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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걸판은 2005년 3월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하자!”, “우리의 공연이 필요하면 어디든 간다!”라는 두 가지 모토를 가지고 경기도 안산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어디든’ 돌아다녔다. 1톤 트럭 위에서도, 비닐하우스 안에서도, 어느 공장 직원식당에서도 공연했다. 창단 초기에 가장 ‘의미’ 있게 다루었던 주제는 안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우리의 주변이었다. 안산은 많은 노동자가 사는 도시다. 안산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사람들도 있지만, 명절이 되면 거리가 한산해지는, 일을 찾아서 모여든 사람들이 제2의 고향으로 정착한 동네다. 전국 각지에서, 해외에서, 이곳 안산으로 이주해 와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많다.

걸판을 창단했을 때, 함께 쓰던 연습실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노래를 부르러, 풍물을 치러 모이곤 했다. 그리고 변변한 월급이 없는 우리를 걱정하여 늘 밥 사주고 술 사주는 노동자 언니 오빠들이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고충을 겪는지, 노동조합이 무엇을 가지고 회사와 싸우고 있는지, 이런 모순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술자리가 깊어갈수록 이야기도 깊어갔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로 연극을 만들었다. 그들이 나간다는 집회의 작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그들이 모인다는 전국규모 행사의 커다란 무대 위에서 핀 마이크를 붙이고 연극을 했다.

창단멤버 중에는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사람이 없었다. 유명한 희곡 작품으로 공연을 만들 생각보다는, 어제 우리가 들은 이야기로 대본을 새로 쓰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늘 창작하고 또 창작하며 거리를 누볐다. 소문이 나서였는지, 많은 의뢰가 들어왔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걸판이 연극으로 대신 소리쳐 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창단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주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전국에서 받은 관심이 오히려 안산에서 자리 잡는 데 힘이 되었다.

<한 번만 좀 때려볼 수 있다면>

2009년, 안산의 한 시민단체가 안산교육청과 함께 운영하는 교육 공연을 걸판이 맡게 되었다. ‘안산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단체였다. 그때부터 걸판은 안산에 있는 초등학교들을 돌아다니며 1, 2, 3학년 학생들 앞에서 <정직이의 하루>, <타코타코와 좋은 친구들>, <키득키득 책가방 속 이야기>라는 교육토론극을 공연했다. 8년간 서른여덟 개 학교를 돌아다니며 153회나 공연했다. 아침마다 어린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하며 연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채워주었다. 그러니 그 단체가 문을 닫기 전까지 꼬박 8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 작업을 하면서 사실 몇 번은 좌절하기도 했다. 담임선생님들은 첫 장면이 시작되면 몇 장의 사진만 찍어 기록으로 남긴 후, 삼삼오오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선생님들이 볼만한 공연은 아니라는 판단이었을 거다. 대부분의 아이는 환호했지만, 간혹 “(동물 옷을 입고 연기하는 30대 중반의 배우에게) 나이 먹고 그러는 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런 거 하면 얼마 벌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는 차마 진실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하나의 목표가 생겨났다. ‘선생님들이 봐도 재밌는 작품을 만들자!’ 그래서 단원들과 긴 토론을 거쳐 세 번째 작품 <키득키득 책가방 속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다.

첫 공연을 하던 날, 내심 떨리던 기분을 잊지 못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언제나처럼 선생님들이 사진을 찍고 뒤돌아 나갔다. 잠시 후, 선생님들은 긴 의자를 함께 들고 공연장소로 돌아왔다. 맨 뒤에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자주 웃으면서 말이다. 그 날, 그 아침, 네 분의 선생님들의 흐뭇한 뒷모습에서 약간의 해답을 얻었던 것 같다.

<세계로 가는 기차>

꽤 오랫동안 해온 순회공연이 하나 더 있는데, 2012년부터 ‘통일교육원’이 주최하는 전국 청소년 통일 캠프에서 지금까지 155회 공연한 <세계로 가는 기차>라는 마당극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회당 10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니, 이 작품으로 만난 청소년이 만 오천 명이 넘는다. 이런 공연 활동들을 통해 어린이청소년들과 늘 만나는 극단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어린이청소년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 해 한 해 다르게 성장해나가는 어린이청소년들을 만나며 우리의 공연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생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걸판의 단원은, 연극은 어린이청소년들과 함께 성장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걸판이 13년째 연극을 해오면서 인상 깊은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만 소개하자면, <열혈여자열전>이라는 마당극을 가지고 당진에서 열린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문화제에 공연을 갔던 날이다. 마당극을 대극장 무대에 올려놓고, 관객들은 쿠션이 심하게 채워진 커다란 의자에 기대어 앉아 관람하다 보니, 마당극 특유의 관객과의 상호작용은 잘 느낄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어긋나는 호흡 때문에 공연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가 꽤 한참을 다투고 있었는데, 누군가 분장실 문을 10센티미터쯤 열고 “저기......”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행사 관계자가 찾아온 줄 알고, 문을 열어드렸을 때, 체구가 아주 작은 아주머니 한 분이 삐죽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접어서 내미셨다. “가는 길에 캔커피라도 사 드세요.”하시기에, 우린 한사코 사양하며 고맙다는 말씀만 드렸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내가 노동자라서 그래요.”하시더니 나의 손에 만 원을 쥐어주시고는 서둘러 달려가시는 게 아닌가. 당시의 대표님이 만 원을 들고 뒤따라 달려갔고, 우리는 잠시 후 사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느 건물에서 청소하는 분이었고, 이런 행사가 있다고 해서 중학생인 딸과 함께 보러왔는데, 처음으로 딸이랑 좋은 연극을 봐서 너무 기뻐서 그러니 꼭 받아달라고 하셨단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시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일하며 사는 어머니가 딸과 함께 하는 그 소중한 시간에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었으면서, 오늘 호흡이 어땠느니, 관객석이 멀어서 힘들었다느니, 너 아까 왜 연습한 대로 연기 안 했느냐니, 그런 말로 싸우고 있었던 우리가. 그게 연극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중학생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아이들과

그러고 보면 안산 초등학교 순회공연이나, 청소년 통일 캠프 순회공연이나, 당진에서의 경험 모두 공통점이 있다. 청소년들이 공연을 관람하는 기회가 어떻게 제공되는가 하는 점이다. 청소년이 스스로 선택하여 혼자 관람하러 다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앞에 말한 세 경우 모두 선생님이나, 주최 측이나, 부모님이 선택하여 관람의 기회에 노출되고 있다. 어른이 선택한 공연이 다루는 세계를, 어른들의 연출과 연기를 통해 접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런 방식으로만 어린이청소년들이 연극에 노출된다면, 연극을 만드는 어른들의 고민이 더 깊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선택할 만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볼 만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나와 걸판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물론, 시대는 바뀌고 우리도 성장할 것이므로 몇 년이 지나면 또 다른 결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어느 대형마트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전용 극장의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오전에 하는 연극프로그램에 어린이들만 들여보내 놓고 엄마들은 그 앞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교육 정보를 교환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정말 ‘교육적’인 것일까 고민이 들었다. 그렇다면 부모님들은 왜 어린이만 공연장에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일생에 한 번이라도, 가족과 함께 나란히 앉아 연극을 보는 강력한 경험을 해보길 추천한다.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배우의 말, 몸짓, 장면에 관해 얘기해보면 어떨까? 두고두고 떠오르는 장면을 혼자서 SNS에 남기는 것도 좋겠지만, 함께 보았던 엄마에게 누나에게 “그 장면 기억나?”, “그 노래 멜로디가 뭐였지?”하며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연극이 정말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가장 첫 번째 사회인 가족들과 그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함께 할 기회를 연극인들이 만들어내야만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과 고민이 깊어질 무렵, 우리는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신작 개막을 보름 앞두고서, 우리는 연습을 한동안 할 수 없어 접어버리기도 했었다. 고백하자면 한동안 슬픔을 극복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빠르게 빠르게 세월호 참사에 관한 연극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을 피해 숨어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굳게 결심을 했다. 안산의 사람들이 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작품, 어린이청소년들이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고 말이다.

2014년에 시범적으로 활동했던 어린이극단 ‘별꼴’.
올해 가을, 어린이음악극단 ‘별꼴’을 창단해 함께 꾸려나갈 예정

창단 초기, 전공과도 상관없는 연극을 하겠다고 모인 걸판들에게 밥 사고 술 사던 언니오빠들은 가정을 꾸려나갔다. 아이가 생겼고 나날이 커나갔다. 학부모가 된 오빠도 있고, 벌써 셋째를 낳은 언니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꿈도 생겼다. 이 고마운 사람들의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이 아이들과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들겠다는 꿈. 그래서 한동안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다섯 살 난 아이를 둔 엄마가, 아이랑 같이 볼 수 있는 뮤지컬을 만들어보려고요.”

타겟팅이 모호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맞다, 합리적인 우려다. 하지만 되든 안 되든 해보고 싶었다. 마음 맞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무조건 시도해보았고, 안산문화재단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나 ‘우려는 되지만 하고픈 것 해보세요.’라는 답을 듣고 뮤지컬 <앤ANNE>, <어중씨 이야기>를 만들어보았다. ‘앤’은 11살짜리 고아 여자아이고, ‘어중씨’는 어느 날 어중간해 져버린 시인이다. 두 작품 다 인간의 성장과 관계를 다루고 있는 성장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창작했다.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것이고, 누구나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겪고 있거나, 그 시절을 겪었기에 지금이 있으므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공감가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어린이청소년극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우린 남녀노소가 다 같이 보는 극을 지향합니다.’라는 결론으로 비추어질까 봐 살짝 두렵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것, 그것이 어린이청소년극을 대하는 걸판의 입장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또한, 이런 과정과 경험을 살려, 고민을 거쳐 만들었다는 작품이 과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앞으로도 계속 시도할 계획이라는 것뿐이다. 가끔 그 밥 사고 술 사던 언니오빠에게서 “어제 우리 아들이 ‘저 길모퉁이’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더라. 그래서 나도 같이 흥얼거렸어.” 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뿐이다.

[사진: 극단 걸판 제공]

태그 아동청소년극, 극단 걸판, 최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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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최현미 극단 걸판 대표
극단 걸판 창단멤버. 2012년부터 대표직을 맡아 배우, 작가, 연출을 겸하고 있다. 극단 걸판의 뮤지컬 <앤ANNE>, <어중씨 이야기>, 연극 <페스트>, <늙은 소년들의 왕국>, <분노의 포도>,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켜줄 거야 친구야>, <그와 그녀의 옷장> 등에 출연했고, 연희단거리패 등에서 연극 <수업>, <낙타풀>, <한 밤의 천막극장> 등에 출연했다. 극단 걸판의 뮤지컬 <앤ANNE>, <춤추는 헬렌켈러> 쓰고 연출했다.
www.facebook.com/gulpanzine
제118호   2017-06-22   덧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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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존경스럽고, 감사합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있습니다ㅎ 걸판 화이팅!!

2017-06-22댓글쓰기 댓글삭제

지나가던
반성 하게 되는 글이네요 ㅠㅠ... 앞으로도 힘 써주세요!

2017-06-23댓글쓰기 댓글삭제

지나가는행인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작, 연출, 배우 최현미 대표님!! 존경합니다!!

2017-06-24댓글쓰기 댓글삭제

lucill
누군가는 자신없고 용기없어서 가지 못한 길을
굳건히 가고 계신 이를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2017-06-24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