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네 개 정도 놓은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에는 고갈비, 닭똥집, 우동 세 가지뿐이다. 오래된 텔레비전을 보면서 각자 온 세 사람이 뭔가를 먹는 중이다. 테이블마다 원기둥 나무통에 마구잡이로 넣어 둔 수저, 학교 급식소에 나올 법한 스테인리스 컵, 덜어 먹는 접시 등이 있다. 이 씨(25세) 앞에는 다 먹은 우동 그릇이 놓여 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심 씨(68세)는 무표정으로 고갈비와 소주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조 씨(45세)는 우동 그릇과 소주를 마시지만 예민한 표정이다.
(야구 중계를 하는 캐스터 음성. “아, 오늘 양 팀 모두 점수 내기가 쉽지가 않아 보입니다.”)
- 조
-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찾으러 두리번거린다.)
- 심
- (리모컨을 들며) 이것 찾으시오?
- 조
- 맞아요. 리모컨 좀 주세요.
- 심
- (심드렁하게) 한창 야구 잘 보고 있는데 뭐요?
- 조
- 점수도 안 나는데 저깟 공놀이가 뭐 재밌습니까?
- 심
- (술을 따르면서) 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잡수쇼.
- 조
- (약간 윽박을 지르는 듯) 글쎄, 리모컨 좀 달라니까요?
- 이
- (우동을 먹다만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치며) 좀 조용히 합시다. 중계가 안 들리잖아요.
- 조
- 새파란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 이
- 아, 아저씨. 앞에 가리지 말고 비키라고요. 지금 1점을 내느냐 마느냐 중요하다고요.
(캐스터 목소리 등장. “아, 이렇게 점수를 못 내고 삼진을 당하고 마네요. 9회로 가겠습니다.”)
- 이
- 아. 자꾸 시끄럽게 하니까 찬스를 놓친 거잖아요. 빨리 먹고 나갈 것이지.
- 조
- 야! 인마. 야구 볼 생각하지 말고 네 인생이나 고민해. 네 인생이 야구로 치면 안타를 몇 번이나 쳤을 것 같으냐?
- 이
- 아저씨, 제 나이가 지금 스물다섯이니까 지금 3회도 안 왔거든요? 안타가 없었더라도 칠 기회가 많고, 지고 있더라도 역전을 할 수 있다 이거예요.
- 심
- (혀를 차며) 내 인생이 야구 몇 회인지 어떻게 나이로 가늠을 하나, 이 사람들아.
- 이
- 그럼 할아버지는 어떤데요? 할아버지야말로 이제 타석에 못 올라오시지 않아요?
- 심
- 내 나이쯤 되면 어느 정도 인간인지 수준이 보여. 난 젊었을 때도 별로 타석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것 같긴 하네.
- 이
- (비웃는 얼굴로 깐죽대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그래 놓고 뭘 운운해요. 저는 앞으로 창창하다고요. 안타도 치고, 홈런도 치고!
- 심
- 근데 내가 타석에는 못 섰다 쳐도 혼자 스윙한 적은 많아. 스윙할 때 행복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거든.
- 이
- 타석에 못 서면 혼자 스윙해봤자 점수가 안 나잖아요.
- 심
-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꼭 점수가 나야 이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 이
- 뭐지? 이 심오한 답변은?
- 심
- 내가 다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 이
- 할아버지, 무슨 일 하셨는데요?
- 심
- (숨을 한번 들이켜고)음. 나는 평생 목욕탕에서 때 미는 일을 했지. 지금이야 세신사니 관리사니 그럴싸하게 부르지만 우리 때는 그런 것도 없었어.
- 이
- 아~. 때밀이?
- 심
- ‘어이, 때밀이’ 하면 가서 두말없이 일만 했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하루에 발가벗은 사람 여럿 밀어주고 나면 그게 그거더라고. 가진 게 많든 적든 있든 없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 조
-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다고요? 대체 뭐가 같은데요?
- 심
- 어차피 사는 데 고민은 있고, 다들 사는 이유가 크진 않더라고. 배고프면 맛있는 걸 찾고, 맛있는 걸 찾으면 같이 먹을 짝이 필요하고, 짝을 찾으면 사랑을 하고, 사랑하다가 행복할 방법을 찾고, 행복을 알면 불행도 알고. 그런 거지.
- 조
- 행복과 불행이라.
- 심
- 한 꺼풀 벗기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그러니 야구면 몰라도 인생은 점수 한 점 따겠다고 종종거릴 필요가 없다는 거지. 자, 그쪽은 어떤가? 자네는 야구를 알긴 아는가?
- 조
- 야구를 아냐고요? 말을 마세요. 저는 왕년에 야구 선수였어요.
- 이
-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헐? 진짜요?
- 조
-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술을 따르며) 부상당하고 그만뒀지만 저 TV 안에도 그때 같이하던 사람들 몇 있을 겁니다. 그쪽들 진짜 경기장에 올라가면 어떤지 알아요? 그라운드에 올라간 기분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 이
- 포지션은요? 투수? 타자?
- 조
- 투수. 공을 던져 공격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돌아오는 공격을 막느라 바빴어요. 때로는 내가 던진 공이 배트에 맞고 다시 나를 맞추는 일도 있었고. 야구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계속 뭔가를 막으며 사느라 바빴던 것 같고.
- 이
- 인생에서는 뭘 막았는데요?
- 조
- 하. (일어서서 다리를 절며) 이것 봐.
- 심
- 다리를 저는군.
- 조
- 이 다리로 걸어 다니면 도처에 막힌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내 인생 통틀어 돈도 여자도 전부 이 다리에 막힌 거라고 봐. 나는.
- 심
- 거. 불편하긴 하겠군. 어쩌다 다쳤는가?
- 조
- (술을 따르지만 술병에 술이 없자 그냥 빈 병을 딱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치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다) 잊어버렸어요.
- 이
- 아저씨, 그럼 인생에 한 번도 홈런이 없었어요? 아니, 할아버지처럼 혼자 스윙을 하더라도 행복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을 거 아녜요.
- 조
- 내 인생에 홈런은.
- 이
- 언제였는데요?
(그때 텔레비전에서 캐스터의 목소리 흘러나온다. “자, 9회 말 투 아웃. 이제 마지막 공만 남았습니다.” 심 씨와 이 씨가 잠깐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이내 조 씨로 고개를 돌린다.)
- 조
- (테이블 위에 술값을 현금으로 놓고 슬그머니 일어선다.)
- 심
- 어디 가시오?
- 조
- 모르겠네요.
- 심
- (조를 동시에 쳐다보면서) 어?
- 이
- 엥? 뭐를요.
- 조
- 홈런이 있었냐고 묻는데 생각이 잘 안 나요. 아무래도 내 인생이 저 경기처럼 그렇다 할 점수도 못 따고 9회까지 온 것 같거든. 배트나 구하러 갈까 싶네요. 어차피 내 인생도 저 경기처럼 곧 끝날 텐데 그전에 뭐라도 쳐 볼까 해서.
(그때 텔레비전에서 타앙! 하고 타격의 소리가 들린다. 장내 캐스터가 소리친다. “홈런입니다. 9회 말 마지막에 홈런이 나왔습니다!”)
- 조
- (TV를 가리키며) 홈런이면 좋고, 아니어도 그럴듯한 한 방으로.
(세 사람 모두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무대의 불이 꺼진다.)
- 호들갑 작가소개
- 내가 사는 날들은 아주 사소한 일로 살고 싶었다가 또 비슷한 이유로 살기 싫어졌다.
앞으로 쓰는 글들이 살고 싶은 이유가 되기를 바라면서, 생각과 위안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가족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