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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무대 바닥에 앉아있다.
불안한 듯 주위를 돌아보며 돌연 일어난다.

여자
전 괜찮아요. 다 괜찮아졌어요.
나는 오늘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거든요.
여러분 축하해주세요. 축하해주실거죠? (귀에 손을 올리며)
왜 대답이 없나요. 네? 네? (관객석을 뚫어져라 본다.)
쳇. 뭐 상관없어요. 나만 행복하면 되죠.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다니 꿈만 같아요. 그거 아세요? 난 날 수도 있어요.
(원피스 치마 양쪽을 잡고 펄럭인다.). 어, 왜 안 되지? 아깐 분명히 날 수 있었는데….
됐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낙심한 듯 고개를 숙이며) 하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살아있을 때도 내 맘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먼지 같은 사람들에 섞여서 살았죠. 먼지 같은 사람. 그래요. 난, 먼지였어요. 왜 그런 거 있죠. 넌더리나는 수업 시간에 문득, 창문 쪽을 바라보면 떠다니는 먼지들. 걔네들은 아무도 길을 알지 못한 채 어디론가 흘러가죠.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전 그중에 하나였어요. 있으나 없으나 존재감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죠. 내가 평생 이런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있다니요. (두 손을 모으며 벅찬 표정으로 관객석을 바라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죽고 볼일이네요. 근데 왜 여기에 있냐고요? 여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 돈다.) 친구가 연극과 학생이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 그 친구 연습하는 걸 많이 봤어요. 친구는 고작 대사 한 줄이었지만 아주 치열하게 연습했죠. 목소리 톤도 바꿔가면서, 표정도 일그러졌다가 웃었다가 그러면서…. 남들은 웃었겠죠. 고작 대사 한 줄에 무슨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설친다고요. 하지만 난 웃지 않았어요. 그 애의 진심을 믿었으니까요. 커튼이 올라가고 무대에서 그 친구는 내 앞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던 대사를 내뱉었죠. 생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처럼. 미세하게 떨렸지만 아주 또박또박 말했어요. 아무도 기억 못 한다 해도 제가 기억하는걸요. 그때 그 순간 그 애의 음성, 박수를 받으러 나올 때 그 애의 표정 하나까지 모두 잊을 수가 없어요. 영영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고 보면 연극이란 건 참 매력 있어요. 그죠? 대사 한 줄을 하건, 백 줄을 하건 박수받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박수 세 번을 소리 내어 외친다.) 짝짝짝. 내가 살면서 저런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백 마디를 떠든다 해도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연극은 늘 그런 생각을 하게 해요. 그래서 종종 연극도 보러 다녔는데……. 다 한때였죠. 뭐. 살기 바빠 죽겠는데 연극 같은 건 잊은 지 꽤 됐어요. 아, 이제 죽었으니까 마음껏 보러 다닐 수 있구나.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그럼 나도 대사 한 줄이라도 좋으니 연기란 거 해볼래요. 나도 여러분께 박수받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무대에 제가 섰나 봐요. 전 아직 청춘이니까요. (신나게 무대 한 바퀴를 크게 돈다.) 청춘이란 건요. 꺼질 듯 말 듯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만 바라보고 가는 것 같아요. 그 길을 걸어가는 건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죠. 한 가지의 희망, 그리고 어떤 꿈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 그런 것 같아요.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자꾸 나약해지고, 주저하죠. 너무 힘들어. 그냥 포기해버릴까. 내가 도착하기 전에 누가 불빛을 꺼버리면 어쩌지. 이렇게 가도 어차피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때때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괜한 의심과 후회를 하곤 해요. 하지만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불빛을 향해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곳까지 가는 걸 포기할 수 없어요. 그 속에서 나는 믿음을 가지고 견디는 법을 배웠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 돌다가 불현듯 멈춘다.) 알아요. (어두운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오늘 이 무대가 마지막이란 걸. 난 바라던 불빛을 기어코 만났고, 뭣도 모르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가 이렇게 죽었죠. 청춘 같은 소리 다 집어치워요. 평생 견디다가 이게 뭔가요. 믿으면 된다면서요.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면서요. 죽고 나니 다 소용없잖아요. 난 아직 박수 같은 것도 받아본 적 없는데. (한참을 흐느끼다 말고 뭔가에 홀린 듯 먼지를 응시한다.) 어, 먼지다. (먼지를 잡으려고 노력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먼지 같은 사람. 먼지 같은 사람. 먼지 같은, 사람. 당신은 먼지 같은 사람.
나는 먼지……. 먼지였어.
(잠시 침묵.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다.)
다시 먼지 속으로 길을 떠날까 봐요.
영영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호들갑 작가소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한 장면을 위해,
일기장 귀퉁이를 접을 만큼 인상적인 오늘을 위해 살아갑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일도 여전히 글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태그 닿을 수 없는, 조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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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호   2019-04-2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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