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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다른시선] 소설 「연애시대」vs 연극 <연애시대>

오세혁 _ 작가/연출/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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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시대」는 제목에 솔직한 소설이다. 말 그대로 연애의 시대가 펼쳐진다. 어느 남녀가 첫 눈에 반한다. 연애를 한다. 결혼을 한다. 첫 아이가 세상을 떠난다. 결혼에 실패했다고 느낀다. 둘은 이혼한다. 이혼하고 나서도 계속 그들은 서로의 주위를 맴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애인을 찾아주기로 한다. 둘은 서로를 통해 알게 된 남녀와 연애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돌아온다. 둘은 다시 연애한다.

    이 솔직한 제목에 어울리는 솔직한 소설은 자칫하면 뻔해지고 식상해지며 오그라들 위험이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지만) 일단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이고 제목 또한 너무나 솔직한 제목이며 실제로 두 남녀는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서로에게 애인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돌진하기 때문이다. 소설 상하권 모두 서로가 애인을 찾아주고 찾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연애시대
    故 노자와 히사시가 1998년에 발표한 소설 <연애시대>와 2006년 국내에 소개된 소설 <연애시대>

연애시대
소설 <연애시대>의 원작자
故노자와 히사시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언제 한 번 아침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이 소설, 꽤 재미있다. 심지어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다시 앞의 이야기를 들춰보게 된다. 앞을 들춰보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 후 다시 뒤로 갔다가 다시 중간을 들춰봤다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 후 다시 뒤로 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그런가 생각해봤다. 책을 다시 읽어봤다.

이유는 명확했다. 소설 「연애시대」는 뻔하고 식상할 법한 줄거리를 압도하는 강력한 두 가지 힘이 있다. 시점의 자유로움과 인물의 디테일이다. 서로가 지지고 볶고, 울고 웃고, 앓고 헤매는 상황들을 남자의 눈과 여자의 눈으로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남자의 눈으로 봤을 때 저 여자는 뭔가 계속 투덜거리고 까칠하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자꾸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러면서 왜 자꾸 뭘 챙겨준다고 난리인지, 그러는 동시에 왜 자꾸 알듯 말듯 한 말들을 의미심장하게 뱉어내는지,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여자의 눈으로 바뀌게 되면 이해가 간다. 저 남자가 뭘 어떻게 했기에 여자가 투덜거리고 까칠하게 구는지, 저 남자는 왜 자꾸 여자를 투덜거리게 만들고 까칠하게 만드는지 무릎을 치며 공감하게 된다. 남자 편과 여자 편을 종횡무진 옮겨 다니며 이야기를 관전하는 재미가 엄청나다. 그래서 자꾸만 앞을 들춰보게 만든다. 사소하게 툭 내뱉고 지나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아! 그때 뭐라고 했더라?”를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는지 모른다.

남자의 눈과 여자의 눈이 번갈아가며 펼쳐지면서, 그들의 눈에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개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재벌그룹 후계자 자리를 '굳이' 박차고 나와 결혼 사진촬영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남자. 남편을 견디지 못해 이혼했지만 남편이 다달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골드카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지적이고 따뜻한 이미지의 교수이지만 부자 집안의 제자와 결혼한 후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악역 프로레슬러이기 때문에 냉혹하고 무자비한 표정을 짓고 살아야 하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여자. 솜씨 좋은 의사인 동시에 솜씨 좋은 바람기를 겸비하고 있는 남자 등등, 살아가는 공간과 방식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한 개성들을 모아 놓았는지 이들 모두를 차례대로 만나보고 싶을 정도다. 특히 여자 프로레슬러 사유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역시 소설이 아쉬운 점은 있다. 대부분의 연애소설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들의 심리와 감정과 느낌을 너무 세세하게 묘사하다 보니 도무지 속도감이 붙지 않는 것이다. 보통 상권을 읽고 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하권을 재빨리 집어 들어야 하는데 「연애시대」는 오히려 조금 쉬었다가 읽고 싶을 정도였다. 밥 한 번 먹자거나 술 한 잔 마시자고 말 한 번 하는데 온갖 세세한 속마음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걸판 여자 단원들에게 물어보니 오히려 그 세세한 심리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연애시대」가 좋다고 한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소설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이 길게 이어지는 심리묘사의 행렬이었다. 슬쩍 더 얘기하면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잘산다. 재벌 후계자, 부자 남편의 전처, 부자 아내의 전남편, 교수, 의사 등등이다.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더라도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며 괴로워하니까 별로 괴로운 것 같지 않다. 내 주변에 잘사는 지인이 적어서 그러지는 몰라도 좀 더 평범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하지만 그러면 소설이 인기가 없었을지도)


연애시대
2011년 초연 이후 다시 무대에 오른 연극 <연애시대>

연극 <연애시대>를 보러 가기 전에 러닝타임을 물어보니 2시간 10분이란다. 속으로 경악했다. 이거 설마, 소설 상하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충실하게' 소설을 무대 위에 올려놨었다. 다음 장면이 뭐가 될지 알아맞힐 정도로. 몇 장면이 남았는지 헤아리며 공연을 보는 건 고역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로 안심되는 구석이 있었다. 연출이 김태형이었기 때문이다.
연애시대
연극 <연애시대>의
김태형 연출
김태형 연출은 내가 아는 가장 매력적인 연출 중 한 이다. <옥탑방 고양이> <모범생들>처럼 대중적인 작품을 만드는 동시에 라는 이름의 떡밥> <아이리스 PC>처럼 사회적인 작품, <카페 플레이> <씨어터RPG>처럼 실험적인 작품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무차별' 연출이다. 그의 무차별 연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재미'. <연애시대>에서도 2시간 동안 주구장창 재미를 심어놓았다. 숨 쉬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몰아치다가 큰 숨을 훅 쉬게 만드는 깊은 농도로 주물러댄다. 등장인물들도 좀 더 평범한 사람들로 내려왔다. 심각한 장면은 일부러 가볍게 터치하고 가벼운 장면을 일부러 무겁게 터치한다. 예를 들어 재벌 후계자가 정체를 밝히는 장면 "저는 사실 사진사가 아니고 나가토미 관광, 나가토미 호텔, 나가토미 항공의 후계자 입니다" 이 얼마나 오그라드는 대사인가? 하지만 "하나 드릴까요?"라는 다음 대사 하나로 이 장면은 웃음바다가 된다. 장면과 장면의 전환도 거의 빛의 속도로 이루어진다. 배우 캐스팅도 어찌나 탁월한지 '정말 그 사람일 것 같은 배우'를 찾아낸다. 사유리로 나온 황미영 배우와 가이에다 역의 윤경호 배우가 그랬다. 이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2시간이 아깝지 않다.

연애시대
연극 <연애시대> 스틸컷. 심은진, 김재범(왼쪽) 조영규, 황인영(오른쪽)

굳이 구분을 하자면 소설 「연애시대」는 시간과 연애하고 연극 <연애시대>는 공간과 연애하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두 남녀의 감정이 오르고 내리고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근차근 펼쳐진다. 그들이 사랑이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어지는 과정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조용하고 느리게 진행되지만 마지막에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연극은 그들의 아들이 잠들어있는 납골당과 그들이 수다를 떠는 도너츠 가게와 그들이 지지고 볶는 술집과 그들이 가까워지는 스포츠클럽과 그들이 고민에 빠지는 그들의 집이 골고루 등장하면서 그들의 힘겨운 연애를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내 경험상 소설을 먼저 읽고 연극을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두 남녀가 길게 쌓아 왔던 감정의 흐름을 미리 알고 가면 쏜살같이몰아치는 김태형표 <연애시대>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공연 후반부에 객석을 둘러보니 훌쩍훌쩍을 넘어 엉엉 우는 관객들이 많았다. 심지어 남자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물어보니 드라마 <연애시대>가 가장 재미있다는 의견들이 꽤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마치자마자 절친한 형님에게 드라마 <연애시대> 스페셜 에디션을 빌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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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웹진 35호   2013-11-0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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