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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전] 삼일로 창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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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로 창고극장
  • 지금의 명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쇼핑’, ‘외국인 관광객’ 같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명동의 이미지들은 불과 몇 년, 길게 보아도 10년도 채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명동은 문화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예술가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 60년대 이후부터 지금의 대학로 연극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남산드라마센터, 엘칸토 소극장, 국립극장 그리고 실험극의 메카 삼일로 창고극장이 있는 명동이 연극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대학로 연극시대를 열기 전, 연극의 중심지였던 명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극장이 있다. 바로 삼일로 창고극장이다. 물론 남산예술센터와 전 국립극장을 다시 복원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이 함께하고 있지만 삼일로 창고극장은 두 극장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일로 창고극장은 1975년에 개관, 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내 최장수 소극장이다. 당시 젊은 연극인들의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이자는 취지로 문을 연 극장은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연극인들과 관객 모두에게 해방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한국 연극사에서 보면 프로듀서 시스템 도입, 일극단 일극장주의 실현 등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과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삼일로 창고극장의 지난 시간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재정난으로 개관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문을 닫은 이후에도, 계속된 재정난 속에서 공연법 개정으로 극장을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오기도 했었고, 서울시의 공원화 계획으로 존폐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연극 애호가나 연극계의 노력과 도움 등으로 위기를 넘기며 삼일로 창고극장은 지난 37년간 같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힘은 극장이 품었던 수많은 예술가들 그리고 극장이 묵묵히 걸어온 길 때문일 것이다. 사실주의극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다양한 실험극을 올릴 수 있는 장을 제공했던 극장은 한국연극계의 대들보와 같은 오태석, 정진수 등 수많은 연출가와 박정자, 명계남, 최종원 등 묵직한 배우들이 거쳐 간 곳이다. 배우 추송웅의 이름을 널리 알린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으로 4개월 만에 6만여 관객을 동원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모노드라마 붐을 이끌기도 했다.

    삼일로 창고극장의 무대는 과거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2001년 부조리 연극 시리즈로 시작한 오프대학로페스티벌은 대학로의 상업화된 공연에서 벗어나 연극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어 2010년 9회까지 삼일로 창고극장 주최로 진행되었다. 그 밖에도 ‘창고극장 몸짓전’ ‘창고극장 단막전’ 등의 기획공연을 선보이며 실험극장으로써의 활동을 이어왔다. 연극뿐 아니라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쥬크박스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의 젊고 실험적인 예술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고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전을 계속해왔다. 2004년에는 소극장 위층에 갤러리를 열고 당시 국내에 많지 않았던 드로잉 전용 갤러리로 시작했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적 상상 만들어내는 공연 시도와 함께 실제 공연으로 제작하는 등 장르를 넘나들며 젊고 열정적인 예술인들의 새로운 시도를 담으려 노력해왔다. (지금은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70년대 어느 작은 골목길을 연상하게 하는 극장 입구를 지나면 작은 의자들과 시멘트 계단이 정겹게 반긴다. 옥상공간을 개조해 만든 창고카페는 관객들의 대기공간이자 모두의 쉼터로 버려진 공간 없이 촘촘하다. 106석의 극장 객석은 지난해 11월 재개관을 하면서 새로 단장해 깔끔하다. 극장의 나이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지만 연극인들의 손때가 묻은 극장은 크고 편리한 극장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 삼일로창고극장 입구
    삼일로창고극장 입구
  • 극장내부
    극장내부
  • 소극장인 삼일로 창고극장의 고단한 여정은 최근까지 계속되어 왔었다. 2011년 봄, 삼일로 창고극장 정대경 대표는 폐관일자를 정하고 극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연극인들과 관할구청 직원들, 기업 등에서 힘을 모아 주었다. 후윈회가 만들어지고, 구청 직원들이 창고극장의 연회원으로 가입해 전달한 후원금, 그리고 기업의 기부금과 3년간의 지원 약속 등으로 폐관의 위기를 넘기고 지난해 8월 3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했다.

    2012년 10월 현재, 삼일로 창고극장은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울 속 미래유산 1000선’의 후보에 올라가 있다. 1년 후인 내년 9월경에 확정된다고 한다. 과거를 함께해왔고, 지금을 함께하고 있으며, 계속 함께 해야 할 삼일로 창고극장.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젊은 예술가들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무대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즐길거리
    명동에 수많은 즐길거리를 뒤로하고, 극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 극장 마당(?)에 놓여있는 작은 벤치나 창고카페를 추천한다.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명동성당 뒤편 광장을 추천한다. 큰 나무들과 벤치 그리고 산책로 같이 조성해놓아 잠깐의 여유와 휴식을 선사할 것이다.

[사진제공] 삼일로 창고극장

삼일로 창고극장
삼일로 창고극장
  • 삼일로 창고극장은 1970년대 소극장 운동의 열정과 정신이 녹아있는 곳이자 한국연극 처음으로 일극단일극장주의(一劇團一劇場主意)를 실현해 낸 장소로, 70년대 한국소극장 운동을 기념할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곳이다. 삼일로 창고극장은 실험극장운동을 폈던 극단 에저또의 방태수 대표가 1975년 삼일로에 위치한 어느 가정집을 인수해 극장으로 개조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후 1년 만에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을 정신과 의사인 유석진의 후원과 연출가 이원경의 노력으로 '삼일로 창고극장'이라는 이름하에 1976년 4월 재개관했다.

    개관 기념으로 공연된 이오네스코 작, 김정옥 연출의 <대머리 여가수>(극단 자유)를 시작으로 하여, 오태석의 <약장사>, <춘풍의 처>, 정복근의 <여우>, 이강백의 <결혼>,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 등이 이곳에서 초연되었으며, 해금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도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또 이원경, 김정옥, 유덕형, 강영걸, 추송웅, 유진규, 한태숙 등 이제는 대가의 반열에 드는 수많은 연극인들이 이곳에서 작업했다.

    당시 소극장 존속을 어렵게 하던 공연법에 의하여 삼일로 창고극장은 개관 다음해부터 내내 폐관의 위기에 시달렸다. 그 후 공연법은 고쳐졌지만 계속되는 운영난으로 인하여 결국 1983년 삼일로 창고극장은 폐관한다. 이후 극단 로얄씨어터, 한국희곡작가협회, 극단 창작마을 등 여러 번 소유주를 바꾸며 폐관과 개관을 반복하다가, 2003년부터 연극음악을 하는 정대경 대표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진아 (본지 편집위원 /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태그 삼일로창고극장, 오프대학로페스티벌, 창고극장 몸짓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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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진

주소진 자유기고가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극단사다리에서 기획을 했으며,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웹진 기획·운영을 담당했다. 현재는 건강과 힐링에 집중하고 있다.
funkyiju@naver.com
웹진 10호   2012-10-18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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