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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뒷광대의 무심한 시공간을 엿보다
2013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이병복, 3막3장》

심채선_무대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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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기억의 잔상
Part 1. 아카이브 : 기억의 잔상
"카페 떼아뜨르의 문"

  • 5월의 어느 날,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무대미술가 이병복李秉福, 1927~ 의 전시 《이병복, 3막3장》을 만나러 나선다. 제1전시장 <아카이브 : 기억의 잔상>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은 1969년 명동에 오픈했던 까페 떼아뜨르의 문. 이 문으로 들어가면 긴 복도에는 한국 연극의 중심에서 반세기 넘게 오롯이 지탱해온 연극인 이병복에 대한 연극평론가 구히서, 연출가 김정옥, 연극배우 박정자의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다.

    먼저, 첫 번째 모니터에서 평론가 구히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기록을 보유한 이병복의 예술가적 성취”와 그녀의 “체질적이며 습관적으로 일상에 배어있는 부지런함으로 인한 완벽주의”에 대해 언급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모니터에서 연출가 김정옥은 “연출로서 작업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극단 대표이자 누님 같은 친구”로서 존경과 우정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이병복 무대의 특징에 대해 “빈공간의 개념으로 연기자의 움직임을 돕는 미술과 연극의 조화를 추구한 것으로, 무대가 단순한 세트의 개념을 넘어 등장인물이 되게 했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 모니터의 연극배우 박정자는 “지금도 날마다 두발과 두팔, 열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열정과 모든 시간을 바쳐 일하는” 이병복의 “휴식을 거부하는 갈퀴같이 거친 손”을 떠올리며, “언제나 선/생/님 이라는 분명한 대명사”로 기억된다고 말한다.


    이병복 전시장
    《이병복, 3막3장》전시장

    자, 그러면 이제 기억의 잔상이 남아 있는 ‘다섯 겹의 아카이브’를 더듬어보자. 연출가 김정옥과 함께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하고 남편 권옥연서양화가, 1923-2011과 명동에서 ‘까페 떼아뜨르’1969-1975를 운영했던 그 시절의 대본, 포스터, 프로그램, 전단지, 공연영상, 아이디어 노트, 신문자료, 공연신고서, 보도자료, 초대장 등 각종 기록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반세기에 얽혀있는 이병복의 연극적 삶에 대한 시공간의 텍스처texture를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고백하자면, 첫 번째 겹의 벽면에 걸린 모니터를 통해 90년대에 인터뷰한 이병복의 육성과 다양한 표정을 마주하는 내내 나는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심각하게 뭔가를 받아쓰고 있었다. “자신보다는 무대가 중심이 되길 바라는 상 차려주는 사람, 뒷광대"의 태도와 “의상도 소품도 연극 안에 등장하는 하나의 배우라고 생각한다”는 이병복의 철학을 마치 ‘초심’으로 돌아가 내 몸에 다시 새기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프라하 콰드레날레4년에 한 번 개최되는 세계 최대 무대미술 박람회 에서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 대형쇼를 기록해야 하는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의 <페드라> 공연, 관객을 맞이하기 전에 무대를 손수 비질하시고 분장실에 들려 배우들의 옷매무새를 꼼꼼히 챙겨주시던 모습들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언제나 선/생/님 이라는 대명사” 그대로다.


    이병복의 모습
    1990년대 이병복의 모습(영상자료)

    네 번째 겹에서 만난 카페 떼아뜨르의 작은 무대를 재현한 벽면에는 당시 함께 작업했던 연극동료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흐르고 “잊을 수 없는, 먼저 간 나의 벗들에게 / 유치진, 오영진, 이윤영, 추송웅, 함현진, 박영희……”라는 문장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연극, 시 낭독, 판소리, 단막공연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당시 공연법과 보건법을 위반하면서까지 70년대 소극장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카페 떼아뜨르. 그 모습을 이렇게나마 엿보며 숨을 고른다.


    바닥에 새겨진 글귀
    카페 떼아뜨르를 재현한 벽면에 비친 당시 연극계 인사들(영상자료)과 바닥에 새겨진 글귀

    이윽고, 다섯 번째 겹에는 <왕자호동> <따라지 향연> <피의 결혼> <햄릿> <왕자호동> <노을을 날아가는 새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의 작품 대본, 무대도면, 스케치, 의상 에스키스Esquisse, 작업노트, 3공 노트에 손글씨로 정리한 극단 자유의 활동자료들과 함께 결혼 후 유학한 프랑스 파리에서의 일기, 시, 드로잉 등이 시선과 마음을 붙잡아 둔다. 특히, 유학시절 원고지에 쓴 짧은 글이 눈에 띈다.

이병복의 유학시절 노트
이병복의 유학시절 노트
  • “고독을 즐길 줄 아는 고양이 /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 주머니가 헐렁해 갈 곳도 없고 / 심심하지는 않은데 왜 해가 / 이렇게 길까 / 고양이 후배가 될여면 난 / 아직도 머렇어”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죽음에 익숙한 사람, 익숙한 생활의 한편 같은 죽음”에 천착해 있는 듯한 모습으로 각인된, 나와 같은 세대가 기억하는 만년의 무대미술가 이병복에게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젊은 시절 유학생활의 고됨과 힘듦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부분이라 놀라웠다.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을 이어주는, 자연광만이 스며들고 있는 어두운 계단을 ‘뒷광대’처럼 지키고 있는 ‘종이탈’들을 따라 올라가면 <3막 3장 : 삶은 연극보다 더 진한 연극이다>라는 제목으로 무대미술가 이병복의 삶을 지탱해왔던 작업이 한바탕 펼쳐진다. 마치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은 듯, 삶과 죽음의 냄새가 겹쳐진 이 어두운 공간에 발을 들여 놓으면, 가장 먼저 붙잡는 것은 무엇보다 소리였다. 바스락바스락, 사각사각, 달달달……, 이병복의 갈퀴같이 거친 손이 한지를 구기고, 주름잡고, 풀칠하는 소리. 가위질하는 소리, 바느질하는 소리, 재봉질 소리. 이병복의 한지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자, 물질에 생명을 입히는 손길이 느껴지는 소리의 풍경을 한참동안 숨죽이며 엿본다.


    뒷광대의 독백
    이병복 노트 “뒷광대의 독백”
108개의 부처상
108개의 부처상
  • 생명의 소리를 배경으로 어둠 곳곳에 무대 오브제, 종이탈과 의상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장면들! 그들이 손짓하는 대로 따라가 그림자놀이를 하다 보니 어느덧 벽에 붙여진 한지에 덧대고 이어서 만든 긴 작업연표와 낡은 작업대 주변. 오랜 시절을 이병복과 함께 했을 작업대의 사물들 ― 라디오, 스탠드, 가죽필통, 노트, 반짇고리, 얇은 담배꽁초들이 쌓인 나무재떨이 등 ― 과 그 위에 쓰여진 “뒷광대의 독백”이라는 글귀를 대하고 망연자실……. 한참을 작업대 주변을 돌다가 간신히 발길을 돌리면 108개의 부처가 다시 한 번 ‘무심無心’하게 말을 걸며 용기를 준다.

    “얘! 잊지 말렴, 초심!”

    아! 선생님, 감사합니다!



  • 이병복 3막 3장  포스터
  • 2013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이병복, 3막 3장》
    기간 : 2013.05.03(금)∼2013.06.30(일)
    관람시간 : am 11:00-pm 8:00 ※ 월 쉼
    장소 : 아르코미술관
    관람료 : 무료
    주최/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 : http://www.arkoartcenter.or.kr/

태그 이병복, 심채선, 3막3장,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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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선

심채선 프리랜서 무대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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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5호   2013-06-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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