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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연극 침묵의 연극
[색色다른시선] 영화 <그을린 사랑> vs 연극 <그을린 사랑>

김소연_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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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을린 사랑
영화 <그을린 사랑>
2011년 07월 21일 개봉
[출처]네이버 영화

연극 그을린 사랑
연극 <그을린 사랑>
2012년 06월 5일~7월 1일
[출처] 명동예술극장
자 이제 모든 비밀은 밝혀졌다. 어느 날 갑자기 침묵에 빠져있던 나왈은 그녀의 쌍둥이 자녀에게 죽었다고 믿어왔던 아버지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형을 찾아 각각 편지를 전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엄마의 유언 앞에서 혼란에 빠진 남매 잔느와 시몽. 결국 유언을 받아들여 아빠와 형을 찾아 나서면서 만나게 되는 끝없는 증오의 역사. 나왈은 그 증오의 한복판을 사랑과 이별과 격렬한 저항, 그리고 그 때문에 견뎌야 했던 참혹한 폭력으로 살아낸다. 마침내 밝혀지는 탄생의 비밀 앞에서 잔느와 시몽도 나왈처럼 말을 잃어버린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1이었다. 사실 아버지와 형이라는 나왈의 유언에서 <오이디푸스>를 떠올렸다면 이 마지막 결말은 이미 눈치 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증오의 폭력 한 복판을 관통하는 나왈의 삶을 따라 도착하는 이 진실 앞에서 공포와 연민에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영화 <그을린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모든 비밀은 밝혀지고 잔느와 시몽은 아버지이자 형제인 니하드에게 각자 어머니의 편지를 전한다. 나왈의 유언처럼 니하드도 말을 잃는다. 이제 모든 진실은 밝혀지고 묘비를 세우고 이름을 새긴 나왈의 묘지 앞에 서 있는 니하드의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시작도 니하드였다. 라디오헤드의 ‘유 앤 후즈 아미?You and whose army?’가 흐르는 가운데 부서진 낡은 건물에서 군복을 입은 아이들이 머리를 깎고 있는 영화의 첫 장면. 한 아이가 클로즈업되고 큰 눈망울로 화면 가득 정면을 응시하던 아이는 영화의 마지막 나왈의 묘지 앞에 서 있던 어린 니하드였다. 영화는 니하드에서 시작되어 니하드로 끝난다. 그런데 정작 니하드는 살인기계가 되어 어린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 말고는 영화의 전개에서 잠시 잠깐 등장할 뿐,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니하드는 영화의 프레임이면서 비어있다. 니하드는 누구인가.

그을린 사랑 잔느 시몽
(왼쪽) 영화 <그을린 사랑> 나왈의 유언을 확인하는 잔느와 시몽[출처]네이버 영화
(오른쪽) 영화 <그을린 사랑> 오프닝 장면 중 머리를 삭발 당하고 있는 어린 중동 소년의 모습 [출처]네이버 영화
화염
화염(Incendies)
와즈디 무아와드 저/최준호,임재일 역
나왈의 시간, 잔느의 시간

영화의 마지막에 남겨진 의문 때문에 원작 희곡에 대한 궁금증은 컸다. 우리에게는 영화가 먼저 소개되었지만 <그을린 사랑>은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 레바논 출생 캐나다 작가, 1968~ 의 희곡 <화염Incendies>을 각색한 영화다. 왠지 니하드의 삶을 채워 넣지 않는다면 나왈의 삶도, 오이디푸스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도 완성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나, 지난 해 명동예술극장의 연극 <그을린 사랑>으로 먼저 만난 희곡은 니하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영화가 다 이야기하지 않은 여러 겹의 서사였다.

영화의 전개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나왈의 삶과 나왈의 삶을 추적하는 잔느와 시몽의 교차 편집은,연극에서 더욱 적극적이다. 무대에서는 종종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이 중첩된다. 예를 들어 엄마의 유언을 듣고 혼란에 빠져있는 잔느의 장면과 맞물려 어린 나왈과 와합의 사랑장면이 시작된다. 나왈에게 읽고 쓰는 걸 배우라고 했던, 그래서 엄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분노의 줄을 끊으라고 했던 할머니 나지라의 장례식은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관도 없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얼굴을 땅을 향하게 묻으라 했던 나왈의 장례식과 겹친다. 엄마의 유언 앞에서 혼란에 빠져있는 잔느와 시몽의 사이를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남부를 헤매고 있는 나왈과 그녀의 친구 사우다가 스치듯 지나간다.

이러한 시공간의 겹침은 단지 장면 전환의 연출적 고안인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아이를 찾고 있는 나왈과 엄마의 유언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엄마의 젊은 시절을 추적하고 있는 잔느가 서로 스치듯 지나칠 때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와 그것을 추적하는 현재의 대비가 아니다. 연극과 영화 모두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찾으라는 유언으로 시작되지만, 영화의 교차편집이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가는 영화의 전개를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면 연극은 그렇지 않다. 나왈의 이야기와 잔느의 이야기는 무대 위에서 모두 현재의 삶이다. 나왈의 시간과 잔느의 시간은 마치 평행우주처럼 나란히 전개된다. 하여 연극은 고통의 이야기이면서 발견의 이야기가 된다.
그을린 사랑
연극 <그을린 사랑> 니하드(이윤재 분)에게 나왈(이연규 분)의 편지를 전하는 잔느(이진희 분)와 시몽(김주완 분)
[출처]동아일보 2012년 6월 12일
    시작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다

    물론 영화의 교차편집은 연극의 전개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잔느와 시몽이 엄마의 유언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가운데 나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와 연극에서 나왈 이야기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서로 다르다. 영화에서 나왈의 이야기는 눈앞에서 와합의 죽음을 목격하는 공포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때로는 처연하게 아름답고 때로는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에 육박하는 장면들을 대비하면서 나왈이 통과해 가는 증오와 폭력의 현실을 세세하게 증언한다. 그 폭력과 증오는 35년이 지난 지금 나왈의 삶을 다시 되밟아가고 있는 잔느에게도 여전히 펼쳐진다. 나왈의 고향마을에서 잔느에게 전하는 나왈의 이야기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라는 것이다. 반면 연극에서 나왈의 이야기는 어린 나왈과 와합의 흰나무 숲에서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 사랑의 장면은 연극의 전개에서 종종 다시 불려나온다. 연극에서 잔느가 나왈의 고향마을에서 만나는 이야기도 전설이 된 횐나무 숲의 사랑이야기다.

    사랑은 나왈의 이야기에서 계속 반복된다. 영화에서 나왈의 선택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이다. 나왈은 학교로 군대의 탱크가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나왈은 난민들의 버스에 총을 난사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는 민병대의 폭력 앞에서 민병대장의 저격을 결심한다. 반면 연극에서 나왈의 선택은 사랑으로 맺어진 약속이다. 나왈은 할머니 나지라와 약속한 대로 읽고 쓰고 계산하기를 배우고 돌아와 나지라의 비석에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나왈은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나선다. 나왈이 민병대장을 저격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내내 함께 잃어버린 아이를 함께 찾아다니던 사우다의 분노 앞에서이다. 사우다와 자신을 위해, 난민과 고장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폭력의 대가를 되돌리기 위해, 이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나왈은 사우다에게 단 두 발의 총성을 약속한다. 약속한 대로 나왈은 민병대장을 저격하고 감방에 수감된다. 약속한 대로 나왈은 참혹한 폭력 앞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나왈의 노래는 분노이고 저항이면서 또한 사랑이다.


    그을린 사랑
    (왼쪽) 영화 <그을린 사랑> 나왈 마르완 役 루브나 아자발(Lubna Azabal) [출처]네이버 영화
    (오른쪽) 연극 <그을린 사랑> 중년의 나왈 役 배해선 [출처] 연극 그을린 사랑, 서울신문 2012년 6월 12일

    니하드의 빨간코

    그리고 니하드. 와합과의 사랑의 결실인 니하드. 그러나 니하드가 태어나기도 전에 와합은 죽임을 당하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니하드는 엄마 품을 떠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찾아 헤매던 이 모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조우한다. 영화에서 할머니 나지라는 니하드의 발뒤꿈치에 세 개의 바늘구멍을 새긴다. ‘부은 발’, 오이디푸스는 이 장면에서도 환기된다. 반면 연극에서 니하드는 와합의 사랑의 선물인 광대의 빨간코를 품고 나왈을 떠난다. 영화에서 세 개의 바늘구멍이 나왈을 침묵에 빠지게 했던 것처럼 연극에서도 광대의 빨간코가 나왈을 침묵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니하드의 빨간코는 단지 모자관계의 표식인 것만은 아니다. 광대의 빨간코는 와합과 나왈의 사랑의 증표이면서 그 결실인 니하드의 삶이 된다. 사랑으로 잉태했지만 증오 속에서 버려진 아이 니하드는 자신의 텅 빈 삶을 살인기계, 고문기계가 되어 견뎌낸다. 전범재판이 벌어지는 재판장에서 니하드는 이 재판의 지루함은 참을 수 없다며 그가 간직해 온 빨간코를 꺼낸다. 광대의 빨간코는 니하드의 삶을 잉태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드러낸다.



    끔찍한 이야기는 어떻게 비극이 되나

    극 중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작가의 전사가 투영된 이 희곡의 배경은 레바논 내전이다. 와즈디 무아와드는 레바논에서 어린 시절 이주하여 현재는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자 연출가다. 레바논은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어왔고 70년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밀려들면서 그 갈등은 내전으로 격화된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만 내전으로 인해 15만 명이 죽었다. 희곡에서는 구체적으로 레바논의 상황을 언급하지 않고 난민과 민병대의 갈등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매체의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그 증오와 폭력을 증언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전율한다. 나왈과 니하드의 끔직한 조우는 그 증오와 폭력의 처참함을 증거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영화를 열고 닫는 니하드는 오이디푸스의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을 환기하면서 증오와 폭력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반면 연극은 어떠한 충격적 사건도 무대 위에서 재현하지 않는다. 오직 말이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말, 분노를 토해내는 말, 고통에 울부짖는 말. 그러나 마지막 진실 앞에서 나왈은 침묵하고 잔느와 시몽은 그 진실에 뒤늦게 도달해서 엄마의 침묵을 듣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나왈의 침묵 속의 말, 편지를 통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말은 흩어지지 않고 침묵은 망각이 아니다. 나왈의 이야기는 횐나무 숲의 사랑과 노래하는 여자의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된다. 연극은 영화와 같은 생생한 증언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그 죽음의 현실에서 삶을 발견하는 ‘말’의 힘을 보여준다

    연극의 마지막 잔느와 시몽에게 전달되는 편지에서 나왈은 말한다. 너희들의 이야기의 시작은 끝없이 반복되는 공포와 사랑이 아니라 할머니 나지라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젊은 날의 자신이라고. 말의 힘, 이야기의 힘 그리고 진실의 힘에 대한 뜨거운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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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을 보고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웹진 25호   2013-06-05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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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JY
JY의 최고의 연극! 개인적으로 영화보다 연극이 훨씬 좋았어요~^^

2013-06-13댓글쓰기 댓글삭제

그을린JY
아 그리고 평론가님 글 항상 재미있게 읽고있어요~ 다음 연재 기대할게요! ㅎ

2013-06-13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