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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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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미은 (29)
경호 (30)

장소
인천국제공항 터미널

늦은 밤. 국제공항 터미널이다. 짙게 내려앉은 안개 탓에 지연된 비행기. 탑승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그 사이 미은과 경호가 있다. 경호는 데스크에 무언가를 물어보고 미은에게 돌아온다. 손에는 수첩 하나 쥐고 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미은. 미은은 돌아오는 경호의 표정을 보고 답을 예상한 듯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미은
가자.
경호
응?
미은
집에 가자고.
경호
안개가 걷히고 있대. 곧 이륙할 것 같다고 하더라.
미은
넌 이 밤에 안개가 보이니?
경호
그건 아니지만. 항공사 직원이 하는 말이…!
미은
직원 말대로라면 우린 이미 도착했어야 해.
경호
이런 일 종종 일어나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미은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기다려.
경호
… 나 때문에 가는 거 아니잖아.
미은
난 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경호
미은이 네가 계속 마음잡지 못하니까!
미은
애처가 나셨네.
경호
솔직히 말해 봐.
미은
뭐를?
경호
동창회 나가면 너만큼 결혼 잘한 애도 없지? 신랑이 요리 잘해, 빨래 잘해, 못 하는 게 뭐야?
미은
반어법이야? 역설법이야?
경호
둘 다 아니야.
미은
말이라도 못하면.
경호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응?
미은
불안해. 예상은 다 빗나가고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경호
이번 기회도 놓치면 정말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몰라. 그리고 또! 몽골이잖아.
미은
몽골이지.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경호, 미은 앞에서 연기하기 시작한다.

경호
(여자 목소리로) 저기요. 가방 밑 부분이 터지려고 해요. 여기가 터져서 물건들이 다 쏟아지려 한다고요!
아, 빨리 가방 내려놔 봐요. 제가 꿰매드릴게요. 어서요!
미은
넌 그 때 내가 너한테 반해서 말 건 거라고 생각하지?
경호
아닌데.
미은
그럼 됐고.
경호
나 사실. (웃으며) 아니다.
미은
뭐야, 빨리 말 해!
경호
… 나 사실. 너 한국 말 잘하는 몽골인인 줄 알았다?
미은
뭐?
경호
그 때 몽골 전역에 한류가 난리도 아니었잖아.
미은
그래도 그렇지 자기 부인더러 몽골인이라는 말을 하냐. 지는 중국 소수 민족같이 생긴 게.
경호
뭐?
미은
머리는 며칠 째 안 감았는지 기름이 뚝뚝 흘러내리고, 옷은 후질근 해가지고…
손톱 가득 낀 검은 때는 또 어떻고!
경호
그게 내 매력이었어.
미은
매력은 얼어 죽을.

이때, 갓난아기 우는 소리 들린다.

미은
시끄러워. 밥을 얼마나 먹이면 저렇게 큰 소리로 우는 거야?
경호
우렁차네. 사내아이인가?
미은
요즘 부모들은 배려심이 없어.
경호
아기가 부모 마음 따라 우는 것도 아니잖아.
미은
저만한 애가 해외 여행가서 뭘 보고 기억한다고. 다 부모 이기심 인거야.
경호
에이. 그건 좀 아니다.
미은
뭐?
경호
애 가진 부모는 그럼 비행기도 못 타?
미은
타지 말아야지! 남한테 피해 주면서 저렇게 가고 싶을까. 저런 애들이 생긴 건 또 엄청 못 생겼어요.
경호
야!
미은
깜짝이야.
경호
어른이면 어른답게 좀 행동해.
미은
(웃는다)
경호
왜 웃어?
미은
웃기잖아. 어른답게 행동하라는 말. 그것도 너한테서.
경호
…….
미은
근데 어른다운 행동은 어떤 거야?

사이

경호
승무원들 탑승하는 거 보니 곧 이륙하겠다.
미은
나 배고파.
경호
(가방 뒤지며) 아까 먹다 남은 샌드위치 있던데, 줄까?
미은
식었는데도 맛있네.
경호
천천히 먹어. 여기 물도 같이 마시고.

사이

미은
근데, 좀 위선자 같다는 생각 안 들어?
경호
누가?
미은
누구긴. 우리지.
경호
…… 우리 그 이야기 여행 중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미은
알지. 아는데.
경호
하지 않기로 했으면 하지 말자.
미은
그 와중에 또 맛있는 걸 골라요. 터키 샌드위치에 양배추와 토마토는 빼주시고요.
콜라는 오렌지 주스로 바꿔 주세요. 넌 뭐 시켰더라? 이탈리안 이었나? (웃으며)
참 나. 이탈리아에 대해 개뿔도 모르는 주제에.
경호
무슨 말이야.
미은
부끄럽지도 않냐?

공항에 울리는 안내음.

경호
안개 걷혔나 보다. 여권 꺼내.
미은
(혼잣말 하듯이) 지가 몽골을 다시 가면 어떻게 할 건데.
뭐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새 삶을 살기라도 할 생각이야? 웃겨 진짜.
경호
(쳐다본다)
미은
무서워라.
경호
(미은 일으키며) 일어나. 우리 때문에 사람들 기다릴 거야.
미은
(뿌리치며) 역겨워.
경호
뭐?
미은
넌 너밖에 모르는 인간이잖아. 그런 인간이 다른 사람들 걱정은 무슨.
경호
미안하다.
미은
네 표정 아직도 기억나.
경호
무슨 표정.
미은
내가 아기 생겼다고 너한테 말하던 날.
경호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미은
다 너 때문이야.
경호
그래. 알겠어. 다 나 때문이니까 우선 비행기 타.
미은
우리 예진이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빠 될 사람이 산이며 바다며, 이 나라 저 나라 정처 없이 떠돌기나 좋아하고.
경호
(미은의 짐 챙기며) 언제는 내가 모험심이 강해서 좋았다며.
미은
하나만 물어보자. 정말 아기를, 나와의 결혼을 원하긴 했었냐?

경호는 미은의 짐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경호
그러는 넌 얼마나 좋은 엄마였는데?
미은
뭐?
경호
창피하지도 않냐?
미은
소리 낮춰.
경호
애 가진 것도 모른 채 방사선 촬영이나 하고.
미은
병원에서 큰 문제 아닐 거라 했어.
경호
그럼 술 담배도 큰 문제 아니라고 했겠네?
미은
애 생긴 거 알고부터는 하지 않았잖아.
경호
자랑이다. 애 생긴 것도 두 달 동안 몰랐으면서.
미은
지금 예진이 죽은 게 내 책임이라는 거야?
경호
누구의 탓을 가리자는 게 아니라.
미은
그래서. 이혼하고 싶니?
경호
뭐라고?
미은
묻는 거야. 이혼 해 줄까?
경호
네가 왜 이 말 안 하나 했다.
미은
너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아프리카까지 찍고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 솔직해지자.
예진이만 안 생겼어도 우리 결혼 안 했을 거고 넌 지금쯤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을 거 아니야.
경호
그만하자.
미은
맞잖아! 너 처음부터 책임 따위 지고 싶지 않아 했잖아. 책임감 같은 거 없는 애잖아!

잠시 침묵.

이륙 전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마지막 알림 방송이 울린다. 경호와 미은을 찾는 방송.

경호
이리 와. (달래며) 곧 좋은 아이가 다시 찾아 올 거야.
미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경호
아기는 또 가질 수 있잖아. 나한테는 네가 먼저야.
미은
(뿌리치며) 미친놈.
경호
뭐?
미은
넌 우리 예진이 아빠 아니야. 평생 그렇게 살다 확 죽어버려!

순간 손이 올라가는 경호. 겁먹은 미은은 몸을 움츠린다. 경호, 손을 내리고 의자에 앉는다.
조금 뒤, 경호 일어나 미은 앞에 선다.

경호
일어나. 가자.
미은
안 간다고 말했지.
경호
집으로 가자고.
미은
(올려다 본다)
경호
(수첩 뒤지며) 표 바꿔 올게.

이 때, 경호의 수첩에서 신생아 사진이 미은 앞에 떨어진다. 하지만 경호 눈치 채지 못한다.
경호가 표를 바꾸러 간 사이. 미은은 신생아 사진을 계속 바라본다.

경호
이륙 확정 된 뒤라 일부만 환불 해준다는 거 우겨서 100퍼센트 받아 냈어. 돈까지 손해 보면…
미은
(내밀며) 이거 뭐야?
경호
이리 줘!
미은
뭐냐고!
경호
(등 뒤로 숨기는)
미은
… 1년이나 지났잖아. 병신같이 이걸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어! 나도 다 태워 버린걸.
경호
(사진, 수첩에 다시 꽂으며) … 내 첫째 아기니까.

미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경호도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따라 앉는다.

한참 뒤.

경호
(손잡으며) 일어나. 집에 가야지.

미은을 안아주는 경호. 경호를 안아주는 미은. 조금 뒤, 공항 게이트가 닫힌다.
여전히 게이트 앞 의자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커플. 경호와 미은이 있다.

막.

호들갑 작가소개
<안개>의 작가 황혜정은 1987년 한국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고,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발발하던 그 해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현명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주말마다 대학로에서 아동극이나 인형극을 많이 보고 자랐다. 그녀가 연극을 보았던 90년대는 한국연극이 가장 젊고 생동하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연극을 접한 어린 시절에 이어 현재는 연극원 극작과에 재학하여 희곡을 공부중이다. 작년 신작희곡페스티벌(제16회)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작품으로 최종 당선되어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지금은 크고 작은 작품을 가리지 않고 무대에 올릴 희곡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편집위원 정진세)

 

태그 안개,황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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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희곡릴레이는 공모를 통해 작품을 접수합니다.상반기와 하반기, 연2회 작품 공모를 시행하며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사항을 통해 안내 드립니다. 신진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55호   2014-11-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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