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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의 SCENE] 좁은 감방 안, 단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우주보다 더 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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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in 은 극작가가 직접 희곡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꼭지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극작가의 SCENE] 이라는 코너를 통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의 특별한 순간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하여 동시대 희곡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
희곡 『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마누엘 푸익(Juan Manuel Puig Delledonne, 1932-1990)이 1976년 스페인에서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83년, 푸익이 직접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했고 이후 다수의 프로덕션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이야기는 두 명의 죄수, 26세의 정치범인 발렌틴과 37세의 미성년 성추행을 저지른 몰리나가 지내는 감방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서로에 대한 혐오로 인해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반된 두 사람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하나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다룬다.
몰리나는 생물학적 남성이나, 스스로를 여성이라 규정짓는다. 그는 아름답고 고귀한 미술품과 소품을 사랑하고 영화와 볼레로를 즐긴다. 발렌틴은 부르주아로 태어나 자기의 출생을 혐오하는 급진적 혁명가다. 그런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그가 신봉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 정확히는 남성 중심의 진보사회 안에서 천박하게 취급되는 여성성을 옹호하면서 그것을 취득하려는 매우 비이성적인, 이해할 수도, 이해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이 희곡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전혀 다른 유형의 두 인간이 서로에게 닿는 것. 푸익은 작품을 통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닿는 행위, 혹은 그 과정이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이자 가장 큰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은 작가의 세팅, 희곡의 공간적 배경인 감방을 통해 물리의 제한성을 획득한다. 동시에 제한된 공간 안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고문의 고통을 비롯한 현실을 잊게 만든다. 즉 두 사람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의 영역인 영화(예술)를 통해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잊고, 현실을 더 잘 살아가게 되며, 정확히는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된다.
우리는 연극을 왜 보는가? 연극예술가에게 성서나 다름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연극, 정확히는 비극이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라 했다. 쉽게 풀이하면 연극이 우리 삶의 모방이라는 뜻일 테다. 반연극,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하는 연극을 만들고 새로운 연극론을 제시한 이들 중 가장 유명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관객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나아가 그들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연극 작업에 임했다. 결국 연극이든 반연극이든 무대를 사용하는 이야기의 목표점은 현실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일 테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에 맞서 싸우는 발렌틴은 허구로밖에 보이지 않는 영화에 빠져 있는 몰리나를 무시한다. 몰리나는 현실과 정치, 투쟁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진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발렌틴이 아니라 몰리나였을지도 모른다. 발렌틴의 싸움은 이념의 현실화를 위한 투쟁이다. 그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고 죽는다. 물론 발렌틴은 행동한다. 그러나 행동의 근원은 결국 ‘생각’이므로 그가 깔보았던 몰리나의 허구와 다를 바가 없다. 혹자는 발렌틴의 생각은 정치적인 사상이므로 몰리나의 것보다 고귀하고 가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인생을 사는 인간은 누구인가? 발렌틴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었을 때 그를 도운 것은 누구인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 자는 누구인가? 타인을 만나 마음을 열고, 그를 돕고, 마침내 그를 위해 이전까지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숭고한 선택을 한 진짜 인간은 누구인가? 발렌틴이 아니라 몰리나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사는 인간은 몰리나가 아니라 발렌틴이었을지도 모른다.
희곡 『거미여인의 키스』는 단 두 명의 인물을 통해 이렇듯 수많은 아이러니를 솔직하게 보여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닿는 것, 그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을까? 결국 이 희곡은 미성숙한 아이가 그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존재, 타인을 만나 소년이 되고 어른이,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되는 성장 이야기인 것이다.
독자는 두 인물의 드라마를 바라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이후에는 대부분을 발렌틴에 이입해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 변모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 작품이 종이 위 활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거미여인의 키스』라는 연극 세계의 일원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희곡을 읽는 시간 동안 독자가 진실로 몰리나와 발렌틴 사이, 혹은 몰리나나 발렌틴 그 자체로 존재하게끔 만든다. 극 중 몰리나는 이렇게 말한다.
‘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발렌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 나는 없고……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현실의 모방이라는 연극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어찌하여 희곡을 읽고 쓰는 것일까? 우리는 결국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에게 나라는 존재를 보내고, 또 그 타인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축축하고 어두운 감방 안에서 만나는 우주보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인간에게 닿는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할 희곡, 『거미여인의 키스』다.

* 인용된 대사는 아래의 판본을 따랐습니다.
  • 마누엘 푸익, 송병선 옮김,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2000, 289쪽
  • Manuel Puig, English by Ronald Christ, 『Kiss of the Spider Woman and Two Other Plays』 W. W. Norton Company, 1994

 

태그 마누엘 푸익,거미여인의 키스,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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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박현정
 쓰고 연출하는 사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연극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김은성 선생님을 비롯한 다섯 명의 동료 극작가들과 함께 하는 플레이업 아카데미에서 신작 희곡 <증인들>을 집필 중이다. facebook.com/hjpark920304
제170호   2019-10-2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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