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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여자

무대 한 쪽에 통기타가 놓여 있다. 장소는 나도 모른다. 여자는 객석의 어딘가를 보고 말한다.

여자
그래요?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구요?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내가 기억하는 시간들 속에 당신이 살아 있고 그렇다면 당신도 무조건 나를 기억해야 하니까요. 기억해내야 한다는 말도 웃겨요. 당연한 거예요. 요리할 때 괜히 흥얼거리거나 싫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꼭 그 사람이 없을 때 한다거나 자기 직전에 즐거운 일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거잖아요. (한 쪽에 놓인 통기타를 집어 들고) 그래요. 이 통기타를 보고 떠오르는 것 없어요? 제가 취직 면접에 다 떨어지고 낙담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당신이 우리 집을 찾아 왔었잖아요. 이 통기타를 들고. 당신은 초인종을 누르고 아주 큰 소리로 당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 여보세요. 여보세요. 기척이 없어 나 직접 왔어요. 문을 열어주세요. 마음의 문이든 이 집 대문이든. 아직은 해가 떠있고 당신은 죽지 않고 살아 있네요. 워우워. 워우워. 문을 열어주세요. 주민신고로 경찰이 찾아와 우릴 유치장에 쳐 넣기 전에. 저는 황급히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고 당신은 문이 열리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내 목덜미를 휘어잡고는… 그렇게 그 날이 우리의 첫, 키스 날이 된 거잖아요. 맞아요. 그 때부터 저는 기타소리에 빠져들었어요. 당신의 노래보다, 그 노랫말보다 기타가 얇은 몸들을 튕기고 튕기며 내는 가벼운 소리가 더 제 마음에 사무쳤어요. 그래서 그 뒤로 매일 같이 당신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했잖아요. 그 가녀리고 불안한 소리를 듣고 싶다고… 당신은 그래서 매일 밤 전화로 기타 소리를 들려 줬죠. 언젠가부터 기타 소리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게 됐고 좀 더 뒤엔, 그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한 것인지 당신의 기타 소리를 향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었어요. 당신은 나를 만날 때 언제나 손가락 끝에 세 개에서 많게는 여덟 개까지 부푼 물집을 달고 있었어요. 어느 날은 제가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그 물집이 좋은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었죠. 그러자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좋은 소리는 네가 듣는 것이지 내가 내는 것이 아냐…….
(걱정스런 얼굴로) 이제 좀 기억이 나요?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통기타잖아요.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홍콩에서 파는 에그타르트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홍콩에 가서 사서 그날 저녁에 먹게 해줬잖아요. 제가 소지섭 좋아한다고 하니까 소지섭 관련된 기사는 전부다 파일에다 스크랩해서 매달 선물로 줬었잖아요. 루돌프 인형을 갖고 싶다고 하니까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솜이랑 천 사다가 직접 만들어줬었잖아요.
(슬픈 표정에서 서서히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뀌며)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니요. 이름도 얼굴도 내가 말한 모든 우리의 추억이 하나도 알 수 없다니요. 그건, 우리의 과거를 모욕하는 말 아닌가요? 생각해보세요. 지난 5년 간 제 삶에서 당신을 빼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 5년을 부정한다면 제 삶은 어디로 흩어져 버리는 건가요. (남자의 확신 없는 표정을 보다가 가망이 없자 무너져 내리듯) 이러지 마요, 제발. 무섭잖아요. 3년 전에 우리 둘이 캠핑 갔을 때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때만큼이나 무서워요. 우리 춘천 산 깊은 곳에 몰래 올라가 계곡 근처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냈잖아요. 그 때 커피 마시려고 미니버너를 꺼냈는데 가스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성냥이든 라이터든 구하러 간다고 혼자 산 밑으로 내려갔죠. 당신하고 함께 있을 땐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칠흑 같은 어둠, 나무들이 서로 스쳐 내는 소리, 바위에 거칠게 부딪히며 흐르는 물소리가 저를 압도해왔어요. 당신이 가고 난 직후부터 나는 무척 두려워졌어요. 금방 돌아올 걸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자연을 직면하고 있으니 어디론가 숨고 싶고, 어떤 용서를 빌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구요. 20분 쯤 지나서 돌아온 당신은 랜턴 불빛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텐트 막을 열어 젖힌 채 저를 넋 놓고 바라봤었죠. 제가 당신을 가만히 보다 ‘땡’ 이라고 하자 그제야 당신은 말했죠. 정령들에게 홀린 줄 알았어. 그때만큼이나 두려워요. 왜, 왜 아무런 말이 없어요! 그때만큼이나 두렵다고요. 이제라도 장난이었다고 말해줘요. 오늘 아무 기념일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하루란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단 말이에요.
…그래요. 알았어요. 나는 점점 한 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어요. 이미 다리, 몸통, 팔은 모두 바스라졌구요. 조금 더 있으면 온 몸이 다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여기에 내가 있나요? 당신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게 맞나요? (주저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다) …… 기타 소리가 듣고 싶어요.
호들갑 작가소개
<기타소리>를 쓴 허선혜 작가는 1991년 1월 10일 경기도 안양의 신영순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1991년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여사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네이딘 고디머가 문학상을 받은 해로, 온갖 종류의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며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던 포스트-모던한 90년대의 기운이 생동하던 때였다. 허선혜 작가는 트럭 밑이나 남의 집 옥상에 불쑥 들어가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 궁금한 건 다 해보며 남자아이처럼 막 자라났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른 세계관으로 사회와 마찰을 일으켰으나, 그것은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확인받는 당연한 수순에 불과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형제들이 작가이기에 자연스레 성장과정에서 글쓰기를 받아들였다. 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문예창작을 전공했는데, 개똥 보듯 하는 글쓰기 2년, 신줏단지 다루듯 하는 글쓰기 2년을 보냈다. 맘먹고 제대로 써본 희곡 <햄스터살인사건>이 ‘청춘 나눔 창작 연극제’(2013)에서 성인부문 대상을 받음으로 얼떨결에 연극계에 데뷔했다. 지금은 우연히 빠진 희곡에 오히려 매력을 느껴 연극작업에 골몰하고 있고, 뮤지컬과 전통음악극을 쓰기 위해 준비 중이다. 자기만의 선명한 색깔을 뿜어내는 그녀, 혜성처럼 연극판에 나타난 작가의 이름 허! 선! 혜! (편집위원 정진세)

 

태그 기타소리,허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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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희곡릴레이는 공모를 통해 작품을 접수합니다.상반기와 하반기, 연2회 작품 공모를 시행하며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사항을 통해 안내 드립니다. 신진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62호   2015-02-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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