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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의 SCENE] 90년 동안의 정찬,  그리고 눈 덮인 가지에 대해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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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in 은 극작가가 직접 희곡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꼭지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극작가의 SCENE] 이라는 코너를 통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의 특별한 순간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하여 동시대 희곡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한껏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
손턴 와일더(Thornton Niven Wilder, 1897-1975)의 『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은 짧은 분량의 단막극입니다. 처음 이 희곡을 읽었을 때가 마침 겨울이었는데, 비극 속에서도 무심한 듯 계속되는 겨울날의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작가는 이 희곡에서 90년 동안의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급속도로 전개시킵니다. 인물들은 겨울날 크리스마스 정찬을 하고 있는데, 저녁 식사 풍경 속에서 누군가는 태어나고 대부분은 늙어갑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사건 전후에 일상적 행위로서 식사만이 지속됩니다. 죽음의 문과 탄생의 문을 통해 등퇴장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죽음과 탄생은 크랜베리 소스를 끼얹는다거나, 흰 고기를 더 먹을지 묻는 식사 자리의 소소한 행위들과 비슷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은 인간의 삶 전체를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사건으로 요약한 다음, 그 두 사건의 영향력 아래 가장 평범해서 빛나는 날들을 골라낸 희곡처럼 느껴졌습니다. 손턴 와일더의 다른 희곡 『우리 읍내』에서 ‘무대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대 감독
… 그래서 저는 이 연극 대본 한 권을 정초석에 넣을까 합니다. 천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사소한 진실을 아는 것이 베르사유 조약이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자라나고 그리고 결혼하고 살다가 죽는 것 말입니다.
손턴 와일더는 『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에서도 일상적 행위들의 반복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희곡 안에도 ‘사건’이 될 소재들은 충분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죽고, 때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무심코 말했던 사람의 아들이 군대에서 사망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적 ‘사건’을 둘러싸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폭발적인 감정이나 갈등은 없습니다. ‘사건’의 비일상적인 감정과 행위들을 재현하는 대신, 사건 전후에도 계속되는 일상 풍경과 ‘식사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결국 ‘사건’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희곡의 인물들에게도 마땅히 주어져야 할 일상이 있고, 우리에게도 마땅히 주어져야 할 일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을 무너뜨리는 ‘사건’의 영향력과 상처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희곡에서 우연한 상실과 헤어짐, 소멸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예외 없는 생의 규칙을 보여줍니다.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이 규칙은, 깨끗하게 요약된 삶의 진실 같았습니다. 무심해서 아팠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습니다. 희곡 안에서 죽음 다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슬픈 일이 생겼고, 또 슬픈 일이 생길 거야. 그렇지만 올해도 크리스마스는 챙기자!’라는 낙관, 이 이상한 낙관이 제가 이 희곡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무심하고 비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아주 단단한 낙관의 힘이 이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사는, 90년의 세월 동안 세 명의 인물들이 ‘얼음으로 덮여 있는 가지’에 대해 동일하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루시아
아주 조그만 가지까지도 얼음으로 덮여 있어요. 그런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죠.
제네뵈브
날씨가 기막혀요. 아주 조그만 가지까지도 얼음으로 덮여 있어요. 그런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죠.
레오노라
아주 조그만 가지까지도 얼음으로 덮여 있어요. 그런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죠.
인생에서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맑은 겨울날 가지 위에 덮여있는 눈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이 말을 물려받은 것처럼, 기적처럼, 그 해 열린 눈 덮인 가지에 대해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서 생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무대에 설치된 탄생의 문과 죽음의 문으로 배우가 들어서고 나가는 방식으로 탄생과 죽음이 은유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배우가 ‘지시된 순간에 그저 아무 말 없이’ 흰 가발을 쓰면, 무대 위의 시간이 급속도로 흐르고 인물이 노화한다는 설정도 좋았습니다. 이 설정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정들은 조금 투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연극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새삼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음의 문으로 퇴장한 사람의 이름을 누군가가 물려받고, 또 그가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90년 동안의 크리스마스 정찬이 무대 위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인물들과 함께 90년 동안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고 기억합니다. 그렇게 이 희곡은 저에게 거대한 ‘사건’의 영역에 혼자 존재하지 않는 방법, 누군가에 대해 함께 말하며 함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인생에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이 희곡을 꺼내 읽으며, 얼음으로 덮여있는 가지를 감각할 수 있는 단단한 낙관을 되찾고 싶습니다.

* 인용된 대사는 아래의 판본을 따랐습니다.
  • 손턴 와일더, 오세곤 옮김, 『우리읍내』, 예니, 2013
  • 손턴 와일더, 김성희 엮음, 주신자·최계자 옮김, 「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 『현대 명작 단막극 선집(연인희곡총서2)』, 연극과 인간, 2000

 

태그 장영,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손턴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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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

장영
극단 프로젝트 414 연출부, 독립연극잡지 이화연극의 필진으로 활동했다. 2018년 국립극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희곡공모에서 『G의 영역』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playplayghost@gmail.com
제168호   2019-09-2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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