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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늘로 뛰어오르지 않았다
[색色다른시선] <이(爾)> vs <왕의 남자>

김소연_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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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태웅 작가
  •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연극 <이(爾)>(김태웅 작 연출)는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구절, 한 우인優人이 늙은 선비 놀이를 하던 중 논어의 대목을 인용해 군주의 덕목을 읊다가 연산에게 밉보여 극형을 당했다는 구절에서 착상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상상은 연산이 광대놀이를 즐겼고, 한 광대를 특히 총애 아니 사랑했고, 그 광대는 왕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자신과 동료인 또 다른 광대의 사랑을 놓을 수 없었다는 데에 이른다. 연산, 연산이 사랑한 공길, 공길을 사랑하는 장생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익히 알고 있는 녹수가 등장한다. 이 네 인물의 갈등이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연극 <이(爾)>에는 두 개의 삼각 멜로가 중첩되어 있다. 연산을 정점으로 녹수와 공길이 벌려 서 있고, 공길을 정점으로 연산과 장생이 벌려 서 있다.

    포스터
    (왼쪽부터) 2000년에 초연된 연극 <이(爾)>/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2006년 재공연 된 연극 <이(爾)>
     

  • 두 개의 삼각형이 겹친 멜로드라마?
왕의 남자 엔딩장면
영화 <왕의 남자> 엔딩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
  • 그러나 연극 <이(爾)>의 중첩된 삼각관계는 원작보다 영화 <왕의 남자>가 더 명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권력의 최고 정점인 왕과 가장 비천한 신분인 광대의 사랑, ‘비역질’이라는 세상의 금기에 도전하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멜로드라마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와 금기가 가혹할수록 그만큼 세상의 어떠한 장애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는 더욱 부풀어 오른다. 영화의 엔딩 씬, 장님이 된 장생이 공길과 함께 줄타기 놀이를 벌이다가 푸른 창공으로 훌쩍 뛰어오르면서 정지되는 미장센은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욕망을 명료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반면 연극은 멜로드라마의 판타지로 직진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공길은 ‘왕의 남자’가 아니라 ‘이(爾)’이다. 연극의 제목인 ‘이(爾)’는 임금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로, 연산과 공길의 특별한 관계를 말한다. 그렇다 한들, ‘왕’과 ‘남자’를 그대로 연결시키면서 오는 긴장과 달리 왕과 신하라는 관계는 그대로 남는다. ‘왕의 남자’와 ‘이(爾)’의 간극은 공길과 연산이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공길과 장생 패거리의 놀이판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궁중에 들어오는 과정이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드디어 공길과 장생이 궁중에 들어오게 되고, 공길은 한 밤 중 왕의 처소에 불려나간다. 지엄한 존재인 왕 앞에서 비천한 광대로 벌벌 떨고 있던 공길이 왕과 광대를 벗고 만나는 것은 연산의 ‘눈물’ 때문이다. 연산의 눈물을 닦아 주는 공길의 떨리는 손은 왕이라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어찌 할 수 없는 연민에 더 가깝다.

    연극에서는 공길과 장생의 전사前史가 없다. 또 연산이 공길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그려내는 장면도 없다. 연극은 (대규모 숙청이 있었던 갑자사화 직후)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한삼을 태우고 녹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연산과 공길의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어떤 떨림도 없다. 무대가 밝혀지기 전 어둠 속에 들려오는 것은 허공을 가르면서 매섭게 내리치는 소리. 공길이 눈을 가린 채 연산으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사도-마조의 상황이다. 그리고 무대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를 낳고 있는 녹수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이 둘의 사랑은 권력을 뛰어넘는 초월의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의 권력은 더 적나라한 민낯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사실 고통스러운 것은 맞고 있는 공길이 아니라 매질을 하고 있는 연산이다. 연산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의 심연은 위로할 수도 위로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연극 <이(爾)>
    연극 <이(爾)>, 연산 : 김내하 / 녹수 : 진경 [출처] 김태웅 희곡집1 이(爾), 평민사, 2010년.
     

  • ‘이(爾)’와 ‘왕의 남자’, 공길과 공길의 간극

    아비의 권력으로 어머니를 죽인 아비를 부정하는 ‘문제적 인간 연산’(이 말은 연산을 다룬 이윤택 작품의 제목이다)은 이미 많은 작품들에서 다루어왔던 것으로 이 작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녹수 역시 연산의 아비에 대한 지향과 부정이 동시에 투영되는 존재다. 하여 연극과 영화의 변주는 ‘이(爾)’와 ‘왕의 남자’로 변주되는 공길에게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공길역 배우 이준기
영화 <왕의 남자>에서 공길
역을 맡은 배우 이준기
[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
  • 신예인 이준기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왕의 남자>의 공길은 그 매력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의 매혹은 텅 빈 존재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는 무엇에도 저항하지 않으며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다. 공길과 장생이 놀이패를 떠나게 되는 사건, 양반의 방에 들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공길은 그저 묵묵히 그것을 따른다. 공길이 양반의 방을 뛰쳐나오는 것은 장생의 손에 의해서이고, 놀이패를 떠난 이들이 시장판에서 놀이를 벌이는 것이나 궁에서 놀이를 벌이라는 처선의 제안에 응하는 것 모두 장생의 선택이다. 공길은 장생의 남자로 그저 ‘있다.’ 반면 <이(邇)>의 공길은 선택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이(爾)>의 공길은 그저 연산의 ‘위로하는 인물’이지만은 않다. 공길은 기꺼이 연산의 사랑을 갈구 하고 녹수와 대결을 벌인다. 공길은 광대패와 놀이판을 주관하는 희락원의 장인 대봉으로서 함께 궁에 들어왔지만 밖으로만 도는 장생에게 위기가 오면 그 위기에서 장생을 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들보다 ‘이(邇)’와 ‘왕의 남자’를 가르는 더 중요한 차이는 더 중요한 차이는 두 작품에서 놀이판이 놓여 있는 자리이다. <왕의 남자>와 <이(爾)>에서는 모두 놀이판이 권력투쟁의 한 복판에 있다. 그런데 권력투쟁의 한 복판에서 놀이판이 전개되는 동력은 사뭇 다르다. <왕의 남자>에서 공길과 장생의 놀이패가 궁에 들어오는 것은 왕의 정치적 조력자인 처선에 의해서이다. 처선은 놀이패를 끌어들여 왕의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타격을 가한다. 거기에 더해 처선이 건넨 경극 대본으로 만든 공길과 장생의 경극은 (폐모사건의 보복으로 그려지고 있는) 갑자사화의 발화점으로 그려진다. <왕의 남자>에서 놀이패는 권력투쟁의 한 복판에 있지만 그들은 그저 놀이판의 연희자일 뿐 이 놀이판이 권력투쟁의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무지하며 무심하다.

    <이(邇)>의 놀이판도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있다. 그러나 <이(邇)>에서의 권력투쟁은 광대인 나는 알 수 없는 저들의 일이 아니다. 놀이판은 바로 공길 자신의 권력투쟁의 장소다. 공길은, 영화에서의 처선처럼, 놀이판이 왕을 정점으로 한 권력투쟁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있을 뿐더러 그것을 통해 현실의 힘을 추구한다. 공길의 놀이판에서는 뜨르르한 재상들의 비리와 비위가 웃음거리가 되고, 웃음은 놀이판을 넘어 현실의 권력투쟁에 힘을 미친다. 더불어 <이(邇)>에서 공길과 장생의 갈등은 연산과의 삼각관계에서라기보다는, 바로 이 권력투쟁의 한 복판에 놓여 있는 ‘놀이’를 두고 벌이는 갈등이다. 공길은 ‘놀이’로 현실의 힘을 얻으려고 하고, 장생은 “술 한 잔에 값싼 웃음”을 팔지언정 거침없는 삶을 원한다. 그리고 장생은 반정에 가담한다.

    이, 왕의 남자
    연극 <이(爾)>, 공길 : 김호영 / 장생 : 이승훈
    [출처] 김태웅 희곡집1 이(爾), 평민사, 2010년.
    영화 <왕의 남자>, 연산 : 정진영 / 장생 : 감우성
    [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
     

    죽음 앞에서 벌이는 놀이


    다시 작가의 착상. 한 우인優人이 늙은 선비 놀이를 하던 중 논어의 대목을 인용해 군주의 덕목을 읊다가 연산에게 밉보여 극형을 당했다는 『연산군일기』의 한 구절. 놀이는 웃음이고 삶의 활기이다. 그런데 놀이로 광대는 극형을 당한다. 우리에게 웃음은 여흥일지 모르지만, 광대에게 웃음은 존재를 건 행위다.

    <이(邇)>에서는 소학지희笑謔之戱가 두 번 연행된다. 규식지희規式之戱가 곡예를 노는 것이라면 소학지희는 가면이나 인형을 빌지 않고 노래 없이 재담으로 전개되는 연희이다. 물론 연극의 전개에서 두 번의 소학지희는 연산을 정점에 둔 녹수와 공길의 대립에서 구체적인, 현실적 힘으로 작동한다. 그렇다하더라도 공연에서 이 두 번의 소학지희는 상당한 비중으로 질펀하게 연출된다. 연산을 정점으로 한 권력투쟁이 치달아가는 중간, 갑자기 벌어지는 질펀한 놀이판은 드라마의 전개를 넘어 그 자체로 광대의 존재를 웅변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연산에 의해 눈이 뽑힌 장생은 처형을 앞두고 연산 앞에서 공길과 함께 마지막으로 봉사놀이를 벌인다. 죽음 앞에서 벌이는 웃음. 작가의 착상은 이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는지.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을 창공을 향해 뛰어오른 두 사람의 정지 화면에 이어지는 에필로그처럼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봉사놀이는 삶도 죽음도 초월한 장면인 것이다.


    세 번의 또 다른 무대

    개인적 관극 경험을 덧붙이자면, 나는 <이(邇)>를 일정한 시차를 두고 세 번 관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작품에 대한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2000년 처음 이 공연을 보았을 때는 권력과 예술의 대립이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 예술이 권력 앞에서 저렇게 치열하게 갈등했었던가 라는 우리 예술계에 대한 삐딱한 시선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왕의 남자> 개봉 당시 다시 막을 올린 무대에서는 예술가의 자의식 과잉이라 치부할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작품의 변화라기보다는 당시의 정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미FTA 협상이 시작될 것임이 발표되고 그 준비로 ‘스크린쿼터 폐지’가 발표되면서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예술계의 반발이 컸던 현실과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는 2009년 한국공연예술센터 개관기념 공연이었다. 권력과 예술에 대한 성찰이라는 깊이 있는 문제의식, 전형적인 비극적 인물과 사건의 전개, 그러면서도 ‘소학지희’의 연희양식을 플롯에서나 무대연출에서나 적절하게 결합시키면서 중극장연극의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점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연에 앞서 있었던 개관기념식에 참석한 유인촌 장관이 객석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참 문화예술기관장 인사와 관련하여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가 아닌가. 과연 그는 장생의 분노와 공길의 갈등을 어떻게 지켜보았을지 공연을 보는 내내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도 자못 궁금하다. 아무튼 <이(邇)>가 무대에 다시 오르고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이 연극이 겹이 많은 연극이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시간 앞에서 소멸하고 다시 고쳐 써야 하는 현장예술의 연약함이자 힘 때문이 아니겠는가.

태그 연극 <이(爾)>, 영화<왕의남자>, 김태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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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을 보고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웹진 22호   2013-04-18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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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남자
영화 <왕의 남자> 연산은 정진영입니다. 정재영은 엄연히 다른 배우입니다...수정해주세요.

2013-05-09댓글쓰기 댓글삭제

편집부
안녕하세요. 연극in 편집부입니다. 편집부에서 자료사진에 캡션을 다는 중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드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2013-05-09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