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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연극에서 미학적 도전까지
[대학로 연대기] ②한국연극과 에로티시즘 - 下

이진아_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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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연대기

불좀꺼주세요
  • 1990년대 초 연극평론가 이영미는 노출의 수위 문제에 대해 점점 관대해지는 한국사회에 대해 다소 풍자적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70년대 말 <에쿠우스>에서 기본 의상만 입은 남녀의 성교장면을, 80년대 중반 <불가불가>에서 여자의 벗은 상체 뒷모습을, 그리고 드디어 90년대 초 <스티밍-욕탕의 여인들>에서 여배우의 벗은 가슴을 정면으로 보여주었고, <불 좀 꺼주세요>가 그 뒤를 이으면서 이제 가슴 노출은 보편화 추세에 있다. 그러나 <불의 가면>은 여배우의 거의 완전한 나체와 남자의 완전한 나체를 모두 정면으로 보여주었고 거의 실연에 가까운 성교 장면 등으로 현대 영화의 노출 수준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그의 풍자적 비판의 초점이 진지한 연극들이 보여주는 상업극 못지않은 노출 수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미치는 영향, 파급 효과에 있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항상 벗기는 것을 선도하는 것은 뒷골목 연극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벗기는 필연성을 충분히 설정하고 외설이라고 두들겨 맞지 않을 정도로 작품답게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는 유명 극단, 유명 연출가들의 작품에서이며, 자신 없는 뒷골목 연극은 그 뒤를 따라가는 법이니까”

    예술이냐 외설이냐, 그 기준은?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 철학적 이론적 뒷받침을 해 준 것은 조금 엉뚱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유행처럼 연극계를 풍미하면서 ‘기존 윤리관과 도덕관에 대한 도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 허물기’라는 기치 아래 이를 통속화한 작품들, 특히 성적인 주제나 자극적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2월호 [한국연극]의 (소비문화화한 연극)이라는 글에서 연극평론가 한상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잘못된 가세로 인해 뒷골목 연극이라는 말이 생겼다면서, “이 용어는 미숙한 젊은 연극인들이 만드는,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연극 내용 면에서 기존 가치를 과감하게 ‘해체’시킨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연극을 뜻한다.”라며, “미적, 도적적, 윤리적 제 가치의 일탈과 몰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정신인양 오해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려 해도 결국 “성의 상업적 착취”이자 “배우의 몸을 이용하기”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제 사회는 노출 그 자체보다는 그것의 정당성과 개연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작품 속 배우의 벗은 몸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문제를 가르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쟁해 볼 기회를 제공한 것은 1993년 7월 공연된 <불의 가면- 권력의 형식>(이윤택 작, 채윤일 연출)이다. 결론적으로, 노출의 정당성이란 측면에 있어 당시 평단은 <불의 가면>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이런 광기와 부도덕과 횡음은 바람직한 극문학의 소재일 수 없으며, 여자를 발가벗겨 관객 앞에 노출시키고 눈앞에서 격한 성행위를 하고 남자의 성기를 무대에서 보여주는 행위를 다만 충격적인 무대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이 꼭 필요했거나 극의 효과를 증대시켰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한상철

    ‘문민시대에 그려보는 독재의 초상화’, 이 거창하고 의미심장한 문구는 한 연극 포스터에 새겨진 선전 문구다. 그러나 이 짧고도 유의미한 문구는 포스터의 여배우 나체 그림만큼이나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 이상우

    작품 자체가 상징과 비유로 점철되어 있는 마당에 유독 성적 행위들만이 직접적으로, 노골적으로 실연되는 것은 극적 타당성을 얻기 힘들다. - 김미도

  • 불의 가면
    독재자의 초상화를 그린<불의가면>
    [출처]동아일보 1993년 06월 25일
     
    <불의 가면>이 특히 비난을 받은 이유는 작품이 결과적으로 대중의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호기심과 영합하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맨 30-50대 중장년 남성들이 공연 한 두 시간 전부터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고 객석을 가득 메우는 진풍경은 결국 우리 연극이 그들의 포르노적 욕망과 결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성적 묘사가 작품 전체의 의도 속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면, “다분히 속물적 호기심을 가지고 모인 관객들에게 그들이 본래 기대했던 대로의 자극과 흥분을 안겨주는 것에 그친다면 이 연극은 얄팍한 상업주의와의 타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미도)라는 비판을 이 연극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불의 가면>이 진지한 의도를 가진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목적을 가진 관객들로 연일 객석을 가득 채우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소비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우리 사회의 이중적이고 관음증적 성 문화의 현실 속에서 소위 ‘작품의 의도’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에로티시즘과 크로스오버한 포스트모더니즘

    노출 수위가 강한 연극에 중장년 남성 관객이 모이는 현상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된다. 그 중 가장 기이한 현상은, 20세기의 가장 난해한 작가 중 한 명인 하이네 뮐러의 <햄릿 머신>(채승훈 연출)에 쏟아진 남성 관객들의 폭발적 관심이다. 1993년 성좌소극장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코러스 역할을 맡은 수 명의 남성배우가 성기를 포함하여 전라를 노출하였고 오필리어를 맡은 여성배우 또한 노출 연기를 하였다. 독문학자 송동준은 1993년 9월호 [한국연극]에서 “여러 모로 난해한 뮐러의 작품이, 그것도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햄릿 기계>가 우리나라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연일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감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불의 가면>과 마찬가지로 <햄릿 머신>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

  • 햄릿머신
     
    그러나 <불의 가면>과는 달리 <햄릿 머신>은 미학적 타당성과 의미상의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같은 글에서 송동준은 “본 공연에서 무엇보다 과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에로티시즘의 최대 활용이다. 오펠리아(윤복인 분)의 여체와 율동은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웠고 감동적 효과를 낳았다. 이것은 그녀의 죽음과 대비되어 더욱 효과가 컸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예술은 사회적 통념과 타부를 깨는데 기여해야 하는 사회적 기능이 있는데, 이 연극의 에로티시즘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 말한다. 연극평론가 이미원 역시 “이번 채승훈의 <햄릿 머신>은 원작의 핵심이라 할 ‘경악의 미학’을 우리 극계 수준에서 기존의 어느 공연보다 철저하게 실험했다는 점에서 우선 높이 평가된다.”고 말하며, “최근 일련의 에로티시즘 시비는 단지 우연하게도 이 ‘골치 아프고 까다로운’ 실험을 상업적으로 흥행이 가능하게 만든 아이러니일 뿐이다. 이번 공연을 보고 그 누가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있겠는가? 대담한 누드는 오히려 불쾌감과 잔혹함을 증가시키는 오브제이며, 나아가서 이러한 육체의 반란이 끝도 없는 관념적인 대사를 효과적으로 감각화시킨다 하겠다”라고 평가한다. <햄릿 머신>이 ‘우연하게’ 가져온 대중적 홍보 효과와 관객의 관심은 <불의 가면>의 대중적 성공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성문화와 성윤리의 수준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었지만, 작품의 미학적 논리적 자기완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단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 거짓말
     
    노출과 성적 표현 그 자체에 집착하던 우리 사회의 시각은 199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성숙된다. 구성애의 ‘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를 둘러싼 성의 공론화 및 청소년의 성에 대한 논쟁, 장선우의 영화 <거짓말>의 외설 시비 및 등급보류 판정을 둘러싼 논쟁, 서갑숙의 자서전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여주인공이고 싶다』가 가져온 여성계와 문화비평계의 논쟁 등을 거치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의 문제, 성 제도 및 성의 공론화 문제, 한국사회의 이중적 성도덕에 대한 문제 등을 공공연하게 논하며 성과 에로티시즘의 문제에 대하여 성숙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연극도 1990년대 후반이 되면 더 이상 성적 소재 그 자체나 노출 수위에 대한 원초적 관심을 드러내면서 소비하지는 않게 된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연극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동성애 간의 성, 어린이의 성 등 그 동안 소외되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성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시도하면서 한층 성숙된 태도로 성과 에로티시즘을 다루는 작품을 창작한다. 물론 작품의 의도가 항상 대중의 욕망을 이기는 것은 아니며, 또 좋은 의도만으로 엉뚱한 성취와 의도치 않은 부정적 효과가 변호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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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이진아, 에로티시즘, 불좀꺼주세요, 불의가면, 햄릿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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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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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15호   2013-01-03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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