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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다시 쓰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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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다페르튜토 안산 <본오 아파트 앞 육교(2013)>

통상 ‘관객’은 불특정한 다수로 뭉뚱그려지면서 하나의 수치(數値)라는 양적 측정의 개념으로 산정되거나 ‘기호(嗜好)’의 차이와 ‘만족’의 여부라는 단순한 질적 판단의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된다. 이는 다시 공연의 출발선상에서 공연의 성과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공연의 성격/본질 자체를 옥죈다. 어떻게 보면 ‘관객’이란 관념은 매우 투명하고 관념화된, 공연 바깥의 존재자로 가정되는 가운데 공연 자체에 대한 판단의 여지를 단순화시킨다.

‘대중성’이란 무지한 관객의 이름과 ‘예술성’이란 이해받지 못할 예술(가)의 이름은 여기서 반립하며, 분리되어 각각 안전하게 자신의 이름 아래 운신한다. 그렇다면 예술이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 예술이 결정되는 장소로서 ‘관객’이라는 불투명한 존재는, 어떻게 공연을 보증하는 마지막 증인이자 그 공연이 체현되는 감각 자체가 되는가. 이는 아마도 어떠한 코드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체와 대상의 분리된 공연의 반대편에서 출발하며, 그 자체로 변화해 가는 공연, 그럼으로써 극장을 발생시키고 극장이 되어 가는 공연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편재의 편재를 통해 극장 발생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그 이름에서부터 (탈)장소성의 함의를 갖고 있는 듯한데, 이탈리아어로 ‘도처에’를 뜻하는 ‘다페르튜토(dappertutto)’가 연극의 편재성(遍在性)이라면, ‘스튜디오’라는 공간 안에서 이 편재성은 관객 각자에게로 수렴되는 편재성(偏在性)으로 전화한다. 곧 이름 자체가 하나의 (가상)공간으로서 도저한 흐름의 펼쳐짐을 붙잡아둔다는 점에서 극장에 대한 유비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빈 공간에 누군가가 지나가고 그때 그것을 보는 이에 의해 성립되는 피터 브룩의 연극의 정의는, 관객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해석을 간과하기 쉬운데, 곧 해석하는 주체의 역량을 가진 관객이, 그 풍경 안에 인물을 무대와 역할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곧 막을 시작하고 (그것을 하나의 극으로 완성시키며) 끝내는 이는, 오히려 관객이란 주체다. 그러한 전제에 따르면 일상을 (극으로) 포착함은, 이미 하나의 극을 만드는 관객의 완성이자 ‘관객’이란 완성이 있는 것이다.

가령 다페르튜토 스튜디오가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선보였던, 지역 시민들과의 사전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기억의 장소를 듣고, 배우들이 거기를 대신 방문해 1분 동안 발화/행위들을 펼치는 모습을 찍고 있는 적극 연출은, 곧 첫 번째 관객이자 유일한 관객이다. ‘극은 그렇게 관객의 눈앞에서 펼쳐지며 담겨지고 그제야 완성된다.’ 그러한 공연은 반드시 대학로로 상징되는 범주의 극장에서 치러져야 할 필요는 없으며 공연을 통해 특별한 장소로 거듭나게 되는 장소 특정적인 공연으로 실천되어야 할 필요 역시 없다. 앞서 말했듯 어떤 극장이 있고 공연이 있으며 그것을 보는 관객이 있는 게 아니라 관객이 공연을, 역으로 공연이 관객을 만들며, 따라서 단지 관객 특정적인 하나의 수렴 장소만이 있을 뿐이다.

곧 <다페르튜토 안산>은 시민의 인터뷰들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아 기억의 장소를 추적하여 그곳에서 연행하고 이를 원 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을 연결하는 QR코드를 담은 명함을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님으로써 결과적으로 관객의 또 다른 장소에서의 공연 보기의 실천으로 인계된다. 곧 누군가로부터의 과거의 장소에서 그것의 현재 장소에서의 연행,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시 미래의 장소, 곧 무차별적인 관객이 영상을 보는 장소로 이동하며, 연극 전반의 프로세스가 하나의 궤적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관객은 드러나는 대신 가정되고 추정된다. 우선 관객과 장소라는 두 번의 기록이 담기고, 이는 밖으로 뿌려져 이동하며, 다시 관객의 휴대폰 안에서 재생되는 과정에서, 관객으로부터 연장되고 관객으로 수렴되어 기록 바깥으로 누적되는 여정의 총체가 ‘흘러가는’ 하나의 연극이 된다.

[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다페르튜토 서울 <이명박집앞(2013)>

기존의 연극 팸플릿 양식이 공연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홍보 매체라면, 여기서 명함은 공연을 담고 그것으로 인계하는 매체의 인터페이스적 접점으로 기능한다. 연극은 단지 포착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고, 이후 재생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며 관객에게 맡겨진 운명적 사물이 된다. 관객이 극을 열고 닫는 감각을 수여하는, QR코드로부터의 연극의 ‘재생’은, 최근 적극의 개인전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에서 하나의 조명을 켤 때마다 하나의 연극의 장면이 시작되고, 끄고 다시 다른 연극의 장면을 출현시키는, 관객으로의 접촉의 인계 지점으로 연장된다. 여기서 관객이 갖는 큐는 연극을 열고 닫는 시작과 끝의 물리적 감각/행위로 유일하게 기능한다. 이로써 기존의 전시 공간이 작품을 담는 빈 여백의 공간을 전시품의 나머지로서 투명하게 드러내며 은폐한다면, 여기서 온오프의 큐는 어둠과 빛, 없음과 있음의 존재론적 성찰의 유비를 입고 오로지 하나의 공간으로 표상되게 한다.

이번 전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통한 공간의 다섯 개의 신(scene)별로 나누고 이를 분절적으로 적용하여 큐의 적용에 따른 빛의 점멸로부터 출현과 사라짐이라는 시간의 전개 양상으로 드러난다. 관객은 하나의 장면을 체험하기 위해, 곧 극장에 들어서기 전에 혹은 막을 올리기 전에 첫 번째 조명의 스위치를 켜야 하고, 두 번째 장면을 체험하기 위해 두 번째 조명의 스위치를 켜기 전에 첫 번째 조명의 스위치를 먼저 꺼야 한다. 곧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한 후 마지막에는 모든 조명을 켜, 입체적으로 모든 장면이 뒤섞이며, 이질적으로 앞선 체험의 감각이 반복되고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곧 하나의 완전한 공간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불균질한 총체로서 드러난다.

시간의 양상과 출현/부재의 기호로 각인되고 사라지(며 남)는 기억들은, 마지막에 재출현하는 기이한 체험을 낳는다. 연극을 완성시키는 건 결국 관객(의 기억)이며 연극이 만드는 건 그 기억의 조각이다. 이러한 부분은 이미 했던 연극에서 사용됐던 일부를 박제화하거나 연극을 시각적 기호로 수렴시키는 매체 전환의 방식 대신에 일관되게 (극장이 아닌 곳에서도 역시) 연극을 하려고 했던 애초 연출의 의도하에 전시장이 극장으로 바뀌게 되고, 특히 커튼콜 대신 모든 존재와 신이 등장한 마지막 가장 밝은 빛의 공간에서 연극은 상기(想起)된 기억들로 돌아와 (다시) 완성되며 그 완성을 실패한다. 이 온전한/제한된 공간의 신과 불완전한/열린 공간의 신, 곧 두 대별되는 신은 각각 연극의 메커니즘과 경험(기억)의 작동 기제를 드러낸다.

[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랜덤액세스(2015)>

만약 공간이 관객에 의해 영원히 켜지고 꺼지며 (재)작동될 수 있다면, 연극은 영원히 시작되고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라는 정박된 장소는 그런 도처의 흐름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극장은 그것이 작품을 싸고 있는 분리된 기표가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서의 기호로 기능할 것이다. 여기서 극장은 따로 선택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극장을 만드는 방식이 연극의 제작방식일 것이다. (여기서 대학로라는 이름은 하나의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만드는 이로 수렴되지 않는 장소성을 갖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라는 이름은, 편재하는 것들을 편재시키는 하나의 장소/극장에 대한 유비가 아닐까.

최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선보였던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라는 작업의 마지막은, 삶이 연극으로 재정의되는 순간을 야기하는데, 어린 관객들을 경운기에 태운 신랑이 긴 풍선들로 치장한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러 아트센터 언덕에 오르며 뒷모습으로 사라지자 돌연 그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관객들로 인해 정적 이후 새로운 신이 관객에 의해 만들어지는 광경이 연출됐다. 그리고 그 사라진 공간에서 다시 경운기 무리가 돌아오며 자연스레 커튼콜로 이어졌다. 곧 연극이 끝나면서 시작되고 관객이 연극 안에 포함되어 직접 퍼포머가 되거나, 관객이 그 모든 걸 바깥에서 보며 그 모든 것이 연극의 시간으로 연장됐다.

관객의 이야기로부터 희곡-텍스트의 추출하기, 물리적인 차원에서 극장 바깥에서 극장을 만들기, 매체적 전환을 통해 극장 너머에서 관객의 장소를 상상하기와 같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지난 작업들의 일환은 지어진 극장을 채운다기보다 발생하는 극장 가운데 관객이란 하나의 장소를 향하며 출현하고 사라졌던 것 같다. 곧 그 사라짐을 스스로 인식하고 증언하는 자로서 위치하며.

[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극연구소 마찰 <햄릿머신(2010)>

극연구소 마찰: 공간의 접촉으로부터 접속의 이음들로

통의동보안여관, LIG아트홀, 대안공간 이포 등 극연구소 마찰이 여러 장소에서 행했던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김철승 연출이 극에 직접 개입해 흐름을 잣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출은 어렴풋하게 들리는 속삭임의 형태로 어떤 지시 혹은 대사를 전달한다. 배우는 멈춘 가운데 그것을 듣고 행동하게 된다. 극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연출은 극에 분포하고, 극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트는데, 그것이 전달 과정에서 누락 혹은 변형의 측면이 발생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연극이 재현되기보다 생성되는 지점은, 연출의 즉흥성에서 우선적으로 또 주요하게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거슬러 간다. 여기서 연출은 연출의 태도를 갖고, 배우는 배우로서 극 속에 있는 가운데, 연출은 그 극 속에 있지는 않은데, 곧 콘텍스트를 제시는 하되 콘텍스트에 머무르는 건 아니다.

연출은 극에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배우와 차이를 갖는다. 연출은 극에 개입함에도 여전히 (배우가 아닌) 연출인데 그것은 연출이 그중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배치와 흐름 바깥에 있으며 그것을 가늠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연출은 그것을 바깥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극에 인접해 있는 한편, 관객에 인접해 있다. 그러나 연출이 배우에 직접 닿아 극을 전개시키는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배우는 그것을 수행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데, 그들은 곧 연출(과 관객)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얼마만큼 완벽하게 짜여 있는가 혹은 짜여 있지 않은 만큼의 새로움을 주는가가 아니라, 극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연출은 여전히 밖에 머물며 그런 점에서 관객과 만나지만, 동시에 관객의 밖에 있고 어떤 것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연출의 배우를 향한 완벽하게는 들리지 않는 지시를 통해서다.

결과적으로 극은 선형적 서사가 아닌 덩어리들의 배치 자체이자, 어떤 텍스트들의 반복적 증폭과 함께 완성되지 않는 파편들의 적층으로 드러나는데, 각각의 덩어리-배우들이 돌아다니며 각자의 시간과 기억의 층위에서 삐걱거리는 가운데 그것들이 단지 배치될 뿐으로 보이는 극의 양상은, 어떤 커다란 하나의 텍스트 층위를 부분마다 즉각적으로 꺼내고 그것을 증폭시킴으로써 잇기보다 단지 맞물리게 해 배우가 그 역할의 일부로서 기능하며, 역설적으로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총체의 잠재성을 담보하고 있는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고 보인다. 곧 모든 것이 각자의 위치를 갖는 가운데 연출의 지시는 사전의 주어진 맥락의 되풀이라고 보기 힘들며, 또 여기서 그것이 얼마만큼 즉흥성을 가지고 있어 새롭다는 측면으로 볼 수 있는지는 실상 부차적이다.

곧 연출은 배우를 그 역할로 깨우는 약간의 표지들을 건넨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바깥에 있고, 그 주어짐은 오로지 배우의 표현으로서만 중요성을 갖고, 그의 지시는 곧 사라진다는 점 자체만이 또는 그대로 옮겨지지 않고 여전히 배우에게 남겨진다는 점만이 다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이며, 단지 우리가 그 모두를 보면서도 그 모두를 실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그것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고 역할들이 가진 기억의 일부로서 과거를 증거하며 그 역할의 모든 것으로, 또 관계의 총체로 합치될 수 없는 부분들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역할의 일부를 역할의 모든 것으로 보게 된다.

여기서 연출은 재현을 단단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단계에서 현장의 연출을 마지막으로 재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편집과 선택의 측면에서 배우를 추동하는 하나의 역할로 극에 포개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아니 완성할 필요 없는 하나뿐인 텍스트를 잣는 접속의 역할로 부분마다 개입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출이 배우에게 전하는 내밀한 텍스트는 말과 행동의 덩어리로 이어지고, 그 말과 행동은 이 공간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극이라는 환영적 틀의 배경 대신, 몸과 맞닿으며 다룰 수 있는 약간의 오브제, 그리고 그 작품을 위해 선택된 장소가 직접 작품의 일부가 된다.

[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극연구소 마찰 <초대/침입(2012)>

이것이 극장이라면 빈 무대, 곧 바닥의 마찰이 전달되는, 벽의 마찰이 몸의 경계가 되는 식이 되고, 그것이 극장이 아니라면, 가령 카페나 통의동보안여관과 같은 곳에서는 소위 장소 특정적 공연이라 불리는 무언가가 된다. 이는 실상 그 공연이 어떤 특정한 장소로부터 기인한다는 것보다 배우 각자의 언어/몸짓의 덩어리 기표들이 현장에서 유동하며 배치되는 식으로 확장적인/자유로운 가능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해 온 장소들이 극장이 아니거나 전형적인 극장이 아니라는 점은, 그 장소의 새로움에 의미를 두기 이전에, 다만 그들과 맞닿는 공간이 극장으로 기능할 수 있느냐, 또 관객과 만나기 이전에 그들의 에너지가 계속해서 발현될 수 있는 (연습과 리서치 등의) 장소로 기능할 수 있느냐의 지점에서 단지 선택된 곳이 대학로가 아니라는 것뿐이라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주로 이들은 무대를 만들기보다는 있던 공간의 전체를 쓰곤 하는데, 가령 통의동보안여관의 여러 다른 공연이나 대안공간 이포에서의 공연이 그러했다. 그것은 닫힌 극장이라는 곳에서는, 곧 여러 공간을 환영적인 설계가 아닌 그 자체로 드러나는 측면에서는 단조로운 보통의 극장이, 그만큼의 이동 가능성이나 장소 곳곳에 산재하는 역할의 고유한 다양성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곧 이들은 공간과 맞물려 움직이고, 그 공간 전체를 완성되어가는 과정의 일부로 전유한다. 여기서 극장은 막의 여닫음의 싸개 역할을 하는 극을 보존하고 펼쳐놓을 수 있는 시작과 끝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관객과 닿는 가까움의 접촉적 감각만큼 몸에 닿는 감각의 연장으로 소용이 되는 장소들의 총체가 된다. 그런 맞닿는 지점의 감촉이 관객과 공간 사이의 배우에 의해 매개된다.

극연구소 마찰이 벌인 공연으로의 실험의 결과가 아닌, 공연 내에서의 공연으로 연장되는 실험 자체가 관객에게 닿는 감각은, 연출이 배우와 맞닿는 지점과 같이 직접적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다(가령 배우들에게 연출의 지시가 하나의 스크립트가 아닐 것이 듯이). 곧 텍스트를 가시화하는 방식이 하나의 전체적인 상을 완성 짓거나 선형적인 단계를 밟아 나가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며 영원히 똑같지 않은 모습으로 반복 출현하며, 다시 공간 안에서 배우들이 흩어지고 만나는 극의 광경은 마치 관객이 해석적으로 종합할 수 없는 전체, 곧 비전체를 제시하며 관객이 그 모든 것에 ‘인접’해 있다는 생각을 준다.

어쩌면 그 인접한 하나의 마찰이 관객 스스로를 지시하는 데서 극연구소 마찰의 공연이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속삭이며 지시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이 지시되거나 지시되지 않거나 하는, 그리고 전체를 이루지 않는 비전체의 전체를 감각의 한 부분들로 체화시키거나 망각하며 그 공연의 일부가 되어 갈 것이다. 공연은 오직 그렇게 뚜렷한 맞닿음의 기억과 망각으로 관객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실험은 그 말들이 결코 완전히 들리거나 들리더라도 결코 명징하게 전체로 구성되지 않는 지점에서, 어디까지나 실험이라는 또 과정이라는 측면의 온전함을 달성할 것이다.

[연극하기의 확장, 새로운 모색들] 다섯 번째 이야기극연구소 마찰 <월간 마찰(2015.1~>

단 하나의 극장-연극-관객

극이 도착하는 지점이 관객이 아니며, 거꾸로 관객으로부터 극이 성립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극장은 늘 발생하며 결코 한 번도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곧 극이 벌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극을 벌어지게 하는 장소라면, 이미 고정된 의미의 극장, 변화 불가능한 극장은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단순하거나 다양한 여러 극장과 거기에 적응하거나 이탈하는 연극, 그리고 단순하거나 복잡한 관객이 각각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극장-연극-관객만이 있다, 극장을 발생시키는 연극을 보는 최후의 관객이 그것일 것이다.

[사진: 각 단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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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관

김민관
온라인 예술 리뷰/비평 아카이브 아트신(www.artscene.co.kr)의 편집장으로, 비평-기획-창작의 삼각 편대를 조율하며 구성하고자 한다. 첫째, 장(르) 대신 매체-감각을 사유하고자 한다. 둘째, 창작-비평과 개인-사회 간 도약의 밀도를 지향한다. 셋째, 동-시대의 시차적 간극을 지지한다. mikwa@naver.com
제78호   2015-10-2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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