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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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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봄에서 겨울.

장소
수경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비닐하우스와 그 비닐하우스 앞의 밭

등장식물과 인물
식물 A수경재배로 길러지고 있는 식물. 씨앗에서부터 자라난다.
식물 B밭에서 자생하고 있는 식물. 씨앗에서부터 자라난다.
관리자수경재배 비닐하우스의 관리자. 한때는 밭의 주인이었다.

아침 해가 밝는다. 씨앗 단계의 식물A는 하우스의 수경재배 수조 안에서, 마찬가지로 씨앗 단계인 식물B는 땅바닥에서 눈을 뜬다.

식물B
건조해……. 봄비가 좀 왔으면 좋겠는데. 벌써 며칠째 물을 못 마셨는지 모르겠어.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어. 누가 보면 모래사장인 줄 알겠네.
(땅바닥을 더듬는다) 어딘가 좀 축축한 곳이 있을 텐데. 지난번에 온 빗물이 고인 곳이라든가, 아주 운이 좋으면 지하수원을 찾을 수도 있겠지. 아니, 물기를 찾는 건 운이 아니야. 실력이지. 노력이라구. 조금만 더 손을 뻗어 보자. 발을 뻗어 보자.
(땅바닥을 더욱 열성적으로 더듬다가, 지쳐서) 이상하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여긴 원래 굉장히 비옥한 땅이었어. 바로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거든. 가만히 바닥에 누워서 귀를 기울이면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들렸지. 그 물소리를 쫓아가다 보면 촉촉하게 잘 젖어있는 부드러운 흙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어. 엄마가 그렇게 나를 낳은 거야. 엄마가 보고 싶다.
(기운을 내서) 조금만 더 손을 뻗어 보자. 발을 뻗어 보자. 그런데 정말 시냇물은 왜 없어진 거지?

식물A, 식물B가 바닥을 더듬고 헤집는 동안, 물이 찰랑찰랑 차있는 수조에서 우아한 몸짓으로 싹을 틔운다.

식물B
(계속 몸부림치다가, 돌연) 차, 찾았다! (맹렬하게 바닥을 파헤친다. 젖은 흙이다. 젖은 흙에 손발을 쑤시며 매우 기뻐한다) 물이다! 내가 찾았어, 내 힘으로!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

식물B, 자라난다. 식물A도 자라난다. 식물B는 흙에서 몸부림치느라 더럽고, 식물A는 몹시 깨끗하다. 씨앗 상태였던 식물A와 B는 싹을 틔우고 어린 풀이 된다. 여름이 온다. 태풍이 가까워서 비가 오고 있으며 후텁지근하다.

식물B
축축해……. 해가 좀 떴으면 좋겠는데. 구름이 저렇게 낮고 두꺼워선 영 무리겠지.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비가 뿌려댈 테고, 내일에나 개면 다행일까? 이건 분명히 태풍이 가까워지는 거야. 아, 너무 무서워. 나 뽑히면 어떡하지? 아니면 줄기가 꺾일지도 몰라. 홍수가 와서 뿌리가 썩어버릴 수도 있고. 그래도 한바탕 흙을 뒤엎고 가면 숨통이 트이겠지. 하루, 이틀 밤만 버티면 돼. 운이 좋다면…… 아니, 이제 운 타령은 하지 말자. 난 할 수 있어. 봄에 기어이 젖은 흙을 찾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구름을 뚫고 하얀 햇빛이 나를 따사롭게 안아줄 때까지 참고 견딜 거야. 우리 엄마도 그렇게 태풍을 이겨내고 나를 낳았으니까.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쿵쿵쿵, 아니, 쾅쾅쾅, 아니……. 콸콸콸! 저게 대체 뭐야? 흙탕물이다! 흙탕물이 꼭 쓰나미 같아! 홍수다! 시냇물은 없어졌는데, 대체 어디서 넘친 거지? 안 돼! 아직 난 준비가, 제발! 싫어! 뽑히기 싫어! 꺾이기 싫어! 썩기 싫어! 살려줘! 엄마아아아!

식물B, 범람한 흙탕물에 휩쓸리면서도 뽑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 사이 수경재배 하우스 안의 식물A, 기품 있게 꽃을 피워낸다. 식물B, 흙탕물 범벅이 된 가운데에서 가까스로 꽃을 피운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가을이 온다. 꽃이 시들고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식물B
아, 정말 좋은 날이야. 맑고,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도 상쾌하고. 그래, 건조한 봄과 폭풍의 여름을 이겨내면 이렇게 좋은 날이 오는걸. 힘들었지만, 정말 죽은 뻔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길고 굵은 뿌리와 튼튼한 줄기를 갖게 됐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어. 그리고 이것 봐, 이제는 나도 어엿한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이 작은 씨방이 이제 커다란 열매로 자라날 거야. 아주 탐스럽고 달콤한 열매로. 내 열매는 누가 먹게 될까? 아마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새들이나, 짐승들이 먹어도 나는 기뻐. 누구든 간에 맛있게 먹고 씨앗을 다시 땅으로 돌려주면 되니까. 그때까지는 가지가 끊어질 것처럼 무거워도 꾹 참고 견뎌야 해.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길렀잖아? 엄마, 그리운 우리 엄마. 엄마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던 이 고마운 땅에서 나도 이렇게 멋지게 자라났어요. 엄마가 했던 것처럼 저도 죽을 각오로 노력했어요. 손을 뻗어서 하늘을 받치고, 발을 뻗어서 땅을 딛고 있어요. 엄마, 어디선가 보고 계시죠? 제가 자랑스러우시죠?

식물B가 작은 열매를 뿌듯해하고 있을 때, 식물A는 그 두 배쯤 되는 커다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여신 같은 자태로 서있다. 이때 관리인 등장. 식물A의 열매에 설탕주사를 놓고 나온다. 설탕주사를 맞은 식물A의 열매는 더욱 맛있어진다.

관리인
(하우스 앞에서 휴대폰으로) 그래, 올해 농사도 그럭저럭 괜찮게 됐어. 자네 말대로 수경재배를 시작하니 편해지더군. 맞아, 그 공사. 연초에 한 거. 개천 물길을 따로 내서 하우스에 직접 연결했지. 덕분에 수도세는 거의 들지 않고 1급수를 공급할 수 있었어. 조언 고맙네. 그런데 위험하기도 했어. 여름에 태풍 왔던 거 기억나나? 그때 그 물길이 터져버렸지 뭐야. 급히 쌓은 둑이어서 무너진 거야. 아니, 하우스는 말짱하지. 밭이 좀 망가지기는 했지만. 뭐 어차피 밭은 다 갈아버려서 지금 남은 건 잡초뿐이야. 아니, 나도 팔아버리고 싶은데 골프장이나 공장 같은 걸 세우기엔 너무 작아 쓸모가 없다 하더라고. 그래도 놀리느니 헐값에 넘기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 알았네, 알았어. 한 상자 꽉꽉 담아서 보내지. 꿀맛일 거야. 청정재배니까 안심하고 껍질째 먹어. 그래, 나중에 한 번 보세.

관리인, 통화를 마친 후, 충격에 빠져 있는 식물B를 본다.

관리인
아니, 이게 뭐야? 이 밭의 나무들은 전부 갈아엎었는데 왜 이런 게 남아 있지? 세상에, 꼴에 열매까지 열렸네. (열매를 따서 한 입 먹고, 인상을 찌푸리며 뱉는다) 퉤퉤, 역시 먹을 게 못 되는군.

관리인, 열매를 버리고 하우스로 들어간다. 하우스의 식물A에게서 열매를 따서 보물단지 다루듯 소중하게 상자에 채운다. 식물B, 바닥에 버려진 열매를 본다. 가지를 늘어뜨려서 열매를 하우스 쪽으로 굴린다.

식물B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저기 들어가라고. 여기 있지 마. 어서 들어가.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물속으로 들어가. 청정 1급수야. 그게 원래는 우리 물이었는데. 그곳에서 둥둥 떠서 싹을 틔워. 손도 발도 무리해서 뻗을 필요 없어. 너는 그냥 사랑 받게 될 거야. 모두의 자랑이 될 거야. 들어가. 어서 들어가.

열심히 굴리는데, 겨울이 온다. 관리인, 하우스의 온도 조절 장치를 작동시킨다. 식물A, 따뜻한 하우스 안에서 다소곳하게 새봄을 기다린다. 식물B, 얼어 죽는다.

막.

호들갑 작가소개
<수경재배>를 쓴 최하은 작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한반도가 냉전의 구질서의 마지막 보루로서 지구상에서 기능하게 된 1990년에 태어났다. ‘견장의 태생’으로 ‘화이트칼라의 고가도로’를 걸어왔다고 스스로를 조소하는 그는 2014년 2월, 앞으로의 커리어에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정치외교학과 졸업장을 업고 분연히 연극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놈의 천민자본주의’를 입에 달고서도 매일 정시 출근하며 시키는 일을 하는 성실한 비정규직의 본분을 다하고 있으며, ‘구조와 제도에 포획된 비참한 공모전 인생’을 개탄하면서도 또 다른 낙방을 위한 극작을 지속하고 있다.
2014년 ‘이십할페스티벌’에서 <6단계>를 쓰고 연출하며 소박하게 데뷔(?)했으며, 현재는 ‘견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유연한 상상력을 무대 위에 구현한다’는 추상적 구호와 함께 ‘창작정거장 이상’이라는 유령극단을 운영 중이다. 유령극단답게 정단원은 대표 최하은 한 명이므로, 지금 오면 당신도 부대표. 단원 및 객원 상시 모집 중. (편집위원 오세혁)

 

태그 수경재배,최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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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희곡릴레이는 공모를 통해 작품을 접수합니다.상반기와 하반기, 연2회 작품 공모를 시행하며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사항을 통해 안내 드립니다. 신진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65호   2015-04-02   덧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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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1st
희곡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식물B 대사[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가 꼭 우리네 어머니들이 당신은 힘들어도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원하는 것 처럼 내 머리를 툭치고 들어오네요, 당신은 죽을 지언정 자식은 좋은 곳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엄마! 이런 좋은 글 (또 다른 낙방을 위한 극작) 응원합니다, 화이팅~!하세요.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하은
와 읽어 주시고 덧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응원 받은 만큼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_^

2015-04-03댓글쓰기 댓글삭제

nonoji
저도 읽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 . 발버둥쳐도 열악하지만 긍정적으로 뭐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간 잘자라준 A . 하지만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회 있는자는 당연한것도 당연하지 못하게 된거겠죠 . 바보같이 착하게 살아온 법과 규칙을 다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온 내 부모가 내 자식만은 더 나은삶을 살기바라며 착하게 살지마 그럼 너만 바보가된단다가 떠오르네요 최고에요 ㅜ

2017-01-10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