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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아닌 역사를 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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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 있는 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남성의 기록이고, 그것은 History이다. 이 명제는 이제는 다소 식상하나 여전히 자명하게 공고하다. 그렇다면 이를 전복시킬 새로운 역사 쓰기는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난 9월 3일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국제 학술회의 ‘한국영화 100주년 :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시 쓰는 영화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한 방법을 보여주었다. 페미니즘 연극제를 만들며 연극제의 역할에 대해, 또 연극사를 고민해 온 한 명의 연구자로, 학술회의에 참가한 개인적인 감상을 남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시 및 홍보배너
이 행사는 먼저 동시대 여성영화의 흐름을 살펴본 후, 여성주의 시각으로 영화를 읽는다는 것, 여성주의 영화사를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여성영화제와 여성영화의 쟁점들을 토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1부에서는 동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Metoo가 불러일으킨 시각의 정치학에 대해 짚어보았다. 전통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은 남성의 것으로, 여성은 그 안에서 보이는 대상으로 상정되어 왔다. 이러한 ‘메일 게이즈Male Gaze'를 전복하는 ‘피메일 게이즈Female Gaze'의 정의를 확장하여 아시아의 여성 영화인들이 남성적 시각을 어떻게 전복하고 있는지, 이를 통해서 어떻게 대안적 바라보기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메라의 시선은 남성의 것’이라는 말이 다만 영화의 ‘내용’에 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선 자체가 성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제작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었다. 페미니즘 연극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페미니즘 연극을 만드는 일은 연극의 제작 환경을 평등하게 만드는 일과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등하지 않은 제작 환경에서 평등을 말하는 연극이 나올 수 없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다른 여성영화제들을 중심으로, 여성 영화와 여성 영화 제작자들을 조망하는 영화제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회의 박남옥 감독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의 보석 같은 여성 감독들을 발굴해 냈고, 여성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해 왔다. 훌륭한 여성감독들이 분명히 영화계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남성감독들 만큼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다. 영화제는 이들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이들의 작품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발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모아서 상영하고 새로운 영화를 관객들과 만나게 하는 통로가 아닌, 창작자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발판이 되고 그들의 작업에 의의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2부에서는 한국 영화사에 좀 더 집중하여, 한국 영화를 비평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한국영화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아 올해 영화계에는 여러 기획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친화적인 고려’가 들어가야 한다는 영화계 내부의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국 영화 대표작을 선정하는 선정 위원에 여성을 포함하고, ‘100주년 기념 릴레이 100편’ 영화 제작에 ‘동일한 수’의 남성 감독과 여성 감독을 선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적인 평등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여성주의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이 ‘100주년 기념’이라는 담론이 한국 영화사를 무엇으로 구성해내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며, 거기에 페미니즘이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본 회의에서는 특히, 그간 영화사에서 저평가되었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여성주의 영화사 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성관객이 주가 되었던 멜로드라마는 영화 비평에서 언제나 저평가되었고, 구태의연하고 낡은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유독 멜로드라마에 대해서만 ‘여성’이라는 관객성을 중심으로 비평이 전개되어 왔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발제자는 이러한 저평가의 원인을 한국 영화사의 젠더화된 구조에서 찾는다. 특정한 작품을 정전으로 만들어 온 한국 영화사의 젠더적 특질이 멜로드라마를 낡은 장르로 구성해왔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사를 구성하는 젠더적 구조가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여성 영화사 쓰기는 가능할 것이다. 발제자는 한국 영화 100주년 기념의 기획들처럼 시혜적으로 여성 감독의 작품을 ‘포함’하는 기획이 아니라, 이미 남성적으로 구축된 영화사의 세계에 대안적인 세계를 구축함으로써만 여성 영화사 쓰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 페미니즘 영화비평은 영화라는 결과물뿐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환경 자체와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에 집착하는 것은 남성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개인을 그려내는 것은 기존의 역사 쓰기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성별만 바꾸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사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대한 근본적 질문임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영화사의 서술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과정에서 영화제가 담론을 독점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시각과 목소리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장으로서 기능하는 영화제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었다.
‘영화사’라는 역사 쓰기는 - 어떤 역사 쓰기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지를 선택하면서 시작된다. 여성들은 역사를 쓰는 펜을 잡았던 적이 없고,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그러니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His’tory를 ’Her'story로 바꿔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변하지 않는 기록의 방식 한 켠에 여성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역사를 쓴다는 것은 기존의 역사 쓰기 방식 자체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낡은 역사의 방식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역사의 틀에 우리를 집어넣어 기입하는 대신 다른 무엇을, 남성 아닌 자들의 무엇을 써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 아닌 역사가 될 것이다. 'Story' 조차 아닌 다른 무엇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역사 쓰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서울국제여성영화제,국제 학술회의,장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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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장지영
장지영
드라마터그.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일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july2413@naver.com
제168호   2019-09-2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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