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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의 SCENE] 황무지에 피어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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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in 은 극작가가 직접 희곡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꼭지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극작가의 SCENE] 이라는 코너를 통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의 특별한 순간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하여 동시대 희곡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 1968)의 『화염』은 영화 <그을린 사랑>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대목을 소개하려고 한다.
9장
[읽기, 쓰기, 셈하기, 말하기]
나지라
이틀 후면 사람들이 날 묻겠지. 나를 땅에 매장하겠지,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내 몸에 한사람씩 물 한 양동이를 뿌려 주겠지,
하지만 묘비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쓸 줄 모르기 때문이야.
넌, 나왈, 배우게 되면, 돌아와서 묘비에 내 이름을 새겨 다오. “나지라” 라고.
내 이름을 새겨 줘, 왜냐하면 난 내 약속을 지켰으니까.
나는 떠난다, 나왈. 내겐, 모든게 끝났어.
우리,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의 여인네들, 모두가 아주 오랫동안 분노에 빠져 있었 어. 난 내 엄마에게 화가 났고 네 엄마는 내게 화가 났으며, 너 또한 네 엄마에게 화가 났지. 너도 네 딸에게 분노의 유산을 물려주게 될 거야.
이 끈을 끊어야 한다. 그러니 배워라. 그리고 떠나 버려.
네 젊음과 가능한 한 모든 행복을 안고 마을을 떠나. 넌 계곡의 자궁이야, 나왈.
너는 이곳의 관능미와 향기야. 그걸 가지고, 네 엄마 뱃속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이 곳을 벗어나라. 읽고, 쓰고, 셈하고, 말하는 걸 배워. 생각하는 걸 배워라.
나왈. 배워야 한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노인은, 열여섯 나왈에게 불행의 그림자를 끊어 내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배우라고 일러준다. 마치 황무지에 심을 종자를 건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자신을 피우는 씨앗일 것이다. 아무도 쓰지 못했던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것처럼, 스스로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클라리사 에스테스도 말했듯이 말이다.
여성은 자신의 그림자를 미행함으로써 오랫동안 잃고 있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잃었던 보물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꿈이나 환상, 오래된 동화나 이야기 등 영감에서 우러나온 창작물 속에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온 세계의 여성들은 모두 과거에 잃었던 보물을 꿈꾸며, 잠재의식에서 솟아나올 새로운 보물을 기다린다. 그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꾼다. 그들에겐 길을 알려주는 지도가 있고, 서로 북돋아주는 동지가 있으며 꿈을 통해 서로 단결한다.
 
- 클라리사 에스테스, 손영미 옮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이루, 2013, 393쪽
나왈은 전쟁 속에서도 배우고, 생각하고, 썼다. 나지라의 비석에 이름을 새기고,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진실과 마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지켜왔던 침묵이 깨질 수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주 잃어버리고 산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를 제일 많이 잃어버릴 때가 많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처럼 뒤돌아보지도, 앞을 향해 멀리 보지도 못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잡초 하나 피어나지 않는 마음의 황무지가 찾아 올 때, 스스로의 이름을 꽃피워야 한다. 나지라가 나왈에게 불어넣어 준 뜨거운 지혜와 용기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야 한다. 전쟁 같은 삶에 쫓겨 우리의 마음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나의 소중한 이름을 잃지 않도록.
*인용된 대사는 아래의 판본을 따랐습니다.
와즈디 무아와드, 최준호 옮김, 『화염』,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태그 화염, 장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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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은

장주은

2016년 10분희곡페스티벌 <겨울나기>, 경상북도 문화콘텐츠 진흥원 웹드라마 <우리아배>, 2018년 10분희곡페스티벌 <농담>의 작가. wkdwndms5555@naver.com 

 

 

제171호   2019-11-0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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