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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판’이 이루어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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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미세먼지를 뚫고 연두 잎들이 돋아나던 어느 봄날, 나는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한여름밤의 작은극장' 페스티벌 작품 제안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팀으로 페스티벌 참여를 제의받거나 지원서를 쓴 적은 있었지만 개별 창작자로서 작품 제안을 받은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기뻤다.
페스티벌 담당인 손준형 연구원은 재작년 페스티벌 때 경기민요 창부타령을 주제로 그림자극을 선보였던 최민자(인형극단 부엉이곳간 대표)님의 작품을 보고, 올해엔 그림자극과 판소리의 콜라보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림자극과 판소리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어떨지 궁금했고, 주 1회 모임으로 작품구상 회의를 이어갔다.
#작품구상
우선 전통 판소리를 하느냐, 창작 판소리를 하느냐, 의견을 나누다 마침 내가 한창 적벽가 새타령을 연습하던 중이어서 적벽가 어떠냐고 했더니 페스티벌 장소인 백성희장민호극장도 빨강색이어서 적벽화전 장면과 잘 어울리겠다며 회의가 슬슬 풀려갔다. 그동안 다른 곳에서 적벽가로 해온 작업들은 유비, 조조, 제갈공명 등 전쟁영웅들의 서사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어서, 우리 작업에서는 좀 다른 시각으로 풀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 삼국지를 한국적으로 재창조했다고 평가받는 군사 설움 대목과 새타령을 중심으로 대본을 각색해 보기로 했다. 제목은 판소리그림자극 “새판”.
민자님은 공연 때 혼자서 인형을 다 조종해야 하기 때문에 인형 소품과 음악, 대사와 합을 맞출 충분한 연습 기간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주셨다. 그래서 대본과 음악을 만드는 데로 민자님과 공유했고 민자님은 그와 동시에 인형들을 제작해 나갔다.
대본 각색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자말을 알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 맥락을 잘 알 수 있게 하되, 판소리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까지만 하기. 둘째, 전쟁의 참상을 알리되 메시지가 너무 직접적이거나 도덕책 같은 느낌이 들지 않게 하기. 셋째, 리듬감 있게 전개하기. 넷째, 그림자극과의 유기적인 연결점 상상하기.
음악은 북 반주와 다른 악기 반주를 골고루 섞고 싶었다. 적벽가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여러 악기 반주가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판소리 미디 반주를 작곡해줄 최힘찬(월드뮤직그룹 상생 멤버)님을 섭외했다. 힘찬님은 기타, 플롯, 미디작곡을 두루 다룰 줄 알고 판소리와 콜라보작업도 많이 해보았기에 이번 음악 작업에 잘 어울렸다. 대본을 보며 참고 음원과 대목별 정서들을 공유했고 힘찬님이 음악을 만들면 그 위에 내가 아이디어를 추가하거나 판소리를 얹으면서 조금씩 수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대본수정
6월 초, 이렇게 한 달 동안 음악과 대본 작업의 60프로 정도가 완성 되었을 때, 연구소 측에서 극작과 움직임 워크숍을 마련했으니 참여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대본에 뭔가 빠져있는 느낌이 있던 차였는데, 이 두 워크숍이 큰 도움이 되었다. 대본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적벽가 본 사설에서 구성을 압축하고 한자말을 풀어쓴 것만으로는 작가로서 재해석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전통 판소리 사설도 수년 동안 여러 소리꾼, 학자들에 의해 추가되고 수정되고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대본에도 새로운 상상력을 더 넣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워크숍에서 작품의 주인공이 누군지, 주인공의 목표는 뭔지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새를 주인공으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디어 회의와 고민 끝에 대본 첫 부분에만 등장했던 전쟁터의 까마귀를 아예 소리꾼과 동일시하는 설정을 했고 장면이 전환되는 부분마다 까마귀가 낭송하는 전쟁 시(詩)를 추가했다. 새는 예전에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신성한 상징이기도 해서(무당과 비슷) 소리꾼으로 캐릭터를 주어도 설득력이 있었고, 퍼포먼스적으로도 소리꾼이 까마귀 안무와 울음소리를 반복적으로 한다든지, 마지막에 군사의 편지를 전달하는 새의 편지를 받아 읽는 장면 등 재밌는 지점들이 많이 생겼다.
#연습
최민자 작가님은 대전에서 친언니와 같이 인형극단을 운영하는데 한국에는 워낙 그림자극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조명도구, 인형, 그림자 틀 등 모두 유튜브를 참고하면서 다양한 실패를 거쳐 완성해왔다고 하셨다. 직접 인형들과 세트를 보니 감동적이었다. 까만 판지를 하나하나 오려 만들어낸 정성스런 손맛이 느껴졌달까.
대전을 오가며 6회 정도의 연습을 했고, 참여 아티스트와 담당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1회 시연을 한 다음 최종 장면 수정을 했다. 사실 대본과 장면 수정 과정에서 민자님과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다. 두 명의 콜라보 작업에서 의견이 엇갈리면 참 난감하기도 하다. 중간에서 손준형 담당자가 의견을 조율해주기도 해서 합의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연구소가 아티스트와 함께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나에겐 무척 도움이 되었다). 서서히 공연 날이 다가왔다.
#공연
페스티벌 오픈 일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뉴스는 태풍 “다마스”가 북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극장 야외에는 이미 초록 인조잔디, 어여쁜 빨강색 무대, 알전구들, 의자 등의 세팅이 다 완료된 상태. 행사 담당자분들과, 참여 아티스트 모두 두 손 모아 태풍이 비껴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다들 자기 전에 한 번씩은 기도하지 않았을까. 하늘이 우리의 기도를 들었는지, 페스티벌이 진행된 3일 동안 - 간혹 부슬비가 흩뿌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 폭우는 오지 않아서 모두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림자극을 여름날 야외에서 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배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날이 꽤 많이 어두워져야 그림자가 생기는데 여름이라 밤 9시는 되어야 하고, 습기가 많거나 비가 오면 그림자 인형 관절에 붙어있는 단단한 테이프들도 떨어질 위험이 있으며, 바람이 심하게 불면 그림자 액자 틀이 무너지기 때문에 모래주머니로 잘 고정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제약과 변수들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역시나 여름밤 야외 공연은 매력적이었다. 멀리 빌딩 숲이 보이는 빨강색 백장극장의 야외무대, 적벽화전 대목을 할 때 때마침 불었던 서늘한 바람, 밤공기를 가른 커다란 스크린에 비친 군사의 얼굴이 된 새 떼 그림자, 공연이 끝난 직후 빨강 노랑 조명등이 환히 밝혀지면서 나온 관객들의 감탄사와 박수.
중간중간 추임새와 박수도 쳐주시고 즐겨주셔서, 전통판소리로 이렇게 뭉클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행복했다. 이런 판을 마련해주신 연구소와 함께한 민자님과 힘찬님께 감사를 보낸다. 잊지 못할 한여름 밤을 허락해준 자연에게도.
[사진제공: 국립극단]

태그 한여름밤의작은극장,권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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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아신

권아신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2세부터 판소리를 공부해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예술사, 전문사를 졸업하고 2010년부터 밴드 고래야의 보컬로 활동했으며 2016년에 탈퇴하여 밴드 촘촘 결성, 2018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소리프론티어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옛것과 현재의 접점을 찾는 걸 좋아하며 노래와 창극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 주요참여 작품은 <시간을 파는남자>, <불러온 노래>, <도시유람>, <서른즘에 산티아고>.
https://www.facebook.com/kweon.asin
제165호   2019-08-08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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