 배우 분들을 모시고 연극계 현장에서 몸소 체감하는 변화는 어떤 것인지, 혹은 변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왜 변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는 좌담회를 진행했습니다. - 웹진 연극in 편집부

일시: 2019. 3. 19. 화. 5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세미나실

진행: 성수연

참석: 김보은, 김정, 염문경, 이리

미투 이후, 어떻게 지내시나요?

성수연

수연
1년 동안 잘 지내셨나요? 사는 게 많이 바뀌었나요? 저는 훨씬 고통스러워졌어요. 더 좋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고 있지만 일상에서 감수하는 사소한 고통의 총량은 늘어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미투 이후 많은 사람의 인식이 한 번에 바뀌기도 했지만, 바뀌는 방향성이나 속도가 달랐잖아요. 같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끼리도 사소한 의견 차가 크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보은
저는 작년 한 해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전문 강사를 하기 위해 교육을 다니면서 스스로는 더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인 혼란은 줄었지만 고통은 커진 상태예요.
문경
저도 비슷한 걸 느꼈어요. 아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슈에 대해 이게 문제라는 것은 공유가 되었고, 옛날보다 조심하는데 분명히 의견차가 있고요. 오히려 사소하게 어긋나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페미니즘을 주제로 다루거나,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 공유된 작업일 때, 그 안에서 남성 작업자들은 비켜서 있는 것 같아요. 여성 작업자들의 얘기를 같이 이해하고 공유한다는 느낌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 걸 감지하면 불편함을 느끼면서 오히려 어느새 내가 중립이 되었나? 하고 자문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리
나날이 불편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할 게 너무 많아졌고요. 작업도 바빠 죽겠고, 알바도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것까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가 억울하기도 했어요. 밤 10시에 연습 끝나고 와서 새벽 4시까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 회의하고. 더 민감하고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모여 시간을 쓰고, 맨땅에서 선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작년에 있었잖아요. 물론 제가 실제로 한 건 별로 없어요.(웃음) 오히려 그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비슷한 양상에 대해 이전과 이후의 맥락이 너무 달라져 버려서 불편하기도 해요. 작업하면서 불편한 장면을 이야기하면 마치 미투를 등에 업고 ‘여자들 좀 편하게 하자’고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어요.
김정
미투 이후에 많이 의심을 하게 된 게 연출과 배우가 너무 권력형 관계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에요. 저는 어떻게 하면 더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집단에서 작업을 많이 해왔어요. 처음 연극에 발을 들였을 때는 위계폭력을 너무나 많이 당했었거든요. 지금도 수치심과 불편함이 분노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어요. 그런 환경으로 가지 않으려고 스스로 선택을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팀 내 드러나지 않는 어려움은 있겠죠. 저는 평소에 불편하거나 맘에 들지 않을 때 당장 입 밖에 꺼내는 성격이 아닌데, 분명히 의식은 생겨서 거기에서 오는 격차가 있어요. 인식은 하는데 말을 못 하는 상황, 말을 하지 않으려는 불편한 상황에서 오는 외면 등이 계속 작동하는 것 같아요.
보은
저는 몇 년 전부터 팀을 꾸려 활동하고 있는데 작품 준비하면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것에 대해 불화는 없어요. 다만 고민하는 지점은 팀에서 저만 여자고 세 명이 남자여서, 성별을 50:50으로 맞추자고 얘기하고 있어요. 앞으로 작업할 때 가능하면 여성배우 캐스팅을 하고 어려우면 스탭 분들을 여성으로 섭외하려고 해요.

#여성서사 # 여성주의적 관점

염문경

문경
저는 성비가 딱 맞는 포스트드라마, 그중에서도 소위 자기이야기를 구성하는 작업들을 해왔어요. 기계적으로 성비를 맞추거나 배역 성별을 바꾸면서 여자배우가 많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연출가는 주로 남성이었어요. 그 안에서 제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캐릭터로 소모되고 있더라고요. 사실 저는 인생에서 중요한 이슈가 페미니즘이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의문이 드는 지점은 제가 심지어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남성 연출가가 전체적으로 구성해놓은, 본인이 하고 싶은 메시지 안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담는 정도로 소비되고, 결국은 남성 입장에서의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거예요. 사실 그걸 비판해도 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창작자는 결국 자기가 보는 세계를 창작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거기서 제가 그런 식으로 소비되어버렸다는 피드백을 받고 나면 허탈하죠. 막상 공연에서는 제가 페미니즘 전사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 공연이 여성주의적이었나? 보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은 거죠. 내가 주체적으로 어떤 장면을 만들었더라도 전체 맥락 안에서 왜곡되어 보인다는 얘길 들으면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보은
여성주의적 작품을 할 때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 없이 기존 작품의 성별을 여성으로만 바꿔서 올라가는 게 많잖아요. 그런 경우는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남성 서사의 주인공을 여자로 바꾼다고 해서 여성주의 서사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상한 지점에서 혐오가 남발되기도 하고요.
이리
동의해요. 젠더 프리(gender free), 젠더 플렉서블(gender flexible), 젠더 크로스(gender cross)만으로 공연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여성주의적 관점과 목표를 갖고 제작했으나 성폭력이나 위계폭력이 재현되고 혐오가 무대 위에서 재생산되는 걸 보면 절망스러워요. 솔직히 작년에 그런 공연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포스트드라마 창작 과정에서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내가 여성 당사자, 성폭력 피해당사자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요. 그 소재를 어떻게 잘 다뤄내야 하는지, 여성주의 관점을 담는 것이 목표라면 혐오나 폭력을 소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죠.

#백래시 #동료들의반응

수연
좋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작품으로 만들기는 어렵죠. 남성 창작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결국 더 폭발하거나 여자들의 잘못만을 더욱 지적하게 되는 게 아닐까 염려도 돼요. 사실 털면 안 나오는 사람 없듯이 문제를 제기한 여성 창작자들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과거나 결점들이 있겠죠. 인간 개개인의 결점들을 더 미워하게 되고, 자신들을 자꾸 가해자로 몰아가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백래시일 수 있잖아요.
이리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성적인 농담도 앞으로 못하겠다고. 본인이 성적인 농담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게 잘못 아닌가?(웃음) 작품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과하게 PC(Political Correctness : 정치적 올바름)함을 목표로 해서 공연을 만들면 안 되는 것 아니냐, 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왜 안돼요?’라고 물었어요. 저한테는 인간적인 공격으로 느껴졌어요. 오히려 스스로 젠더 감수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나도 성폭력 나쁘다고 생각하고 공연에서 대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피해 의식이 심하게 있어서 날이 서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나는 떳떳하다. 너와 토론할 수 있는 관점도 갖고 있다. 그런데 네가 너무 난리다. 작업적으로 해가 된다. 공연의 주제가 흐려진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건 싸우기 정말 힘들어요. 저는 안전한 작업 공간, 관객도 작업자도 고통받지 않는 공연을 만드는 것이 최소한이라고 생각해요.
보은
저는 저번 주에 전주인권센터에서 주최하는 미투 관련 포럼에 참여했어요. 전주에서 미투 운동하시는 분이 그날 ‘아, 지겹다 그만해라’라는 카톡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제 포럼 1회에요. 처음 열었어요. 서울에는 뜻 맞는 사람들이 있으니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혼자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문제 제기 자체에 대해 백래시가 오니까 당황스러운 거죠.

#캐스팅 #작품선정기준 #No라는대답

김정

수연
저는 김정 배우님이 일다(페미니즘 웹진)에 쓰신 칼럼이 인상 깊었어요.
김정
‘그 몸으로 여자 주인공 연기할 수 있겠냐’1)가 제목이었어요. 주제가 여자 배우가 겪는 성적인 억압,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저는 여성의 몸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억압받고 살아왔는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면화하면서 나 자신을 얼마나 미워해 왔는가가 주된 내용이에요. 제가 2007년에 연극을 시작했어요. 그때 한 남자 선배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네가 이 중에서 다리 제일 굵다." 코러스들이 종아리가 드러나는 똑같은 옷을 입어야 했거든요. 그런 평가를 항상 들었고 그런 말을 들을 때 부끄러워했어요. 그 말이 저한테 박혀서 반바지를 못 입었어요. 항상 내 문제라고 내면화해서 생각을 했던 거예요. 다시 입게 된 것이 3년 전이에요.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전환이 일어났어요. 그런 평가를 하는 당신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하게 된 거죠. 세상을 보는 렌즈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내 몸이 문제고 나는 이게 문제고 저게 문제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이리
저는 여러 성별을 같이 연기할 수 있거나 페미니즘적인 내용이거나 아니면 젠더 이슈적인 공연만 제의가 들어와요. ‘왜 이런 것만 들어오냐’ 하고 기획자한테 푸념한 적도 있는데, 오히려 ‘잘됐네, 거기서 고르면 되겠네’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웃음)
문경
예전엔 거절할 생각도 못 했는데, 요샌 필요한 경우 거절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영화도 하고 글도 쓰니까 이런 일들이 제 자존감을 지켜줘요. 내가 거절해야 할까 말까 싶을 때 ‘다른 거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예전에는 훨씬 더 깊게 괴롭게 고민하다가 결국 안 좋게 됐거든요.

김보은

김정
동의해요. 저도 제가 더 소중해요. 내가 맡는 역할에 나를 갈아 넣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요.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지는 제가 선택을 하거든요.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거나 소비되기 위해 배우를 선택한 게 아니라, 사람한테 관심이 있고 인간을 연기하고 싶어 배우를 하는 거예요. 인물을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황금 같은 3개월을 쏟아붓는 건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보다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고 어떤 동기로 행동들을 선택하지? 하다 보면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주체성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중이에요.
보은
2017년까지 ‘일정만 맞으면 다 합니다’였다가 작년부터는 대본을 먼저 보내 달라고 부탁해요. 제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대본 안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먼저 해요. 굳이 혐오적 요소가 가득한 공연을 내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해요.

#배우의참여 #프로덕션의변화 #작품의변화 #연기의변화

수연
배우의 발언권이나 참여는 어느 정도로 보장되고 있을까요? 실제로 프로덕션 안에서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나요?
이리
저는 연출, 제작자, 극장도 달라져야 하지만 무엇보다 배우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겪어보니까 내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다르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 하시고 있는 것처럼 ‘대본 보내 달라, 못 하겠다’ 이런 것들은 작지만 엄청난 일이거든요. ‘다른 작업 가서 얘기해야지, 맞서서 싸워야지’ 생각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말 어려워요. 그래도 다른 팀에 가면 솔직히 얘기할 것 같아요. 그러다 쫓겨날 수도 있지만.(웃음)
보은
배우 메소드 담론도 바뀌어야 한다 생각해요.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공부방 할 때, 알게 된 책이 있어요. 『An Actress Prepares : Women and "the Method"』라는 책을 가지고 스터디를 해보려고 해요. 보통 진실된 연기를 요구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진실이 누구의 진실이냐? 누가 선택한 진실인 건지 물음을 던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중립적인 몸이 과연 가능한가? ‘중립훈련’의 몸은 백인, 비장애인, 남성, 이성애자, 성인을 ‘중립’으로 해놓은 거죠.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나는 아무리 뭘 똑같이 해도 다른 의미가 파생된다고 읽게 되는 거죠. 배우는 빈 그릇이고 하얀 도화지여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허상이죠. 메소드 자체가 이미 기득권 남성의 시선으로 이뤄져 있어요. 또, 취약한 상태를 만들어서 누가 무엇을 얻고 있는가? 과연 배우의 욕망과도 일치하는가? 의문이 들어요. 배우를 취약하게 만들어서 가스라이팅 당하기 쉬운 취약한 상태에 노출되는 것 아닌가 걱정도 들고요. 연출들이 연기 워크숍 하는 것도 문제예요. 연출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기스타일을 가르치거든요. 근데 그게 하나의 취향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처럼 말하고요. 전에는 워크숍 가서 ‘왜 나는 못 할까, 안될까’ 자책했는데 이젠 알겠어요. 취약한 상태가 되어야 할 수 있는 메소드라면 저는 그런 연기는 할 생각이 없어요.

이리

이리
애를 낳아보지 않으면 엄마 역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당연히 모르겠죠. 근데 연기할 수는 있잖아요. 사람 죽이지 않아도 사이코패스 강간범 역할 잘하는데 왜 애는 낳아봐야만 하는 거죠? 수많은 대학로 퀴어물 공연은 다 퀴어라서 하나요? 저는 자식만 해봤지만, 자식만 해봐도 엄마 연기할 수 있어요. 모성, 대지, 어머니 조국, 대자연, 그러면서 어딘가로 회귀하는 지점을 요구하는 역할은 남성 작가의 자기 어머니인 거죠.(웃음)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역할이 자식을 잃은 엄마 역할이에요. 남편과의 케미도 중요하구요. 그런데 저의 연기적인 선택에 있어서 ‘저 배우가 저 장면에서 개념적으로 연기하는 건 퀴어라서 그런 거 아니냐’ 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되게 힘든 역할이에요. 자식이 죽은 상태이고. 그런데 연기를 할 때 계속 고통을 느끼지는 않아요. “(내 자식이 죽었는데) 밥 먹었니?”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걸 원한다는 거죠. 뭔가를 응축하고 있는, 모든 걸 다 겪어본, 한방에 전달하는 처절한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거죠.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그랬어요. 너는 그러다 연기상 못 받는다고.
보은
제가 김보은 배우상(賞) 만들 거예요. 이리 배우님은 후보에 있어요.(웃음)
수연
저는 그런 의미에서 미투 이후에 이제 그런 역할 안 하고 뭔가 다른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서 행복하고 기뻐요.
문경
배우들도 시도하고 망할 자유가 필요해요. 이미 자기들끼리도 다 망하잖아요. 그런데 젠더, 여성 얘기하다 망하면 그거에만 천착하다 망했다고 비난당하고요.

#내면화 #자기검열 #콤플렉스

수연
뭐 해보고 싶다가도 ‘페미니즘에 천착하다 망했다’ 이런 말들이 먼저 생각나기도 해요. 제가 즐겁게 하는 그림이 먼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비난을 내면화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어요. 사소한 고통과 불편들이 또다시 내면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문경
저는 오히려 옛날보다 분노가 줄어들고, 대신 고민하는 순간이 많아졌어요. 이전에는 상대방이 너무 무식해서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이런 이슈에 많이 노출되고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해서 피로하다는 눈치를 줘요. 그래서 제가 더 어르게 되거나 개인적인 전략을 쓰게 돼요. 스스로 자기 합리화도 필요하니까 이렇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 맞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상대가 백래시를 일으키지 않도록 정제해서 말해야겠다는 일상의 발화 태도가 만들어지는 거죠.
수연
살펴보면 그러한 전략을 취할 여지가 없는 절박한 분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해요. 작년 혜화역 시위를 보고 많은 남성이 불편했을 거예요. 현장에서 혐오발언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지만 몰카에 대해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세상이 알게 됐어요. 최근에 정준영 고발 사건은 몰카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공론화된 거잖아요. 그런 경우를 보면, 누군가 자기를 포기해가면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도움받고 있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해요.
김정
저도 정말 비슷하게 생각해요. 작년에 예술인파견사업을 성폭력상담소에서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됐어요. 여성운동은 아주 옛날부터 계속 해왔잖아요. 이렇게 미투까지 확장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미투 점화가 됐다는 말을 들으면 희망이 생겨요. 나의 이 불편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공감 못 할 때 얘기가 발전이 안 되는 답답함이 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문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말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불편하다고 말하는 순간순간은 너무 힘들지만 말을 하고 문화를 형성해서 인식이 바뀌는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를 위한 환경 #진입자를 위한 보호장치 #자치규약

수연
매 프로덕션마다 내규 같은 걸 만드는 문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배우들이 취약한 이유가 어쨌든 결과물을 만들려면 결정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예를 들어 프로덕션에서 연출에게 최종결정권을 위임했고, 그래서 결정에 따르거나 지시대로 해야만 하는 포지션일 때도 있고요. 작품이 그렇게 가고 있다고 해서 생각을 할 줄 모른다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로 규정되지 않도록 규율을 잘 만드는 것이 필요해요. 그러한 규율이 배우를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리
직군 위계를 이기는 것이 성 위계인 것 같아요. 여기에 나이와 경력이 더해지고요. 연출이어도 경력이 적고 여성이면 경력이 많은 여성/남성 배우의 폭력에 노출되거든요. 교차적으로 이런 위험이 계속 존재하고 있어요. 문제는 누가 그 말단에 위치하고 있는가라는 거죠. 젊은, 경력 없는 여성 배우나 조연출, 의상 어시스턴트, 크루 등 이런 사람들이 가장 약자에요. 젊은 신진 연출의 경우 제작극장/기획자/배우/디자이너의 압력도 많이 받고요. 남성 선생님들일 경우 포지션이 뭐든 간에 권력이 생기고요. 어디에 국한되어 있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교차적 위계로 일어나는 폭력들이 있고,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냐의 문제라는 거죠.
보은
저도 무조건 연출이 갑이고 배우가 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훨씬 복잡하죠. 서로가 최소한의 안전함을 지킬 수 있는 우리 안의 약속들과 문화가 필요해요. 성반연에서도 코리아 씨어터 스탠다드 포럼도 진행되고 있고 우리 안에 어느 정도 선이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문경
연출자인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배우들에게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요. 여성이니까 더 자기검열을 하면서 조심하는 경우보다도 ‘나는 피해자면 피해자이지, 가해자일 리 없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떤 쿨함으로 간주하거나 여성 사이의 친분 관계라 생각하면서 정확히 똑같은 폭력을 여성 배우에게 행하는 경우가 있어요. 배우가 어리고 경험이 없을수록 선택받는 사람이라는 포지션을 하기 쉬운데 연출자들은 그런 것들을 한 번 더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별에 관계없이 나도 가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자기 되돌아봄을 한 번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리
러프하게 얘기하면 위계가 높은 사람, 성별 권력을 가진 사람한테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거잖아요. 계속 조심하는 것. 숨 막히고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누군가를 괴롭히는 폭력으로 연결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습관이 되면 더 이상 괴롭지 않고요.
보은
이제라도 인식했으니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안 하면 좋겠다고 바꿔가려는 노력을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는 자격이 없으니 입 다물고 있겠어’ 가 아니라 반성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연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서로 다른 시간을 거쳐 왔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 같아요. 여러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견딘 내용과 시간과 과정의 디테일이 달랐다는 걸 인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의 변화 #1인극 #창작의 동력

이리
저는 요즘에 여성 1인극이 많아져서 너무 좋아요. 원래 남자인 역할을 여성이 재해석해서 바꿨을 때 여성 배우가 사람으로 보이는 게 있어요. 본인 얘기를 하는 케이스가 자꾸 만들어지는 것이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의 삶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만들어지고 관객들에게 가닿고. 제가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웃음)
수연
미투로 인한 변화가 창작의 동력이 됐죠. 대안이 된 것 같고. 저는 일상 속에서 많이 느껴요. 고통에 함몰되어 느끼지 못할 뿐이지 지쳐있다가도 또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니까 좀 힘이 생겼어요. 며칠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리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는 순간의 선택인데, 그런 순간이 미투로 인한 변화로 인한 것이었음을 바로 인식하지는 못해도 반영이 되어서 나타날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제일 끝에서 표현해내는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동료들을 되게 많이 얻었어요. 성반연 포럼이나 모임에서 만난 동료들이죠. 한 번은 포럼 끝나고 비 많이 오는데 치킨집에서 뒤풀이를 했거든요. 한 후배가 여자 작업자들 많이 있는 것 처음 봤대요. 20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처음인 거죠.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연락해서 같이 술 마실 동료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게 변화죠. 그런 게 없었으면 각자 속해있는 그룹 속에서 고군분투했을 것 같아요.
문경
예전에는 이런 문제로 싸울 때 제가 언어가 없었어요. 무조건 싸우고, 지치면 지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 달라요. 몰카 사건이 몇 년 전에 일어났다면 파급력이 없었을 텐데 지금은 모두가 잘못됐다는 것에 동의하잖아요. ‘왜 신체 접촉을 액션처럼 연습하지 않나?’하는 질문도 가능해진 거죠. 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사례가 생겼고, 저한테도 언어가 생겼다는 게 좋아요.
보은
작년에 비슷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고 연결됐어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겪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분명히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있는 곳부터 변화하려고 하고 희망적이라 생각해요.
김정
저도 비슷해요.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돼요. 어떤 지점이 힘든지를 정확하게 공감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계속 말하기가 되니까 가능해지는 거잖아요. 그런 환경, 문화가 생겨서 저한테 너무 힘이 돼요.
수연
저에게도 이런 일이 없었다면 가해하는 줄도 모르고 가해하는 삶을 살았을 텐데, 그게 아닐 수 있게 됐고요. 작업적으로도 다른 작업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현실에 봉착해서 오히려 작업자로서 흥미를 느끼기도 하고요, 이렇게 동료를 만나게 되어 좋습니다.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강보름, 미투, 배우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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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름

강보름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연출가
연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우리가 고아였을 때>,<모던걸타임즈> 등이 있다.
rkdekdzhd@hanmail.net
제156호   2019-03-28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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