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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광기에 대한 혹독한 고발
[색色다른시선] 연극 <시련> vs 영화 <크루서블>

이선형 _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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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예술의 전당에 자리한 ‘토월극장’에서 아서 밀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련>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토월전통연극시리즈’의 8번째 공연이었던 만큼 정극의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속셈을 여실히 드러냈다. 공연 시간만 해도 3시간 반에 육박하는 묵직한 연극, 연극다운 연극을 표방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 야심은 작품 뿐 아니라 연출가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15년 동안 연극계를 떠나 뮤지컬 판에서 <명성황후>와 <영웅>으로 명성을 높였던 윤호진이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인물들의 성격, 극적 갈등, 정연한 플롯을 지닌 문제작 <시련>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1997년에 동일한 작품이 영화로 제작된 니콜라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 감독의 <크루서블>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크루서블
영화 <크루서블> 1997년 개봉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

크루서블
연극 <시련> ‘07.4.11~29
윤호진 연출, 예술의 전당 제작
크루서블
영화 <크루서블>(왼쪽/[출처]네이버 영화)과 연극 <시련>(오른쪽/[출처]오티알)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있어 타인은 나의 삶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타인이 고통과 시련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타인의 의미는 미스터리 자체다.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해 왔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이기보다는 집단의 역사다. 그런데 집단의 형태를 보면 때로는 개인을 보듬고 때로는 내치며 마치 태풍의 소용돌이처럼 유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 개인을 희생시켜 집단의 힘을 과시하거나 단합의 계기로 삼는 예는 너무나 흔하다. 텃새, 희생양, 마녀사냥, 집단 따돌림, 조직의 쓴맛 등의 용어는 집단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부정적 흔적이다. 인간의 모임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런 현상은 골동품 같은 먼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현재에도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무리를 이루며 사는 한, 사회라는 집단체계를 지니는 한, 집단의 폐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소유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인간은 불평등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소유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힘이 세지고 상층부를 차지한다는 논리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진 것이 없는 꼬리 칸 사람들과 풍요한 물질의 머리 칸 사람들의 계급차가 바로 그런 경우다. 수직적 서열 속에서 윗사람들은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일목요연하게 전달되는 일사불란한 통일성과 전체성을 선호한다. 머리 칸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얕잡아 보고 조직을 흔드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이런 현상은 쉽게 목격이 되는데, 특히 정치적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 사람이 오만해지면, 국민들을 감시하고 처벌하여 맞춤형 논리와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인류의 역사에서 비극적으로 있어왔던 독재에 대한 유혹과 독재자의 횡포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전쟁의 히스테리는 집단의 단합을 요구했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매카시즘은 힘을 얻었다. 힘 있는 자들이 똘똘 뭉쳐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집단적 논리에서 벗어나려는 이른바 개인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주목하였다.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예술가들이 이 덧에 걸린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블랙리스트에는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자 할리우드에서도 잘 알려진 「세일즈맨의 죽음」(1949)의 저자 아서 밀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절친이던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은 이미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양심을 팔아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기에 이르렀다. 밀러는 분노했다. 집단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인간애는 쓰리기통에 처박히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가 보여주듯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이 되고 광적인 살인도 정당화된다. 자유의 나라라고 외쳐대던 미국이 이제 와서 양심을 팔라고 강요하자 밀러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펜을 잡는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17세기 청교도의 정신이 드높던 시절,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한 작은 마을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의 실화였다. 그렇게 해서 희곡 「크루서블The Crucible, 시련」(1952)이 탄생했다. 전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듬해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고 이미 1957년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희곡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경건한 청교도의 무게에 짓눌린 사춘기 소녀들이 숲 속에서 나체로 춤을 추며 원초적 욕망을 발산한다. 본능은 규칙이나 제어를 싫어하고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삐져나오려는 특징이 있다. 그들 중 패리스 목사의 딸 베티가 우연히 쓰러지자 사람들은 악마가 들었다고 수근 댄다. 나체 의식이 마을에 알려지고 처벌의 위협을 느낀 소녀들은 악마가 찾아들었기 때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나체 춤이 마술의 의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건한 청교도 마을은 불이 난 것처럼 거대한 공포에 휩싸인다. 마을 사람들은 담합하여 이 기회에 평소에 종교심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사람들, 집단에 비협조적인 사람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을 차례로 교수대에 세운다. 한편 나체 의식을 주도했던 처녀 에비게일은 농부이자 강인한 성격을 지닌 존 프락터를 연모하여 그 부인의 자리를 탐낸다. 애비게일은 마녀사냥을 이용하여 부인을 죽이고자 거짓에 거짓을 보탠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프락터가 명단에 오르게 된다. 마을 목사에게 밉보인 남자는 운명의 함정에 빠져 악마와 내통한 자가 되어버리고 자백을 강요당한다. 이제 마녀사냥은 종교적 차원을 떠나 인간의 잠재적인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치사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적 욕심이 첨가되면서 더러운 인간의 모습이 악마처럼 솟구친다. 목숨을 살려준다면 자백이야 못할까. 영웅도 순교자도 아닌 프락터는 자백하겠다고 한다. 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재판관은 마을에서 악마와 내통한 자의 명단을 요구한다. 양심을 팔라는 것인가. 프락터는 서명을 했던 자백서를 찢어 버리고 절규한다. “하나님은 죽었다!” 도대체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대더니 이제 와서 또 누구의 이름을 대라고 협박하는 건가? 너의 동료를 팔아라. 자유와 양심을 향한 프락터의 외침은 이 작품의 백미다. 정의는 사라졌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없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크루서블>-<시련>의 하이라이트는 양심과 명예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다가 결정을 내리는 바로 이 순간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시때때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선택을 한다. 멈추느냐 나가느냐, 양심을 파느냐 고수하느냐, 명예를 지키느냐 버리느냐, 죽느냐 사느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것은 나의 일이 되어 버린다.


크루서블
크루서블
영화 <크루서블>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

문학 작품을 어떤 특정한 사건의 대리인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그 깊이를 얕게 할 우려가 있다. <시련> 역시 매카시즘에 대한 작가의 분노만을 대변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여전히 현대인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까닭은 그 저변에 그리스 비극에서 비극의 원천이 되었던 인간의 과도한 욕망, 피할 수 없는 정념, 명예와 사랑의 장엄한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인 집단 따돌림, 종교적 위선, 마녀 사냥의 실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은 그것이 어떤 장르로 써졌든 간에 크로스오버 현상이 두드러진다. 밀러의 「시련」은 애초 희곡이었지만 그 사이 영화, 오페라, TV드라마로 개작되어 각 장르의 특성에 맞게 펼쳐졌다. 그러니까 하이트너 감독의 영화 <크루서블>은 희곡을 시나리오로 변형시킨 것이고 윤호진의 <시련>은 밀러의 희곡을 한글로 번역하여 무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영화와 연극의 장르적 특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각각 고유의 언어로 작가의 분노의 외침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그 특유의 환상성과 단절성의 언어로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고유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희곡의 색채를 살려내려는 영화 언어는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을 클로즈업시킨다. 만일 관객이 숨 돌릴 틈 없는 사건의 빠른 전개, 멋진 영상효과의 강조를 기대한다면 세심한 연기에 초점을 맞춘 색다른 분위기의 영화, 마치 무대에서 인물들을 만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만큼 감독은 원작의 언어를 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미장센은 마치 연극 관객을 염두에 둔 듯하고,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화려한 영상 언어가 아닌 대사, 목소리, 표정, 몸짓에 중점을 둔다. 법정에서 판결하는 장면을 장시간 부각시킴으로써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검은색 옷과 흰색 모자로 대조되는 흑백의 의상은 선 아니면 악, 백 아니면 흑, 찬성 아니면 반대가 되어야 하는 명백한 이분법적 논리를 표현한다. 프레임에 갇혀 있는 비연속성의 영화와는 달리, 동시성과 연속성을 통해 전체를 제공하는 연극은 숨 막힐 것 같은 진한 밀도로 욕망의 속성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무대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불꽃 튀는 격한 감정의 교류나 심리적 갈등이 분절언어가 아닌 신체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극적 질감은 살아난다. 연극 역시 연출가가 개인의 욕심을 자제하고 원작에 내맡기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기교가 강한 뮤지컬을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연출가는 연출적 간섭을 멀리하고 연극이 지니는 거친 질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배우를 중심에 두고 연극다운 연극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는 자칫 지루한 공연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탄탄한 플롯과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집단적 광기, 개인적 희생, 증오와 거짓으로 지속되는 서스펜스는 한시라도 긴장을 끈을 늦출 수 없다.


시련
연극 <시련> [출처] 오티알 www.otr.co.kr

밀러의 희곡이 한국 무대에 서기까지는 상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집단의 횡포, 힘 있는 자들의 논리를 비난하며 양심과 인간성을 되새김질하는 작품이 갈채를 받으며 소개되기 위해서는 지배세력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국민의 일치된 단결과 일관성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정권은 ‘희생양’이나 ‘마녀사냥’이라는 말에 경기를 보일 수밖에 없다. 연출가가 연극판으로 되돌아오면서 <시련>을 선택한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다. 애초에 <시련>의 진가를 알아보았던 연출가는 군사정권 시절부터 이 작품을 공연하고자 노력했으나, 권력자들은 집단의 횡포를 고발하는 연극 공연을 허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이제야 <시련>의 카드를 꺼내든 것은 연극이 지닌 사회성, 특히 <시련>의 고발성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다. <시련>의 무대가 매력적인 것은 시공간을 넘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집단성, 위선, 양심, 명예, 원초적 욕망의 얼굴을 오늘의 우리에게도 충격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그 시련, 크루서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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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형

이선형 연극평론가, 김천대학교 교수
연극의 치유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연극, 영화를 만나다』, 『연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등 저작이 있다.
웹진 34호   2013-10-2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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