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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넘어 체홉과 나란히 서다
[색色다른시선] 연극 <갈매기> vs 연극 <뻘>

박해성_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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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체홉을 더욱 특별하게 대할수록 당신은 더 보편적인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그의 속임수이자 그의 미스터리이다.” - 레프 도진(러시아 연출가)


  • 한국에서 셰익스피어만큼 신화화된 작가를 꼽자면 단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 일 것이다. 서양 연극이 우리에게 소개되기 시작할 때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치기도 했거니와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과 냉전으로 인해 소련의 문화를 직접 교류할 길이 막막했을 테니, 그야말로 실체는 본 바 없으나 대단하다는 소문만 무성한, “17대 1로 싸워서 전 세계 연극을 때려눕혔다는 형님”이 러시아 연극이고 체홉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근대 연극의 혁명이라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사실주의’가 태동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무대막에는 체홉의 <갈매기> 공연을 기념하는 갈매기가 그려져 있다더라하는 풍문에까지 이르면, 신화도 이런 신화가 없었을 것이다. 신화는 본래 장엄해야 하는지라 셰익스피어의 장엄한 비극처럼 체홉의 작품도 장엄한 비극으로 보였고, ‘연극을 책으로 배워서’ 만들어진 이런 신화와 무게감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련이 붕괴된 후 1990년대에 이르러 중역重譯이 아닌 직역直譯된 체홉 작품들이 나오고 러시아에서 직접 공부하신 분들이 말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체홉의 작품들이 알고 보니 희극이라더라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무엇이 웃긴 건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희극인데 비극이라더라, 비극인데 희극이라더라 등등, 다양한 체홉 다시 읽기가 시도된다. 이는 셰익스피어 희극을 한국에서 공연할 때 ‘희극이라니까 웃긴가보다’하는, 뭔가 미묘한 억지가 목구멍에 걸리지만 일단 넘기고 보게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해외공연의 국내 소개가 봇물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동구권 및 러시아산 사실주의 연극을 직접 목격하게 됐을 때, 그 신화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아, 책에서 봤던 그 얘기가 이 얘기였구나.’

<뻘> 초연 포스터
(2012년, 두산아트센터)
  • 체홉의 실체는 아주 섬세하고 잘 짜여진 ‘맥락’에 의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상황’의 연속이다. 희극성이건 비극성이건 이 섬세한 ‘맥락’ 위에서만 구현된다. 텍스트는 이 맥락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일 뿐, 텍스트 자체를 신화화한 접근으로 그 맥락을 억지 없이 번역해 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렇게 섬세하게 직조해낸 맥락과 상황을 통해서만 체홉이 관조했던 삶과 세계를 구현할 수 있었고, 우리는 연극을 글이 아닌 무대를 통해 직접 체험하고 나서야 체홉을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했듯 여전히 우리에겐 ‘체홉’이 지닌 모종의 무게감과 신화가 남아있다. 어쩌면 체홉이 사람들의 삶과 세계를 응시했던 바로 그 시선을 오롯이 복원하려면 오히려 그 신화를 남김없이 거둬내고 체홉과 나란히 서야 할 것이다. 그 작업을 한 이가 <뻘>로 <갈매기>를 다시 써낸 김은성 작가이다.

    체홉의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 <갈매기> 역시 무대 위에서는 아무런 극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하루하루는 객쩍게 흘러가고 그렇게 쌓여서 각자의 인생이 될 뿐이다. 왕년의 대 배우였던 아르까지나와 그녀의 연인이며 “괜찮긴 하지만 똘스또이나 뚜르게네프만은 못한” 작가인 뜨리고린이 작품 내내 호숫가에 머물면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시끌벅적하며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다. 아르까지나와 혐오와 동경, 혈육의 정과 질투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역설하는 아들, 열혈 예술청년 뜨레쁠레프 역시 하나마나한 소리로 콤플렉스만 드러낼 뿐이다. 그가 예술과 사랑, 사랑과 예술을 동시에 이뤄낼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는, 배우가 되고픈 꿈만 있는 니나는 오늘도 꿈만 꾸고 있다. 동네에서 평생 나른하게 살아온 산부인과 의사 도른은 동네의 이 모든 꼬락서니들을 다 지켜보면서도 어제도 오늘처럼 나른하다. 유부녀 뽈리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듯, 습관적으로 도른을 짝사랑한다. 그녀의 딸 마샤는 태어난 게 실수였다며 우울해하는 게 일상이지만, 똑같이 우울하되 입만 열면 뭔가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뱉어내는 뜨레쁠레프를 또 죽자고 짝사랑한다. 허나 이런 마샤를 짝사랑하는 건 찌질하고 소심한 속물, 교사 메드베젠꼬다.

    거의 대부분 등장인물의 ‘사랑의 작대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긋나고, 인물들 사이에 유의미한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긴, 그게 우리의 일상이며 삶 아니겠는가. 인생의 99.9%가 쓰잘데 없는 대화와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나마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0.1%는 항상 아직 오지 않았거나(1, 2, 3막), 이미 지나갔다(4막). 허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인물들은 웃자고 노는 중이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정색하고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그 어떠한 관념도, 역사도 결국은 한명 한명의 지리멸렬하고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가만 보면 이렇듯 희극처럼 하루하루가 스쳐 지나가며 ‘어제가 오늘 되고 오늘이 내일 되는’ 것이 삶이라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체홉이 집요하게 드러내고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응시일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 제작, 레프 도진 연출 <갈매기(2001)>의 한장면
    [출처] http://www.mdt-dodin.ru

    <로풍찬 유랑극단>(원작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달나라 연속극>(원작 유리동물원), <순우삼촌>(원작 바냐 아저씨) 등의 원작희곡을 정교하게 재창작해낸 김은성 작가의 전작들처럼, <뻘> 역시 ‘번안’의 억지스런 이음매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십대가수 호시절을 지나보낸 왕년의 대 가수” 송동백과 그의 연인, “히트곡 제조기로 알려졌지만 상처받은 예술세계의 소유자” 작곡가 갤럭시 박은 시끄러운 속세에서 잠시 피할 겸, 치매가 악화된 어머니 막이도 볼 겸 고향 벌교의 뻘갯가 마을로 내려온다. “음악으로 총칼에 맞설 수 있다”는 동백의 아들 운창은 광주에서 다니던 학교를 1년 전 그만두고 벌교에 내려와 동료 정석과 함께 ‘블랙시걸’ 밴드를 꾸리고 창작활동에 매진하나, 이들이 정색하고 흩뿌리는 과도하게 진취적인 음악은 벌교 갯마을의 소박한 이웃들이 소화하기엔 너무나 난해할 뿐이다. “트로트 가수 나부랭이” 엄마, “천박한 대중음악 제조기” 갤럭시 박과는 “혐오와 동경, 혈육의 정과 질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나마 “예술과 사랑, 사랑과 예술을 동시에 이뤄낼” 동반자로 생각했던 선홍자도 서울서 내려온 유명작곡가 갤럭시 박에 빼앗기고, 무너진 자존감과 울분은 뻘에 대고 빽빽 소리 지르는 뻘짓으로도 풀어지지 않는다. 광주로 나가 약방을 한다는 송동백의 사촌 백도일은 1년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1년 전부터 말을 잃은 유부녀 나조금과의 공기가 심상치 않고, 나조금의 딸 조은옥은 애꿎은 뻘바닥만 내려다보며 운창에 대한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한다. 이를 지켜보는 순정파 학교선생님 염삼종은 은옥에게 고백하려다 홧김에 던진 반지를 찾으려 새벽부터 뻘밭을 헤집는다. 이쯤 되면 러시아의 호수마을을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는 전라남도 뻘갯가의 이야기로 이음매 없이 매끈하게 전환되고, 전라도의 애틋하고 감칠 나는 말과 정서, 그리고 <갈매기>와의 깨알 같은 비교는 더없는 재밋거리가 된다. 헌데 <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중요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두산아트센터 달나라동백꽃 제작, 부새롬 연출 <뻘(2012)>의 한 장면.
    [출처] http://www.doosanartcenter.com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벌교 갯가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 그 0.1%의 엄청난 일을 공유하고 있다.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1년 전에 이미 지나간 그 일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크나큰 상처를 받은 후로 1년, 상처는 더러 덮여지기도, 계속 쓰라림으로 지속되기도 하며 각자의 지리멸렬한 삶에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온갖 게와 꼬막, 낙지, 짱뚱어 등 오만가지 생명체들이 거기서 아등바등 아우성치며 살아가지만,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뻘은 1년에 1미리 씩 조용히 쌓여간다. 10년 후, 이들은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삶을 지속하고, 그렇게 한 켜 한 켜 쌓인 삶들은 그 자체로 교교한 뻘이 된다. 그리고 뻘은 멈추지 않고 계속 쌓여간다. 이렇게 김은성 작가는 <갈매기>의 신화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과 굴곡진 현대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뻘>로 재탄생시킨다.

태그 갈매기, 뻘, 박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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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연출가
상상만발극장에서 연출
트위터 @theatreimaginer
웹진 23호   2013-05-02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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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문장 하나하나 버릴게 없네요 ㅠㅠ 멋진 글입니다

2016-03-02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