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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1일 미투 이후,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문화 예술계의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변화와 과제를 주제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주최 포럼이 있었다. 필자는 공연계 현장 작업자로 토론에 참여하였다. 미투는 나 개인의 삶을 통째로 전복한 사건임과 동시에 문화예술계 생태계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니만큼, 포럼을 준비하는 내내 부담감이 상당했다. 잔뜩 긴장한 채 포럼 현장에 들어섰을 때 나의 마음을 풀어준 것은 뜻밖에도 플래카드에 적힌 포럼 후원 기관들의 명단이었다. 문체부, 국가인권위,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과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무용인희망연대오롯, 찍는페미 그리고 각 지역의 반성폭력연대체등 총 22개 단체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 22개의 후원 명단은 미투 운동이 본격화되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미투가 더 이상 개인의 외로운 전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전이자 과제라는 일종의 선언이었고, 강력한 ‘연대’를 알리는 소리 없는 포효와도 같았다.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회의장 정면에 걸린 그 22개의 단체 이름은 나로 하여금 변화한 2019년의 현실을 체감하게 해주었고 얼어붙은 마음을 뜨겁게 달궈 주었다.
이날 발제자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 이성미 시인과 이한본 변호사는 지난 해 미투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문체부 내에 긴급하게 꾸려진 성희롱, 성폭력예방 대책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 보장에 관한 법률안(성희롱, 성폭력 부분)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성미 시인은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정책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중심으로, 미투의 배경과 2018년 미투 운동으로부터 제기된 문제들을 집어 주었다.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2016년과 2018년 미투 이후, 문화예술계 시행 정책을 비교한 대조표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었다. 2016년만 하더라도 문화예술인 대상의 성폭력 예방교육이나 성폭력 실태 조사, 전담 신고센터 등 성희롱, 성폭력에 관련한 시행 정책이 ‘전무’했다면 2018년을 기점으로 현재의 모든 정책들이 생겨났다는 점은 분명 놀라운 변화였다. 그것은 문화예술계의 성희롱, 성폭력 문제를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로 인식했다는 반증이다.

이한본 변호사는 성희롱, 성폭력 방지 정책의 법과 제도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문화 예술계 특별조사단으로 활동했던 활동 경과 및 체육계까지 아우르는 미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문화예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해 올해 초,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법률안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두 발표자 모두, 미투 운동으로 시작된 현재까지의 법과 제도적 장치 보완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즉, 문화예술계 종사자 70% 이상이 ‘프리랜서’라는 근본적 한계, 예술인 권리보장 법안이 국회의 공전으로 법안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현실, 마지막으로 성희롱, 성폭력 신고센터 시스템 구축이 현실화되지 못한 점 등을 수차례 언급함으로써 앞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였다.

나는 법과 제도 안에서 ‘프리랜서’라는 문화예술인의 지위에 주목하였다. 사실 국공립 단체에 정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화예술계 종사자는 ‘프리랜서’라고 봐야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프리랜서는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는데 이는 문화예술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창작 행위 역시 ‘노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근본적 한계는 성희롱, 성폭력 문제뿐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상식 이하의 임금 지불 구조, 고질적인 노동력 착취 및 인권 유린 행위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양산해 왔다. 그러나 ‘그래도 막은 올라야 한다’는 ‘예술지상주의’는 모든 문제에 재갈을 물리는 마법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예술계 내의 성희롱, 성폭력 문제는 바로 이러한 법과 제도적 한계에서 파생된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문화 예술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마침내 만들어졌으나 법안 상정이나, 국회 통과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제는 현장 예술가들이 하나 된 목소리로 국회에 요구하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의 권리보장을 위한 첫 번째 법안이 이대로 국회의 책상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지지 않도록, 이제 문화예술인들이 소리를 높여야 할 이유다. 동시에 이제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법과 제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를 어떻게 둘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처럼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면,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문제 해결은 매번 근원적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예술종사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담론이다.

다음으로 주목했던 것은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신고전담센터 신설의 필요성과 체계화에 대한 문제였다. 지난해 우리가 목격하였듯, 미투 생존자들에 대한 심각한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신고상담센터는 피해 생존자의 비밀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고, 이에 따라 신속하고 체계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신고접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지금도 굳게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피해 생존자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필자뿐 아니라 그날의 모든 발제자 그리고 토론자들이 공통으로 역설했던 점은 성평등, 성인지 교육의 확대였다. 창작 현장을 넘어 예술교육 현장까지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는 우리 사회 전반의 고질적 병폐이니만큼, 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이러한 교육이 공교육의 첫 시작부터 단계적, 체계적으로 시행되어야만 근본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는 정부와 우리 사회가 긴 호흡으로 교육 전 과정에 걸쳐 많은 시간과 인력,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연구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도 넘어야 할 숙제다. 그러나 우리가 스웨덴이나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어렵지만 불가능한 도전이 아니며, 결국 사회 전체에 장기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임을 이제 우리 사회도 수용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날 포럼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발제자 박근화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통계관리 팀장의 탄식이었다. 그는 올해 들어 ‘미투 운동이 동력을 잃은 것 같다’며 오히려 더욱 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공개 발언은 분명 줄었지만, 작업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구체화 되었는데, 미투 운동 자체가 ‘시들해졌다’고 인식하는 그의 발언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투 운동의 지속성을 알리고, 문화예술계 울타리 밖의 많은 공동체와 연대를 확장하며, 운동의 진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채찍과도 같았던 그의 발언은 지금까지도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계 내 변화의 속도가 더딘 원인으로 필자는 정부산하 공연예술기관 단체장들 90% 이상이 남성인 점을 들었다. 새로운 정책의 실행 주체 대부분이 성인지, 성평등 의식이 낮거나, 변화에 대한 의지가 희박하며, 구시대의 답습에 익숙한 남성들이 다수라면, 대체 무슨 수로 변화를 꾀할 수 있겠는가? 토론자 김혜인 님은 작년 말 기준 전국 208개 국공립 문화예술기관장의 92%가 남성이라는 충격적인 통계치를 공유하였다. 너무나 오랫동안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문화예술계 운동장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 없이는 좋은 제도도 공염불로 그칠 공산이 크다. 현장 예술가들이 수동적으로 변화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난 일 년 반, 문화예술계 안과 밖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블랙리스트 사태로부터 만들어진 예술인권리보장법안에 성희롱, 성평등 관련 법률이 보완되는가 하면, 성평등, 성인지 교육이 점차 일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작업 현장에서는 농담삼아 던졌던 말 한마디를 재차 생각하고, 상대의 느낌을 되묻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모두 2018년 이전에 보지 못한 풍경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를 위한 시작은 사실 지금부터다. 예술이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예술가가 노동자로서 법과 제도 안에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해 누군가 법안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 법안의 수혜자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국회는 결코 이 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을 것이다.

포럼에서 제시한 앞으로의 과제는 다름 아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숙제다. 굳이 활동가가 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쉽다. 시간을 내어 토론에 참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동료와 나누고, 자신이 서명할 계약서나 서약서를 꼼꼼히 읽고 당당히 불평등한 것에 수정을 요구하고, 자신을 대신해 앞에서 일할 동료들에게 힘과 지지를 ‘구체적,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공연 연습에서 늘 하듯이 오늘 우리 목소리의 볼륨을 지금보다 딱 1db만 높여보자. 따로 또 같이, 언제 어디서든 ‘나는 변화를 요구한다!’고 외쳐보자. 그렇게 모인 우리의 1db들이 쌓이고 쌓여 연극계의 오늘과 미래를 바꾸는 천둥소리가 될 그 날을 상상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신나지 않은가?
[사진 제공: 한국여성정책연구소]

태그 한국여성정책연구소,미투이후,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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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박영희
극단 민들레 창단 공연으로 배우 데뷔한 후, 극단 목화에서 20대를 보냈고, 라트 어린이극장 예술감독과의 만남으로 독립예술가로서 영역을 넓혀갔다. 지난 10년 간 주로 호주와 한국에서 배우와 창작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극단 잼박스와 한호공동창작집단 컴퍼니배드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본업인 연기는 주로 해외에서, 한국에서는 연출과 극작을 주로 하면서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약칭 KTS) 작업에 착수하여 건강하고 안전한 공연예술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 중이다.
제167호   2019-09-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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