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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로그: 경윤이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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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놀이터
- 한쪽에 놀이터 모래밭, 저만치 떨어진 곳에는 벤치.

시간
여름과 가을 사이

등장인물
경윤(25세)
여자아이(7세)

해질 무렵.
아직은 푸르스름하고 청청한 하늘빛.
모래 위에 색색의 플라스틱 그릇들.
그 옆에는 뿌리채 뽑아둔 이름 없는 풀과 꽃.
멀리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 벌레 우는 소리.
이따금, 아스라하다-

아이가 혼자 놀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수더분한 두 뺨에 생기가 흐른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모래를 퍼담고 두꺼비집을 짓고 하며
짐짓 놀이가 놀이가 아니라는 듯,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 진지하게 몰두한다.
잠시 후, 경윤 등장.
일회용 물병을 들고 있다.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벅차다.
낯설기도 하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
아이를 발견한다.
바라본다.
생경함에 미소 줄어들고
생각에 잠긴다.
벤치로 가 앉는다.
하늘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경윤
(문득) 저...
아이
(아랑곳않는)
경윤
저, 애기야.
아이
(본다)
경윤
....

경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담배를 도로 넣어버린다.

경윤
좀 덥네. (물병을 건네며) 마실래?
아이
(대꾸없이 다시 몰두한다)
경윤
(멋쩍은) 있다가 목마르면 얘기해. (사이) 재밌니?
아이
(흙을 다지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경윤
근데 넌 집에 안 가? (사이) 너무 늦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이런 데서...
아이
(기대에 차서) 쉿-
경윤
(덩달아 긴장한다) ....될까? 될까?
아이
하나, 둘, 셋-

아이가 천천히 두꺼비집에서 손을 뺀다. 흙이 와르르 무너진다.
아이, 개의치 않고 다시 두꺼비집을 짓는다..

경윤
(아쉬운) 에이-, 잠깐만.

경윤, 아이 옆으로 가서 쭈그려 앉는다.

경윤
(손을 넣고 흙을 다지며) 이렇게 하면 더 잘 되잖아. 봐. 이렇게. 이렇게.

신이 나서 만드는 경윤.

아이
(도와주다가 경윤을 흘긴다)
경윤
(사이) 너도 안다고?
아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윤
아, 그래. 미안.

둘, 말없이 같이 논다. 아이의 작은 두 손이 경윤의 두꺼비집을 꼭 꼭 누른다.
둘은 남이거나 자매이거나 이모와 조카일 수 있지만, 이 순간의 그들은 친구처럼 보인다.

아이
(기대에 차서 웃는다)
경윤
하나, 둘, 셋-

경윤, 조심스레 손을 뺀다. 봉분 같은 흙더미 속에 선명하게 어둠이 생긴다.

경윤,아이
와-
경윤
그땐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맨날 이거 하느라 밥도 안 먹어, 집에도 안 가.... 그래도 참 심심하진 않았어. 이런 말 멍청하지만, 살겠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나름 행복했구. 그치?

아이, 두꺼비집을 뭉개고 그 위에 시들해진 풀과 꽃을 다시 심기 시작한다.
금세 꽃 하나가 태어난다.

경윤
이쁘네. (중얼거리는) 근데 여기선 못 살겠지. 퍽퍽해서.
아이
(열심히 풀을 심는다)
경윤
(퍼질러 앉으며)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물을 주며) 밥이나 먹어, 얘들아.
아이
(웃음)

사이.
금세 꽃밭이다.
멀리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

경윤
(소리에 잠기며) 옛날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알아? (웃음)
먼지 맛 아이스크림.
아이
(본다)
경윤
그게, 엄마가 일하던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꽁으로 얻었거든.
근데 집 오는 길에... 너무 아까우니까 까놓고 먹지는 못하고
조심 조심 들고 오다가 아이스크림을 자동차 유리에 스쳐버린 거야.
크림에 먼지가 잔뜩 묻어서 한입도 못 먹고 버리게 생겼는데,
너무 아까우니까...아깝잖아. 그래서 그냥 눈 꼭 감고 끝까지 다 먹어버렸어.
근데 머리 커지고 팔다리가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그 쓴맛이 잊혀지질 않는거야.
창피하기도 하고...어릴 땐 아이스크림 하나로 충분했는데...하면서 말야.
그래서 이름을 지어줬지. 뭐, 별 의미는 없어도...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쓴맛이잖아.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경윤.

경윤
... 또, 또,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손바닥보다 큰 플라타너스 잎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지.
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이렇게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얼굴을 비추면 이마 위로 무지개가 찰랑거렸어.

(사이)

근데, 언제부턴가 기름 웅덩이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슬픈 생각이 들어.
왜냐면...왜냐면... 삶이 꼭 그런 것 같잖아.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씻으려 하면 지겹도록 엉겨붙는,
기름 떼에 절은...예쁜 무지개 같아.
아이
.....
경윤
(헛헛한 미소) 어쩌면, 넌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걸까?
아이
(경윤에게 물장난을 친다)
경윤
(닦으며) 야!

경윤, 지그시 보다가
아이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그러다 운다.

경윤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사이) 나, 예전엔 시간이 오랜 세월 쌓이고
또 쌓이는 지층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난 그 층층의 겹겹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것 같아.

아이, 말없이 경윤의 눈물을 닦아준다.

경윤
....시간의 강물 속에서 떠오른 조각조각들을 다 이어붙이면... 그러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 서로를 본다.
점차 희미해지는 하늘빛.
두 사람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점차 붉은 기가 도는 하늘빛.
경윤, 비로소 웃는다.
눈물 섞인 웃음 위로
붉은빛이 서서히 번져나간다.

경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자. 경윤아.

경윤,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털어주고 등을 돌려 앉는다.
아이가 경윤에게 업힌다.
몇 걸음 걸어나가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본다.
노을빛이 환하게 퍼부어진다.
경윤,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벅차다.
젖는다.
곱사등이가 된 그림자.
시절을 짊어진 그림자.
그림자 위에 그림자.

흠뻑.

* Enigma - The Child In Us

음악과 함께
서서히 암전.

(* 어둠 속 자막)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때
나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경윤이를 위한 노래.

호들갑 작가소개
1991년 7월생. 반오십. 대학도 전공도 소속도 없어 딱히 호들갑 떨며 자랑할 만한 게 없음. 중학교 시절, 또래 친구들이 삼순이와 커피프린스 1호점에 열광할 때 정하연 작가의 <명동백작>, <신돈>같은 작품에 빠져 Drama에 막연한 동경을 품었고, 졸업 직전 도덕선생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백일장에 나가 농촌시를 쓰고 금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시를 쓰기 시작. 한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재능부족으로 좌절, 어찌어찌하다가 영화를 거쳐 연극까지 오게 되었다. 작년 겨울, 패기 있게 연출과에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하여 겨울 내내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만 하다 방황과 고뇌와 게으름 끝에 생애 첫 작품인 찌질자전극 <경윤이를 위한 노래>를 완성, 지인에게 축하메시지와 함께 맛있는 아이스크림 선물을 받았다. 요즘은 나의 하찮음을 인정하고 또 인정한 끝에 <먼지가 먼지로 살아남는 법>을 강구하고 있으며 4살 조카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열심히 인간의 본질을 깨우치는 중으로, 비록 첫 작품은 맥아리 없었으나 언젠가 반드시 <명동백작>처럼 힘 있는 작품을 쓰고 연출하겠다는 것이 나름의 목표라면 목표. (편집위원 오세혁)

 

태그 모놀로그: 경윤이를 위한 노래,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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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희곡릴레이는 공모를 통해 작품을 접수합니다.상반기와 하반기, 연2회 작품 공모를 시행하며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사항을 통해 안내 드립니다. 신진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65호   2015-04-02   덧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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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글이 좋소. 반오십 청년이여, 앞으로도 더욱 더 열심히 하시길!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글쓴이
나그네님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고 또 열심히 쓰겠슴니다^^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홍크
작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잃지 않고 계속 좋은 글을 써주길 바래봅니다. 두번 읽어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Enigma - The Child In Us 라는 노래와 같이 읽으면 더 좋은거 같아요. 살짝 링크를 첨부해봅니다. https://youtu.be/JuUPzxRsgLc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글쓴이
홍크님! 링크 첨부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박언니
멋지다 !! 응원할게요

2015-04-07댓글쓰기 댓글삭제

김까미
우와 정말 좋네요.^ㅡ^ 앞으로 응원 할게요.

2015-05-14댓글쓰기 댓글삭제

차자드
스스로 하찮다 여기고 찌질하다고 말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당신만큼 빛나는 연극쟁이는 없을거에요 정말 예쁜 글이에요 기억해요? 내가 예쁘다고 표현하는 건 진짜 남다른 의미였던거 말이에요.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2015-06-09댓글쓰기 댓글삭제