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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의 SCENE] 핑크빛 리본 같은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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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in 은 극작가가 직접 희곡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꼭지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극작가의 SCENE] 이라는 코너를 통해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의 특별한 순간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하여 동시대 희곡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한껏 누려보시길 바랍니다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 나와 다른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심장 소리가 마치 내 것과 같이 익숙하고, 손을 맞잡았을 때에야 비로소 내 육체가 완성되는 것만 같은 이 사람. 몸짓, 소리, 심지어 체액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것 같은 이 사람. 인생에 한 번쯤 ‘이 사람’을 만난다면 이런 질문이 들 것이다. 도대체 누구일까? 어디로부터 왔을까? 믿을 수 있는 인간일까? 인생에 한 번쯤 ‘이 사람’을 보낸다면 이런 질문이 들 것이다. 사랑은 흩어지기 마련일까? 흩어짐 앞에서 애달파 하는 인간은 무엇인가? 사랑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로 가는가? 지난 사랑은 어디에 있나?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참으로 이상하고 떨떠름한 일이다. 자고로 인간은 꽤 능숙하게 정답을 찾는 동물인데, 인생의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그저 질문만 남긴다. 답을 할라치면 또 틀렸다. 이런 이상한 게임. 그 속에서 우리는 상처 받고, 상흔 속을 헤치면서 살아간다. 환상이 계속 찢어지고, 그 틈 사이로 다시 새어 나온다. 아무리 ‘쿨병’이 만연하다 하지만, 사랑은 이 순간에도 은밀하게 인간을 점령하고 있을 거다. 사랑이 한바탕 꿈이고 속임수라 해도, 누군가가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참치김밥을 내어주는 아주머니, 아메리카노를 기깔나게 내리는 카페 직원, 늘 초록색 모자를 눌러 쓰고 편의점 새벽조를 맡는 알바생, 그들의 일상을 그저 직업적으로 상상하는 것 보다, 사랑과 연관하여 상상하면 괜히 입꼬리에 스윽 웃음이 걸린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도 더 마음 쓰게 되는가 보다.

『일루젼』에는 두 노부부가 나온다. 데니와 산드라, 그리고 알버트와 마가렛. 희곡은 이들의 인생 끝자락에서 시작한다. 죽음의 순간에서 공교롭게도, 그들의 사랑은 서랍 속에 오래 두어 엉킨 리본처럼 복잡해져 버렸다. 데니는 죽으면서 산드라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사랑은 책임이라고. 산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다. 곧이어 그녀가 죽을 때, 알버트를 부른다. 알버트, 나 사실 평생을 혼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오직 너만 사랑했어.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산드라는 죽는다. 충격을 받은 알버트는 아내(마가렛)에게 산드라의 유언을 통해 이제야 진짜 사랑이 뭔지를 안 것만 같다고, 자신이 산드라를 사랑해 온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에 마가렛은 사실은 자신 역시 데니와 오랜 연인 관계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런 엉킴을 극 전반에 제시하고는 그들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거대한 고독과 환상의 시절. 근본적이라서 은밀하기까지 한 그런 고독 속에 젊은 그들이 길을 잃고 서 있다. 홀로 환상을 보기 때문에 고독하고, 그 환상을 함께할 누군가를 찾기 때문에 사랑한다.
데니는 어릴 적에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우주선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자신을 믿지 않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아름다운 우주선과 함께 고독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하느라 오랫동안 애를 썼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선 사랑이 필요했다. 연인, 산드라가 필요했다. 그들은 결혼한다. 부부가 된 산드라와 데니는 등산을 한다. 그리고 노을 속에서 어린아이의 분홍색 리본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산드라가 데니에게 말한다.
산드라
노을 속에 어린 아이 리본이 떠 있어. 데니, 보여?
데니
진짜가 아니잖아.
산드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절망을 볼 수 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
그걸로 자기 자신을 위로해. 그리고 지평선의 분홍빛 선은 내게 그런 거야.
산드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게 사랑은 그런 거야. 분홍빛 선 같은 거야.’
우리 인생은 고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환상으로 차 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시간 동안, 그것을 함께 지켜봐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꼬마 때 본 우주선에 대해,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분홍빛 리본에 대해 말하면 옆에 앉아 들어줄 사람.

『일루젼』은 수많은 환상이 명멸하는 인간의 인생을 보여주고, 그것을 함께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알버트는 오십이 되어서야 난생 처음 학생에게 받은 대마초를 시도해보고 (주의, 그가 살던 곳은 한국이 아닌 러시아이다!) 온 세상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본다. 칠판도, 책상도, 집에 오는 길의 돌들도 부드럽다. 그리고 아내에게 와서 세상이 부드럽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딱딱해진다.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세상이 부드럽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가렛, 나는 딱딱한 망치야!.”

희곡의 끝은 이렇다. 알버트는 산드라의 유언을 듣고, 며칠이 지난 후 문득 깨닫는다. 죽어가는 한 여자의 진심에 취해 잠깐 동안 환상에 취했다는 것. 사실은 평생 마가렛 만을 사랑했다는 것. 늙은 몸의 그가 숨을 헐떡이며 아내에게 돌아올 동안, 마가렛은 자살한다. “알버트. 나는 평생 당신을 사랑했어. 데니와 연인이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어. 내가 죽는 것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죽는 이유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이야.” 알버트는 마가렛을 떠나보내고, 혼자 외롭게 살다가 죽는다. 그의 유언은 이것이다. “움직이는 우주에 일말의 영원이 있을 수 있을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과 환상 속에서 작은 어린아이처럼 길을 헤매던 노인들의 사랑이야기. 엇갈린 고백과 진실. 인간이 마주해야 하는 환상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엇갈림과는 다른, 본질에 대한 무서운 슬픔과 회고를 가져다준다. 환상을 함께 목도하던 동반자는, 그것을 깨는 파괴자가 되었다가, 이윽고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 사랑은 환상이었다가, 환상을 잡아먹은 무언가가 되어 침잠하는 것이다. 『일루젼』은 정확하게 환상과 사랑의 예측 불가능한 교차점 위에 올려 진 인간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 찾는다. 분홍색 리본을 함께 볼 누군가를, 우주선의 비밀을 털어놓을 누군가를, 그리고 갑자기 부드러워지는 세상 속에 있을 누군가를. 꿈이 두렵거나, 꿈을 깨기가 두려워도, 늘 침상에 누워야 하는 인간의 운명처럼.
*인용된 대사는 이반 비리파예프(Ivan Aleksandrovich Vyrypaev, 1974)의 희곡 『일루젼』(Faber & Faber, 2012)을 안정민 작가가 직접 번역하였습니다.

 

태그 일루젼, 안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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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민

안정민 극작가
작가이자 연출로 활동하고 있는 안정민은 연극이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곳,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보이기 하는 장소라고 믿고 있다. 현재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대표를 맡고 있다. <뜻밖해>, <고독한 목욕>, <이방인의 만찬 - 난민연습>, <제2의 창세기>, <이방인의 만찬>, <구본장 벼룩아씨> 외 다수의 연극을 극작, 연출하였다. 
제173호   2019-12-05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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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번역에 감탄사가 나옵니다.

2019-12-29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