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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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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연극in은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그 일곱 번째로 연극계, 문단 내 성폭력 연대자와 여성학자를 모시고 현재 연극계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어떤 것인지, 혹은 변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왜 변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좌담회를 진행했습니다. - 웹진 연극in 편집부

일시 : 2019. 6. 12. 수. 7시 30분
장소 : 서울연극센터 2층 아카데미룸
진행 : 오성화(PD)
참석 : 권김현영(여성학자), 나희경(연극기획자), 장은정(문학평론가), 전강희(드라마터그)

※앞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동

#가해자복귀문제 #피해자의공동체복귀는? #비평으로소환하기
오성화
작년에 문단 해시태그 운동하시는 분들 통해서 가해자들이 금방 복귀한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연극계는 가해자 복귀가 예상보다는 늦게 시작됐다고 느껴져요. 현재 공연계를 중심으로 복귀에 어떤 유형이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희경
슬쩍 이름을 바꿔서 복귀하고, 극장을 만들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전화로 호소해서 공연을 계속 올린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 대한민국연극제에도 어떤 단체의 작가가 이름을 바꾸고 참가해서 서울까지 왔는데, 서울연극협회에 누군가가 제보를 해서 알려졌다고 들었거든요. 이름을 바꾸면 모르는 거니까.
전강희
연초에 어떤 분은 공연 연습에 본인이 직접 나설 순 없으니까 영상통화로 연습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 사건을 다 알면서도 여전히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 뭘까, 구조로만 얘기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성화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나온 가해자를 보호하려고 하는 흐름이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사실상 아주 소규모로 이런 사건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지는데, 형사 고소로 가지 않거나 크게 확장된 압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대표로, 연출로, 유명한 배우로 활동하는 케이스가 많죠. 이 부분과 관련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제기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나희경
애매한 가해자도 있죠. 피해자 주변에서 고소를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 근데 인지도는 있으니까 무대에 계속 서고.
오성화
피해 당사자가 성반연 등에 계속 상의를 하는 유형 중에, ‘저 사람은 나에게 너무 명백한 가해자고 잠깐 휴지기를 가졌다가 지금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거냐’ 하는 것이 있어요. 이 논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생각들이 궁금해요.
전강희
피해당사자 친구 분이 연락 주셔서 ‘나는 피해자인데, 가해자의 공연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들었고,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연 연출가도 자기가 당사자가 아니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저는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밖에 못 하는 거죠.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그 공연은 올라갔어요.
나희경
작년 말에 저의 뒤통수를 친 질문이 있었어요. ‘가해자는 공연하면 안 돼?’ 형사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저 사람을 가해자로 단정하고 제외할 수 있는가, 가해자가 저 공연에 나온다고 외부에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권김현영
사실 ‘가해자는 공연하면 안 돼?’ 라는 질문에는 답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형사 절차를 거치지 않았는데 잠정적 가해자 취급을 하는 것이 맞냐는 문제는 한편으로는 형사 절차를 밟았으면 이미 자기의 죄값을 치렀는데 그런 사람들은 공연하면 안 되냐, 얘기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의 공연을 전면적으로 막는 건, 저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고 얘기하지 않으면 ‘쟤는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라는 피해자의 원한 감정이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어서 원한 감정이 더 커지거나 무력감만 강화되는 방식이 되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정의를 따져봐도 ‘가해자는 공연하면 안 돼’ 가 전제가 아니라, 가해자가 쉽게 복귀하는 동안 ‘피해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로 질문을 돌려야 해요. 가해자가 훨씬 많은 경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아까워하거나 기회를 주는 네트워크 안에 있잖아요. 사실 피해자는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전에 당했던 상황이죠.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공연을 계속하게 만드는, 그 지원과 관심과 재능을 아까워함이 ‘우리에게 왜 없는가’라는 것으로 질문을 이동시켜야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가해자의 젠더감수성 없는 연극, 가해자 본인의 원한 감정이 가득 찬 연극을 보게 될 텐데... 그런 일을 겪고 반성하지 않은 가해자의 원한 감정이 덧붙어서 훨씬 더 나쁜 메시지가 있겠죠, 당연히. 그런 걸 찾아내서 계속 비평의 영역으로 갖고 오거나 관객의 영역으로 갖고 오거나 해야지, 민원 제보라는 형태는 답이 없고 끝이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도 우리를 민원 제보하기 때문에 끝도 없는 상호 투쟁 상태로 가게 되고요.
나희경
비평 영역으로 끌고 오면 좋겠는데, 사실 연극계 안에서 페미니즘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즘 연극에만 페미니즘 비평을 하고 있어서 그게 아쉬운 지점이에요. 페미니즘 비평하시는 분들이 다양한 연극도 보고 써주시거나, 아니면 기존에 평론하시는 분들이 페미니즘 관점으로 시선을 바꾸셔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죠.
권김현영
영화 평론계에서 그나마 페미니즘 비평이 갖고 있는 힘이 있거든요. 근데 연극 평론은 상대적으로 너무 부재하더라고요. 명맥이 좀 끊기기도 했고...담론이 너무 없다는 느낌입니다.
장은정
문단 내 성폭력의 경우에도 가해자 복귀 문제에 여러유형이 있는 것 같은데요. 첫 번째 케이스로는 공적영역에서 아예 공론화된 적이 없는 가해자들, 피해자 주변에 지속적인 조력자가 없는 경우 가해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활동하고 있어요. 두 번째는 미성년자 대상으로 일어난 성폭력의 경우인데요, 형사 재판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경우가 많아요. 세 번째는 대학사회에 전혀 진입하지 않은 가해자 문인의 경우인데, 텀블벅 같은 플랫폼을 통해 백래시 세력을 등에 업고 활동을 하고 있어요. 자신과 관련된 비판적 의견들에 모두 명예훼손 고소를 걸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이 상당 부분 삭제되었어요. 이 가해자가 자신의 SNS 계정으로 허위사실을 올리거나 피해자 신상을 유포하는 등의 악질적인 행동을 계속하는데,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면 또 고소를 하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소송에 휘말리기 싫어서 특정이 되지 않는 밈의 형태로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이것은 결국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죠. 마지막 경우는 교수 가해자의 경우에요. 아주 가벼운 수위에서 처벌이 이뤄지고 다시 복귀했기 때문에 그 교수의 지도제자들의 경우엔 가해 사실을 알고도 논문 지도와 학위 심사 등의 절차를 계속해나가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의 분노와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구요.
얼마 전 피해자 연대체 좌담회에 가서 들었던 얘기가 있어요. 본인은 형사재판에서 이겼고, 내가 겪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걸 사법시스템 안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에 회복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것이 인정되고 나서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라고 하는 것이 사법시스템만으로는 할 수 없는 거고, 피해자가 완전히 공동체에 복귀해서 구성원이라고 느낄 때 회복이 되는 건데, 그렇다면, 가해자가 처벌을 받을 때 피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문학출판계 내에서 자신의 새로운 위치를 획득하지 않는 한 회복은 어렵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연대 초창기에는 사법시스템에서 어떤 판결을 받느냐가 주효한 논의였는데 시일이 지나고 나서 근본적으로 물어야 하는 건 사법 시스템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더 큰 범위의 싸움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인 것 같아요. 한 개인이 피해자와 연대한다고 할 때, 그때 이 연대를 통한 싸움이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죠. 저의 경우, 싸움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의 정의가 각자 다르다고 하더라도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얼마 전 피해자 연대체가 다시 꾸려져 첫 좌담회가 열렸는데요. 연대 과정에서 큰 갈등을 겪었던 연대자들이 처음으로 그 자리에 모일 수 있었어요. 물론 모두가 모인 것은 아니에요. 심한 사이버 불링을 받고 고립된 연대자도 있고, 연대체의 와해 이후로 자취를 감춘 피해자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럼에도 이 작은 모임으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들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가 ‘연대할 수 없음’의 조건이 아니라 이전과의 다른 대화의 장을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출판사로부터 1:1 계약의 상태로 일을 하게 되는 작가의 노동 환경 시스템은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기 무척 어렵게 만드는 요소인데요, 이런 조건과 다르게 작동하는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사실 가해자 복귀 문제는 피해자의 자리를 보호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대우하고 발언권을 유지하게 하려면 결국 공론장의 문제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공론장의구성방식 #연극계와한국사회의사이를감각하기 #핵심적인지배담론에개입하기
권김현영
나는 연대한다, 선언한다, 지지를 철회한다, 하는 방식으로 공론장이 굉장히 뜨겁게 만들어지는 방식은 결국은 공론장을 만든 게 아니라 세를 만들고 보여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건 공론장이 아니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공론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동의 목표, 혹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갈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의 승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전제되지 않고 이야기를 했던 초반 운동 방식에 대해 분명한 평가가 있어야지만, 그다음으로 갈 거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라도 그렇고요.
오성화
문학계는 개인 작업이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일치해야만 연대할 수 있다는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 연극계 같은 경우에는 공동이라고 하는 제작 방식 자체의 합의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계 문화가, 가부장 문화가 이미 강하게 형성되어 있어요. 요즘은 대부분 예술대학에서 배워서 현장으로 나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교수님으로부터, 선배로부터 위계질서를 군대문화 버금가게 경험하고, 현장에 나와서도 연출님과 나, 선배님과 후배, 주연과 보조 이런 식으로 구성되니까... 사실 공론장은 나의 생각과 차이가 있는 의견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합의’를 경험해야 하는 건데... 공동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과정에서 그걸 한 번도 학습해본 적이 없는 거죠.
권김현영
저는 사실 사람들이 보편성에 대한 감각이 좀 많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좌표를 종종 상실하기도 하는 거죠. 공론장은 공동체성이기도 하고, 사회에서 ‘지금, 여기, 어디’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거든요. 연극계 내에서의 상황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합의하고 있는 상태인가 사이에서의 감각이죠. 학생들하고 얘기하면서 좌절감이 들었던 순간이 있는데, 어떤 학생들이 자기는 교수가 성희롱하면 그냥 당하겠다는 거예요. 성공할 수만 있다면 참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여전히 대다수가 성희롱, 성폭력을 견디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거거든요. 그런 식으로 견디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적응이라고 생각하고, 적응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비합리적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미투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정서가 훨씬 더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지 좀 참담한 심정이 되기도 했는데요. 어떤 곳에선 이미 지겹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곳에서는 소수의견일 뿐이죠. 성희롱을 그냥 당하는 걸 합리적 선택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게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고, 이것이 부적응으로 이해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문제 자체가 가시화가 된 다음인 지금은 이런 목표를 정하고 현실을 확인하고 개입의 방식을 전략적으로 가늠해보는, 이런 방식으로 공론장을 만들어야 하는 단계에 와있는 것 같아요. 사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에 당황스러운 건 소수자라는 감각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물론 본인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이 있죠. 그런 부분을 모르기 때문에 더 할 수 있고, 더 강력한 운동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약점도 있어요. 본인의 위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보편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조정하는 과정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적응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적응에 실패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거죠. 이게 되어야지만 정말 상황이 바뀌거든요. 공론장이라고 해서 같이 만나서 떠들거나, 같이 어떤 방식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이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공론장의 기획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주로 얘기되는 핵심적인 지배담론이 무엇인가. 이 지배담론을 무엇에 대한 싸움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공론장에 개입하거나 바꿀 수 있는 기획이라는 얘기입니다.
장은정
앞서 나는 연대한다, 선언한다, 지지를 철회한다, 하는 방식은 공론장을 만든 게 아니라 세를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 운동 방식의 한계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는 이 운동을 평가하기 전에 왜 그런 구조가 작동했는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의 경우,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말하기가 시작되었고 연대체가 꾸려지는 방식도 타임라인을 통해 형성된 부분이 있어요. SNS가 연대 방식의 주요한 플랫폼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들이 타임라인에서 어떻게 보여 지는가’라고 묻도록 만들어요. 이 경우, 잘못된 정보가 유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임라인 상에서 ‘팩트처럼’ 보이는 순간, 그것이 허위 정보이거나 한 사람의 관점에 불과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SNS 플랫폼 이외의 공론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으로는 포착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들은 결코 가시화되지 않는 거죠. 결국 2016년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의 한계는 단순히 구성원 개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소환해서는 안 되고 이 구성원들이 어떠한 시스템 속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사유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연극계 같은 경우는 페이스북이 주된 플랫폼일 텐데요. 온라인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포지셔닝되고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 운동해야 하는 것이 저희가 처해있는 운동의 조건인 것 같아요. 지금 이 플랫폼에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게 우리 사유를 어떤 식으로 제약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이 플랫폼에서만 나눌 수 있는 얘기는 뭘까 이런 식으로 플랫폼을 이용하면서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플랫폼의 작동방식에 우리의 담론이 그대로 포섭되어 버리는 것 같아요.
문학출판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의 과정에서 여성 연대체들이 와해되면서 피해자들은 더욱 이야기할 곳이 없어졌어요. 피해자분들이 직접 네트워크를 만들어 피해자 연대체를 꾸려 다시 말하기를 시작하신 분들도 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홀로 그 모든 시간을 버티고 있는 피해자분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흩어진 피해자들이 ‘여기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론장이 다시 만들어져야 하고, 그렇게 구축된 공론장에서 우리가 했던 연대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의 연대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벌써 그때의 이야기를 ‘후일담’처럼 다루면서 글로 써서 책을 내는 일부 연대자들이 생기면서, 하나의 입장이 그 시간의 전체를 모두 대표하는 것처럼 간주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어요. 물론 그때의 일들에 대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않는 자’가 명백히 나뉘어져 있고, 배제된 이들이 말할 공론장이 없는 상황에서 일부의 연대자들만 발언할 때, 우리의 연대는 오로지 한 가지 입장으로만 정리되어 버리겠죠.
전강희
피해자는 지금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이 질문을 최근에서야 해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알게 된 피해자분이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니, 피해 경험을 너무 아파하지 않으면서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지 상상하지 못했다면서요. 그래서 피해자가 해야 되는 건 작품이고, 작품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연대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시공연하자 #피해자 서사가 아닌 예술가의 서사로
오성화
작년 말에 권김현영 선생님을 모더레이터로 하고, 성폭력 피해사실이 있는 모 대학교 연극학과 졸업생 모임을 섭외해서 10분희곡페스티벌처럼 꾸민 자리가 있었는데요.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야기 나눴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 공연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거든요. 공연 계속하자. 떠나지 말자. 아무리 ‘네 잘못 아니야. 괜찮아’ 이런 말들을 어떤 명제처럼 알고 있어도 이 분야에서 떠나있으면 사실 체감하기 힘들잖아요. 미투 터지고 여름 즈음 제안했을 때는 정말 어림도 없는 얘기였거든요. 근데 12월 공연하기 딱 한 달 전에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권김현영
정말 그때 감동적이었어요. 배우들, 스탭들 다 모여서 다시 공연하게 될 줄 몰랐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런 이야기를 공연에서 풀어낼 수 있다니, 자기가 피해자로서의 어떤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배역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게 됐다, 피해 경험이 자기 연기 경험의 어떤 변화를 주었다, 까지... 연극 자체가 되게 중요한 장면처럼 느껴졌거든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동의하는 것 중 하나가 피해자들에게 발언권을 주지만 피해자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어요. 말을 안 듣고 싶어 해요. 피해자 얘기가 어떤 종류로 양식화되어 있으니까. 근데 피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피해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꿨는가를 통과할 때 되게 다른 스토리가 나올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얘기는 사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저는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 같은 거죠. 프리모 레비나 샬롯 델보가 자기가 그 고통을 통과했을 때 어떻게 다른 식의 언어를 갖게 되었는지, 굉장히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왜 그렇게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는지 생각해요. 그들이 피해자여서가 아니라 피해자로서 사상가가 됐을 때, 예술가가 됐을 때, 작가가 됐을 때, 배우가 됐을 때, 그때의 그 경험은 인류가 같이 알아야 할 지식으로 혹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은 공연이었지만 그런 식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서사라고 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경험한 인간의 서사가 어떻게 얘기될 수 있는가 이런 식의 기획이 나오면 좋겠어요.
#미투이후의경향성 #지원금헌터 #공공자원이분배되는구조를성찰하기
오성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은 많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볼게요. 현재 지원금 심사, 특히 청년 지원금 심사에서 미투 이후 혹은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겠다고 하면 그것 자체를 긍정 또는 부정으로 바라보는 식의 입장이 있는 것 같고, 심사위원들의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소문들이 퍼지면서 가짜 페미니즘 지향의 연극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지원 경향성을 파악해서 그것에 자신을 맞추는 지원금 헌팅 식의 흐름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활동했었던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키워드는 ‘독립’이거든요. 실제로 20년 넘게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축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돈에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것인가’를 일 년 내내 고민하거든요. 돈의 구조를 만드는 게 큰 관심사였어요. 이 사례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연극계 창작 경향성의 재점검과 기획 프로젝트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 ‘페미니즘’이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나희경
작년에 최초예술지원을 한 작품이 퀴어여성들의 서사였는데요. 지원서에 제가 페미니즘 연극이라고 썼겠죠. (웃음) 면접을 보러 들어갔을 때 어떤 심사위원분께서 요즘 페미니즘 연극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다른 작품들과 무슨 차별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질문하셨어요. 분명히 심사위원의 성비가 바뀌고 있거든요. 그런데 성비 안에서 의견차가 너무 명확하게 보여요. 여성이나 페미니즘을 주제로 했을 때 질문하는 심사위원이 다 여성이거든요. 남성 심사위원이 질문하면 ‘예? 왜 저런 얘기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질문이 있어요. 그 심사위원들 안에서 어떤 경합이 벌어지는지 궁금한 거죠. 올해 축제지원사업에서 페미니즘연극제가 떨어졌는데, 이게 페미니즘 때문일까 경력이 없어서일까. (웃음) 그런 질문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얹어가려는 무리들이 보여요. 포스터부터 여성 서사의 끝판왕을 할 것처럼 하더니 막상 공연을 보러 가면 이걸 왜... (한숨) 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도 가끔씩 대관 심사를 들어가 보면 이게 페미니즘 서사라는 것에 굉장한 당위가 찍혀있어요. 당위성을 갖고 지원서를 쓰시는 거죠.
권김현영
일단 말씀하셨던 지원금 헌터는 기본적으로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대세가 됐다는 증거. 기존의 주류가 페미니즘을 전유하고 차용하고 있다는 것은 되게 좋은 신호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기성에 있는 사람들이 지원금을 계속 받는 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신진의 비율이라든지 다양성을 위한 장치를 마련했는가, 이런 식으로 접근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언어를 독점하거나 진정성을 갖고 따지긴 어려워요. 그 정도까지 대세가 된 팀이 지금 자기 언어를 바꿔서 페미니즘을 한다고 하는 것 자체의 부도덕함을 얘기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자원이 분배되는 방식을 고찰해야 해요. 기존 방식에서 자원이 얼마나 안전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는가. 사실 공공자원이야말로 실험을 중심으로 분배가 되는 게 맞는데, 경력을 중심으로 분배가 되는 거죠. 민간에서 승부를 보기에는 씨드(seed)가 생겨야 하는 단계잖아요. 그러니까 더 소수적인 것, 더 실험적인 것, 더 퀴어적인 것에 대한 지원이 되어야 하는 게 맞죠. 그런데 기존 지원은 누가 봐도 뭐라고 하지 않을 지원을 하는 건데요, 그 구조 자체에 전반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자원을 많이 따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영화제 같은 경우 독립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공공자원을 따내는 것 이 두 가지가 모순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페미니즘대중화이후 #새로운상상력으로 파트너십만들기
오성화
연극계가 아니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투운동이 지속되려면 기성과 공공과 어떤 거리를 취해야만 할지, 이야기를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권김현영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이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과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초반에 페미니즘 대중화가 시작된 이후에 기존여성단체나 페미니스트들이 기성이라는 이름으로, 관변이라는 이름으로 휩쓸려서 다 버려졌어요. 혹은 버려야 한다는 주장 안에 있었죠. 버리고 새롭게 시작되면 좋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계속 여성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거나 운동의 연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당연히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경험이 좋았냐면, 제가 운동 시작하고 나서 선배들이 저를 포섭하려고 들지 않고 대신에 약간의 파트너십을 가지되, 우리 단체에서 일해라, 내 밑에서 일해라, 하는 식은 아니었거든요. 그런 관계가 건강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결과적으로 보면요. 동시에 상호적이어야겠죠. 각자 다른 식의 시대에 다른 식의 세대로 어떤 운동의 방식을 경험하고 있는 차이로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문화예술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한 방식이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예요. 원래 다 있는 걸 말씀드리면 되게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뭔가 다시 만들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예를 들면 강사진이나 상담실을 만들어요. 신고 채널을 만들고, 새롭게 만드는데, 기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면 기존 걸 쓰는 게 맞잖아요. 새롭게 만든다면 완전히 다른 형식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 걸 그대로 쓰면서 기성세대의 산물은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해버리면 사실 뭐가 달라지는 거지? 예를 들면, 연극계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공동체성이나 집단 작업 때문이라고 한다면 문제 해결 방법도, 접근 방식도, 피해자 지원이나 가해자 징계에 대한 상상력도 달라져야 하거든요. 근데 그것이 다 똑같다면 새로 만들 이유가 별로 없는 거죠. 특수성이 반영된 상황으로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기성 제도권과 분리라는 게 인력이나 단체와의 분리, 인적 자원과의 분리가 아니라 기존 사고방식과의 분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단과연극계의연대를향하여 #여성들의정치적야망기르기 #확성기장치작전
오성화
여성 창작자들의 활동이나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는 창작자들이 조금 더 안정감 있게 활동할 수 있으려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요?
장은정
이 기획연재가 이번 편이 마지막이라고 했을 때, ‘해결’의 형태로 가서는 절대 안 되는 것 같아요. 이 문제도 더, 저 문제도 더 얘기해야 하는 거죠. 페미니즘 얘기할 때 항상 해결에 관해 얘기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자꾸 생각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좀 다른 맥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연대해왔는데, 예술계 전체의 문제로 얘기했을 때 오히려 특수성이 도드라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을 같이 얘기해보자는 것이죠. 방향성을 다양하게 하고, 충분히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논의하는 방식으로요.
전강희
미투가 연극계를 크게 휩쓸고 지나간 후에 분명하게 알게 된 점이 있어요. 창작자가 창작을 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없다라고 여겼던 기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거였어요. 남자 예술가들에게는 다음이 있다는 거였어요. 재단과 같은 어떤 기관의 대표나 이사장, 예술감독의 자리는 어딜 가나 다 남자의 자리라는 걸 확실히 체감했어요. 여자는 어디에도 없어서 정말 없는 줄 알았거든요. 예술분야에서 여성 인력들에게 ‘다음’이란 없는 단어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미투 운동에 동참하면서 수많은 여성 선배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어요. 미투가 지속될 수 있도록 물리적인 판을 깔아준 것은 40대 후반의 여성 선배들이었거든요. 그들이 유능했기 때문에 이 판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지속 가능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거죠.
권김현영
너무 중요한 얘기네요. 기관장을 만들어야겠어요. (일동 웃음)
전강희
이제 공공 제작극장 라인업에 여성 창작자가 없으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몫을 요구를 할 수가 있게 된 거죠. 라인업에 여성 예술가들이 많이 올라갈수록 여성 예술감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가가 권력을 갖고자 하는 걸 나쁜 거라고 항상 배워 왔지만, 여성 연출가나 여성 배우들이나 지금보다 욕심을 더 내서 한 자리씩 하면 좋겠다는 게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실제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바꿀 수 없는 것 같아요. 소모되기만 하고요. 막상 일을 같이하고 좋은 결과를 같이 만들어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다음’ 자리는 남자가 차지하죠. 저는 그 사실을 지난 1년간 좀 더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오성화
이런 흐름이 나온다는 것, 연결되면 좋겠다고 저도 생각해요. 그 연결은 여러 가지 방향이 될 수 있어요. 서울을 제외한 각 지역에서 싸우고 있는 예술가들 간 연대, 서로 다른 장르 간 연대. 작년에는 만나지 못했다면 이제는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가 세대인데, 예를 들면 40~50대이신 분들이 작년 연극계 미투운동을 보면서 굉장히 많은 자극을 받으셨어요. 굉장히 많이 부끄러워했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건데 그중 하나가 내가 기관장이 되어야겠다는 의식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서로서로 독려를 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을까를 매순간 의심하면서 늘상 자신의 위치를 멋진 본부장 정도까지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를 깨달았다고 해요. 나이대에 맞게 미투운동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이죠.
권김현영
그래서 팀이 필요하기도 한데요. 그렇게 심사위원으로 들어가거나 어떤 회의를 할 때 페미니즘이라든지 새로운 중요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는데, 기존 담론에서는 쉽게 희화화되거나 사소하게 취급되거나 다음이 없기 때문에 사그라들거든요.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 여성 각료들이 의사결정 회의 자리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초반 아이디어를 되게 쉽게 뺏기거나 무시당하는 경험을 계속한 거예요. 그래서 확성기 장치라는 식의 작전을 짰어요. 내가 어떤 아이디어를 얘기하면, 그다음 사람이 이어받아서 그 아이디어가 어떤 부분이 좋고 어떤 부분이 의미가 있다는 걸 얘기해주고 그 다음 사람이 이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얘기했고 누가 지금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확증해주고 이 세 명이 팀이 돼서 얘기를 해주니까 회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가 쉽게 빼앗기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목소리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목소리를 낼 것이고 어떻게 공동의 목소리로 낼 것이며, 목소리를 낸 사람의 몫을 어떻게 공동체가 챙겨줄 것인가 이런 식의 말하기 방법에 대한 생각도 같이 얘기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누가 심사위원장이 되고 싶다고 하면 심사위원을 추천하고 사람들의 동의를 받고 본인이 되었을 때 이것이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이게 되어야지만 유통되는 권력이 되거든요. 내가 잘나서 가진 권력이 아니라. 그렇게 팀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다음 작전이 되겠네요. 그런 작전을 펼쳐봅시다. 그럼 바뀔 것 같은데요.
#여성관객과의연대 #새로운것을읽어내는힘
장은정
얼마 전에 어느 문학상에서 전원 여성으로 심사위원을 구성했어요. 심사가 끝난 후 심사경위를 발표하는 기사의 댓글에 이것은 페미문학상이 아니냐, 이 언론사는 메갈 집단임을 증명했다는 등 댓글이 엄청 달리는 거예요. 이런 댓글이 달릴 때 이것에 반하는 여성 독자들이 있다는 그 심증이 없으면 이것이 유지되기도 어렵고 출판사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기도 어렵죠. 그래서 결국 그 자리를 지지해주는 존재들이 너무나 필수적이지 않나. 연극계에서는 여성 관객들의 존재죠. 그 존재를 가시화시키는 공론장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희경
관객편 좌담회에서도 한 분이 관객과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요, 트위터에서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요. 특정 공연 캐스팅이 떴는데 퀴어 혐오적인 발언을 했던 배우들이 캐스팅돼서 제작사에 항의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죠. 그런 분들과 관계를 잘 맺어가야 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제일 먼저 발언해주고 제일 먼저 위드유 집회도 했고요. 관객과 어떤 관계를 쌓아가느냐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전강희
최근에 제가 속한 팀이 공모했던 지원사업의 심사위원 다수가 여성이었어요. 주류 공연이 아닌 지원공모 사업이었는데, 이런 경우 심사자들은 주로 여성들이에요. 주류가 아닌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진 남성 예술가나 관계자들이 적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도권 안에서는 어쩌면 고민 안 해도 되는 영역이니까요. 또, 변화하지 않아도 기회가 여성보다 많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주류 연극만 키우는 게 아니라 그 저변의 것도 같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여성 리더들을 더 많이 배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자리에 여성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성화
오늘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명확해지는 순간들을 경험했습니다. 태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한 번 해볼 만 하겠다 싶은 것 까지도 많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에 관해 웹진 연극in에서도 잊지 않고 기록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웹진에서 하기 어려운 건 다양한 매체에서도 다뤄주실 수 있으니, 연극in에서는 그런 담론들과 활동들을 폭넓게 연결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미투, 미투 이후 1년,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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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름

강보름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연출가
연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우리가 고아였을 때>,<모던걸타임즈> 등이 있다.
rkdekdzhd@hanmail.net
제163호   2019-07-1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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